지난 주말, 아이와 함께 하동으로 향했습니다.
토지 문학제 백일장에 참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백일장은 묘한 자리입니다.
평소에는 한 문장을 붙잡고 며칠씩 씨름하면서도,
막상 정해진 시간 안에 써야 할 때면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이번에도 처음에는 제법 잘 풀리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다 고개를 들었을 때였습니다.
앗, 망했다 싶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남은 시간은 고작 20분 남짓.
퇴고는커녕 결말도 제대로 맺지 못한 원고를 일단 제출했습니다.
문학적 완성도를 향한 집념보다 마감 시간을 지키려는 생존 본능이 앞선 순간이었습니다.
결과는 장려상이었습니다.
조금 더 잘 쓰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을 감추고 싶지는 않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아쉬움은 때로 상보다 오래 남으니까요.
돌아오는 길에도 다시 써 보고 싶은 문장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왜 생각나지 않았을까 싶은 말들도 있었습니다. 글은 늘 한발 늦게 도착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오래 기억에 남은 것은 백일장의 결과만이 아니었습니다.
박경리문학관에서 작가의 생애를 살펴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살아 낸 시간이 어떻게 한 편의 문학이 되는지 생각했습니다.
『토지』라는 작품의 무게를 떠올리며,
몇 시간 안에 글을 완성하려 애쓰던 제 모습도 돌아보았습니다.
좋은 글은 정해진 시간 안에 완성하는 기술만으로 태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래 살아 낸 날들이 몸속에 쌓이고, 그
시간이 마침내 자기만의 언어를 얻는 일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학관을 나와 최참판댁으로 향했습니다.
오래된 집과 마당, 세월을 견딘 풍경 사이를 아이와 함께 걸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깃든 이야기와 지나간 시간을 생각했지만,
아이는 제 손을 잡고 걷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같은 길을 걸어도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었겠지요.
저는 지나간 시간을 읽으려 했고, 아이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향해 자라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훗날 이 여행을 기억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래된 집의 이름도, 그곳에서 보았던 풍경도 잊을 수 있습니다.
아빠가 백일장에 참가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라고 해서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어린 시절의 어떤 시간은 기억이라는 모양을 갖추지 못한 채 한 사람의 마음속에 남기도 합니다.
아빠와 함께 걸었던 길이 아이의 마음 어딘가에 작은 온기로 남는다면,
이번 여행은 그것만으로도 제 몫을 다한 셈입니다.
하동에 간 김에 금오산 케이블카도 탔습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걷던 길에서 보던 모습과 달랐습니다.
발아래 펼쳐진 산과 멀리 이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여행의 속도를 늦췄습니다.
백일장에서 잘 써지지 않던 문장도,
결과에 대한 아쉬움도 그 순간만큼은 굳이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땅 위에서 걸을 때는 길의 굴곡을 살피느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높은 곳에서는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조금 전까지 발걸음을 붙들던 길도 멀리서 보니
산과 산 사이를 잇는 하나의 선이었습니다.
글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가까이 들여다볼 때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 조금 멀리서 돌아보면
그때의 실패와 망설임까지 하나의 길을 이루고 있을지 모릅니다.
더 잘 쓰고 싶었던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그 아쉬움만 들고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사진을 몇 장 남겼습니다.
최참판댁의 풍경과 하동의 산, 아이와 함께했던 시간들입니다.
사진을 다시 꺼내 보는 날이면 백일장에서 몇 등을 했는지보다
그날 우리가 어떤 길을 걸었는지 먼저 떠올리고 싶습니다.
문학제에 참가한 아빠와 여행을 온 아이가 같은 주말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그날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아이가 그 글을 읽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아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을 아빠의 문장으로 다시 건네줄 수 있을 테니까요.
백일장은 끝났지만 하동에서 가져온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날 원고지에는 다 쓰지 못했지만, 함께 걸었던 시간은 제 안에 남았습니다.
장려상은 상장으로 남았고,
아쉬움은 다음 글의 몫으로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아이와 함께한 하동의 주말은 몇 등인지 따질 필요 없는 한 편의 이야기로 남았습니다.
이번에는 원고지보다 여행이 더 많은 문장을 써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