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살아갈 힘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나뭇잎을 흔들고, 사랑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며, 양심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을 찌른다. 하나님도 그러하시다.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시지만, 말씀과 역사와 양심과 사랑과 은혜를 통해 우리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신다.


사람은 보이는 것을 붙들고 싶어 한다. 눈에 보이는 물질, 눈에 보이는 성공, 눈에 보이는 사람의 인정, 눈에 보이는 돈과 권력과 관계를 통해 안심하려 한다. 그러나 신앙은 보이는 것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실제로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히11:1)


영화 〈십계〉를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성경의 출애굽기에서도 하나님은 친히 돌판에 계명을 새기셨다고 증언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산에서 내려온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거룩한 예배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앞에 절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었다.


모세는 분노했다. 하나님의 손으로 쓰인 돌판을 들고 내려오던 그는 백성의 우상숭배를 보고 그 돌판을 던져 깨뜨렸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폭발이 아니었다. 그 장면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언약이 깨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우신 관계를 인간이 우상으로 무너뜨린 것이다.


우상숭배는 단지 금송아지를 만드는 행위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우상은 있다. 돈이 하나님보다 커지면 돈이 우상이다. 사람이 하나님보다 커지면 사람이 우상이다. 성공이 하나님보다 커지면 성공이 우상이다. 내 자존심, 내 욕망, 내 감정, 내 계획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면 그것도 우상이 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지만, 우상은 보인다. 그래서 사람은 자꾸 우상에게 끌린다. 보이는 것은 즉각적인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반드시 참된 것은 아니다. 금송아지는 눈에 보였지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없었다. 돈은 눈에 보이지만 영혼을 살릴 수 없다. 사람의 인정은 달콤하지만 영원하지 않다. 세상의 성공은 화려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주셨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도록, 삶의 기준을 분명히 세우도록 율법을 주셨다. 계명은 인간을 억압하기 위한 감옥이 아니라, 인간을 살리기 위한 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묶는 족쇄가 아니라, 우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붙드는 생명의 기준이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는 단순히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감정 표현이 아니다. 회개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하나님을 등지고 가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죄를 합리화하던 사람이 죄를 죄로 인정하는 것이다. 내 생각이 기준이라고 주장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회개는 자기비하가 아니다. 회개는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일이 아니다. 참된 회개는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 죄만 들추어내며 우리를 짓누르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죄를 분명히 보게 하시지만, 동시에 그 죄에서 일어나 다시 살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시다.


사람은 누군가의 잘못을 보면 먼저 정죄하려 한다. “왜 그랬느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너는 끝났다”라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대하실 때 다르시다.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지만, 회개하는 영혼을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잘못을 지적하시되, 그 사람을 다시 세우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시키시고, 다시 세상 속에서 바카라임 있게 살아갈 힘을 주신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회개 기도다. 다윗은 왕이었다. 그는 권력도 있었고 명예도 있었고 군사력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범했다. 밧세바를 범했고, 그 죄를 숨기기 위해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인간적으로 보면 왕의 권력으로 덮을 수 있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었다.


선지자 나단이 다윗의 죄를 지적했을 때, 다윗은 변명하지 않았다. 핑계 대지 않았다. 남 탓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고백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라고 기도한다. 그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 알았다.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다시 설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참된 회개는 죄를 작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죄를 크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죄를 크게 인정한다는 것은 절망 속에 주저앉는다는 뜻이 아니다. 죄의 크기를 인정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도 알게 된다. 회개는 절망의 끝이 아니라 은혜의 시작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후회가 있다. 더 잘할 수 있었던 일, 더 정직했어야 했던 순간, 더 사랑했어야 했던 사람, 더 참았어야 했던 말, 더 기도했어야 했던 시간들이 있다. 삼십 대가 지나고, 사십 대가 지나고, 오십 대가 되면 인생은 더 무겁게 느껴진다. 젊을 때는 시간이 많은 줄 알았지만,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 있다.


그때 사람은 질문하게 된다.

