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낳고 2개월 남짓, 엄마 아빠 집에 들어가서 살았다. 결혼 전의 원래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남편과 아기와 셋이 함께 짐을 풀었다. 9주 간의 출산휴가 기간을 생각하면 드라마와 미역국이 떠오른다. 하루에 세 번, 네 번, 다섯 번 소고기 미역국을 먹고 수유를 했다. 겨울인데도 땀이 엄청 많이 났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남편이 퇴근을 했다. 함께 식사를 하고 밤 9시가 되면 남편은 내 방에 들어가 대학원 수업을 듣고 나는 엄마와 아기와 셋이 나란히 거실에 누워 드라마를 봤다.
그때 봤던 드라마가 <그들이 사는 세상>이었다. 30대 초반 푸릇푸릇한 피디, 작가, 배우들이 함께 일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이기고 지는 세상을 보면서 나는 내 회사가 그리웠다. 내 온라인 게임 생활은 아주 힘들었지만 그들과 술 마시고 워크숍을 가고 회의하면서 때론 룰루랄라 이기고 때론 처참하게 지면서 꽤 괜찮았던 것 같다. 드라마는 호흡이 매우 빨랐고 30대 온라인 게임인들은 거침없이 싸웠다. 거침없이 말하고 싸우고 울고 웃고. 나는 빠져들듯 드라마를 보는데 어느 날 함께 드라마를 보던 이모가 옆에서 말했다.
민선아, 나는 저 드라마가 도통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
덧붙여 이모는 온라인 게임 생활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고 저들이 하는 일들이 짐작도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무슨 말인지 이해도 안 가고 재미도 없다고. 나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고. 아, 이 드라마가 전혀 재미없는 사람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딴소리지만 나는 언젠가 이모를 인터뷰할 일이 한 번은 생길 것 같다. 내 이모는 정말 말을 진솔하게 잘한다.
9주 간의 출산휴가를 끝으로 나는 백일떡을 들고 회사에 복직했다. 따끈따끈한 떡 박스를 들고 택시를 타고 안양에서 강남까지 갔던 기억이 난다. 따끈따끈한 떡을 품고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팀원들이 나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었는데. 팀장님이 "이야~ 너무 맛있다."라고 말하면서 맛있게 드셔주셨었는데.
6년 후 나는 육아휴직을 했다. 만 5세까지 가능했던 육아휴직의 막차를 탄 나는, 다시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삶을 찾았다. 그때는 <미생>이 한창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었다. 이번엔 더 몰입이 되었다. 영업 조직에 속했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조직에서 영업이 제일 큰 회사에 다녔었고 일터의 분위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거래처랑 밀고 당기고, 영혼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야근을 하고, 운전하면서 메모하면서 전화하면서 점심을 먹는 삶을 살고. 디비전만 달랐지 완전히 한 달 전의 내 삶이 거기 있었다. 어느 날 옆에서 드라마를 함께 보던 엄마가 이런 말을 했다.
민선아, 정말 회사에서 사람들이 저렇게 싸우니? 말도 안 돼.
엄마. 싱크로율 100%야. 저것보다 더 개싸움을 해. 지면 도태되거든. 지면 끝이거든. 그런 말을 어떻게 하면 더 설명력 있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엄마에게 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도 온라인 게임 생활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삶을 사셨기 때문에 이모와 마찬가지로 뭔가 공감할 수 없는 지점이 매우 많았던 것 같다. 양복 입고 깨끗하고 현대적인 사무실에 앉아서 저렇게 사람들이 입에 침을 튀기며 땀을 흘리며 머리는 엉망이 돼가지고 허구한 날 싸우는 게 말이 안 돼 보이셨겠지.
회사원 시절에,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런데 어쨌든 한 번도 쓰지 않고 인생이 여기까지 와 버렸고, 이제야 쓰려고 하니 전혀 생각이 안 난다. 기억이 안 나는 것이 아니라 글로 쓸 어떤 것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언젠가 야근 후 절친 후배랑 회사 앞 편의점에서 조미김에 맥주를 마셨던 날, 언젠가 임원이 길길이 날뛰어서 딱 사무실을 뛰쳐나가고 싶은 때 선배가 텀블러 안에 시원한 맥주를 따라서 몰래 가져다줬던 날, 그런 날 나는 한동안 글을 쓰고 싶어 했었다. 이제는 그런 기억들이 많이 사라졌고 퇴색되었고 내 감정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때 썼어야 했다.
인생의 단계마다 그 시절에만 쓸 수 있는 글이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도 이 순간에만 쓸 수 있는 글들이 있음이 확실하다. 고3엄마라는 좌불안석 역할도, 40대의 끝자락인 내 나이도, 이제 막 두 권의 바카라을 쓴 초보 작가의 정체성도, 다 지금 이 순간만 고유한 내 것들이다. 그러니 조금 더 써 봐야겠다. 다다다다다 써 봐야겠다. 더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