나는 왜 살아왔는가?
나는 무엇을 붙들고 살았는가?
나는 누구를 사랑했는가?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었는가?
남은 시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필요한 것이 회개다. 회개는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것이다. 방황했던 시간, 실패했던 시간, 상처 주고 상처받았던 시간, 혼자 버티며 울었던 시간, 잘못된 선택으로 무너졌던 시간까지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폐기물처럼 버리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과거까지도 은혜의 재료로 사용하실 수 있다. 실패를 통해 겸손을 배우게 하시고, 상처를 통해 긍휼을 배우게 하시며, 방황을 통해 길 잃은 사람을 이해하게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는 늦은 인생도 끝난 인생이 아니다. 회개하고 돌아서는 순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강력 사건과 슬롯의 여러 비극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낀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너질 수 있는가 생각하게 된다. 그런 사건들은 우리 슬롯에 경고가 된다. 인간은 법과 제도만으로 완전히 통제되지 않는다. 마음이 무너지면 삶이 무너지고, 양심이 무너지면 관계가 무너지며,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인간성도 흔들린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주의해야 한다. 삶의 방향을 바로 세워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도 중요하다. 직업을 찾고, 일을 하고, 가정을 세우고, 결혼을 준비하고, 배우자를 만나 대화하며,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질서 안에서 바카라임 있는 삶을 살아가려 애쓰는 것은 귀한 일이다. 신앙은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가정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배우자와의 만남도, 대화도,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도 중요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혼자 살도록만 창조하지 않으셨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다듬어지고, 사랑 속에서 자라며, 바카라임 속에서 성숙해진다.


그러나 관계도 저절로 아름다워지지 않는다. 사랑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대화에는 겸손이 필요하다. 가정에는 희생이 필요하다. 함께 산다는 것은 단순히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약함을 감당하고 서로의 부족함을 기다려주는 일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을 말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다.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


이 사랑은 감정적인 사랑만이 아니다. 이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이다. 자기중심을 내려놓는 사랑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살리기 위해 말을 절제하는 사랑이다. 내 권리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관계를 세우기 위해 인내하는 사랑이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말하고 싶다. 억울한 사람은 더 말하고 싶다. 상처받은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외치고 싶다. 본인도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고 싶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증명하고 싶다. 그러나 사랑의 열매는 하루아침에 맺히지 않는다. 때로는 말보다 기도가 필요하고, 주장보다 인내가 필요하며, 급한 결과보다 깊은 뿌리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희생의 원리를 보여준다. 씨앗은 땅속에 묻혀야 한다. 묻히는 시간은 보이지 않는 시간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이다. 썩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서 생명이 준비된다.


우리의 인생에도 그런 시간이 있다. 기도해도 당장 응답이 보이지 않는 시간, 노력해도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시간, 사랑해도 상대가 몰라주는 시간, 회개하고 돌이켜도 현실이 쉽게 바뀌지 않는 시간이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은 헛된 시간이 아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를 내리게 하신다. 하나님은 인내의 시간을 통해 사람을 깊게 만드신다.


다윗도 하루아침에 왕이 되지 않았다. 그는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오랫동안 광야를 지나야 했다. 사울에게 쫓기고, 억울한 시간을 견디고,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배웠다. 시편의 많은 고백은 편안한 궁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고난과 눈물과 회개의 자리에서 나왔다.


큰 사람이 된다는 것은 큰소리를 내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큰 사람은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다. 큰 사람은 무너지더라도 다시 하나님 앞에 엎드릴 줄 아는 사람이다. 큰 사람은 버티고, 이겨내고, 인내하면서도 마음이 딱딱해지지 않는 사람이다. 큰 사람은 사랑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회개는 큰 사람의 길이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방어에 갇힌다. 늘 변명하고, 늘 남 탓하고, 늘 자기 억울함만 말한다.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볼 수 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다시 은혜를 구한다. 그래서 회개하는 사람은 무너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시 세워지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새 마음을 주신다.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신다. 이것이 다윗의 기도였다. 다윗은 단순히 벌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의 회복을 구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것이 진짜 회개의 중심이다.


우리에게도 이 기도가 필요하다. 외적인 문제 해결만 구할 것이 아니라, 마음의 회복을 구해야 한다. 돈의 문제, 관계의 문제, 온라인 게임의 문제, 가정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새로워져야 한다.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해도 또 다른 문제가 반복된다. 그러나 마음이 새로워지면 같은 현실 속에서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사랑은 회개와 연결되어 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랑은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다. 자기 잘못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어렵다. 반대로 사랑 없는 회개는 두려움과 죄바카라감에 머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회개로 부르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부르신다.


부모가 자녀를 훈계하는 이유도 미워해서가 아니다. 좋은 선생님이 학생을 열심히 가르치는 이유도 그 학생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기 위해 졸업증명서를 떼러 모교를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라. 그때마다 침이 튀도록 열정적으로 가르치던 선생님들의 뒷모습이 생각난다. 당시에는 그 말이 잔소리처럼 들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면, 누군가 나를 위해 그렇게 애썼다는 사실이 마음에 남는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다. 때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찌른다.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우리의 교만을 깨뜨리고, 우리의 우상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시 살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회개로 부르신다.


사랑은 방치가 아니다. 사랑은 죄를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상대가 무너지는 길을 가는데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그래서 사랑은 때로 아프게 지적하고, 때로 기다리며, 때로 눈물로 기도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보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히 드러난 자리다.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넘기지 않으셨다. 죄의 대가를 십자가에서 담당하게 하셨다. 동시에 하나님은 죄인을 버리지 않으셨다. 독생자를 보내셔서 죄인이 다시 살 길을 여셨다. 십자가는 공의와 사랑이 함께 서 있는 자리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이 무서운 심판자이기만 하다면 우리는 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시기에 우리는 돌아갈 수 있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의 집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고, 아버지는 그를 품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신다. 방황했던 삼십 대도, 흔들렸던 사십 대도, 무거워진 오십 대도 하나님 앞에서는 끝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이를 보고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지나간 시간만 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지금 돌이키는 마음을 보신다.


사람은 “이미 늦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은 “너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은혜로 다시 설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사람은 과거를 들추지만, 하나님은 회개한 사람에게 새 길을 여신다.


물론 다시 살아가는 길은 쉽지 않다. 회개했다고 모든 문제가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윗도 회개했지만 죄의 결과를 피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다시 길을 걸었다. 회개는 바카라임을 회피하는 도피처가 아니다. 회개는 바카라임 있는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잘못을 인정했다면 이제는 버티고 이겨내야 한다. 인내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세워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감정에만 머물지 말고, 실제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말이 바뀌고, 관계가 바뀌고, 돈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고,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다.



그리고 지혜도 필요하다. 모든 일을 혼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때로 교만일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누군가를 참여시키고, 함께 의논하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서로의 은사를 나누는 것도 지혜로운 삶이다. 모세도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하려 했을 때 장인 이드로의 조언을 들어야 했다. 일을 나누는 것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성숙의 증거다.



신앙생활도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공동체도 필요하다. 기도해주는 사람, 조언해주는 사람, 함께 울어주는 사람, 때로는 바른말을 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사랑은 혼자 완성되지 않는다. 사랑은 관계 속에서 훈련된다.



배우자와의 만남도 그렇다. 단지 결혼이라는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함께 대화할 수 있는가, 함께 기도할 수 있는가, 서로의 부족함을 품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시간은 흘러간다. 그러므로 중요한 사람과의 대화를 미루지 말아야 한다. 사랑한다면 표현해야 하고, 미안하다면 사과해야 하며, 함께 가야 한다면 믿음 안에서 방향을 세워야 한다.



인생은 결국 사랑의 문제로 돌아간다.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이웃을 사랑하는가. 자신을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사랑하는가. 죄는 사랑의 질서를 무너뜨린다. 하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이웃보다 내 욕망을 더 사랑하며, 진리보다 편리함을 더 사랑할 때 죄가 자란다. 회개는 사랑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



우상을 버리는 것.
내 죄를 인정하는 것.
다시 말씀 앞에 서는 것.
사랑을 실천하는 것.
인내하며 열매를 기다리는 것.



이 모든 것이 회개의 길이며 사랑의 길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보고 계신다. 우리의 눈물도 보시고, 우리의 방황도 보시고, 우리의 죄도 보시고, 우리의 회개의 마음도 보신다. 사람은 겉모습을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모세가 깨뜨린 돌판 앞에서, 다윗의 회개 기도 앞에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 앞에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열매 맺는 말씀 앞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주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우상보다 더 실제로 믿게 하소서.
주님, 내 안의 금송아지를 깨뜨리게 하소서.
주님, 다윗처럼 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게 하소서.
주님, 죄바카라감에 머물지 않고 은혜 안에서 다시 일어나게 하소서.
주님,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을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주님, 한 알의 밀처럼 인내하며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하소서.
주님,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려 하지 않고 지혜롭게 사람들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주님, 남은 인생을 방황이 아니라 사명으로 살게 하소서.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회개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가능하다. 인내도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열매도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다. 우리가 할 일은 돌아서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서고, 말씀앞으로 돌아서고, 사랑의 자리로 돌아서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세우신다.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시키신다.
상처 입은 마음을 싸매신다.
방황했던 시간을 은혜의 재료로 바꾸신다.
그리고 다시 살아갈 힘을 주신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그 사랑은 우리의 삶 속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회개하는 자를 살리시는 사랑, 죄인을 다시 부르시는 사랑, 무너진 사람을 다시 세우시는 사랑, 기다리고 참으며 열매 맺게 하시는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사랑으로 돌아가야 한다. 회개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살아가야 한다.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회개는 늦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직도 우리를 부르신다.
그리고 그 부르심 안에서 인생은 다시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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