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바다는 말이 없으나, 결코 침묵(沈默) 하지 않는다.
포항의 거친 동해 앞에 서면, 파도는 테트라포드에 몸을 부딪치며 웅장한 포효(咆哮)를 토한다. 쿵, 쿵.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둥이 아니라, 깊은 심연(深淵)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대지(大地)의 울림이다.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가슴 한복판을 직격(直擊)하는 그 진동(震動)은, 온몸의 세포를 하나하나 깨우며 존재(存在)의 무게를 실감하게 한다. 사람들은 흔히 파도가 말이 없다고 하지만, 저토록 절실하게 온몸을 던져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그것이 무언가를 향한 뜨거운 외침임을 알게 된다. 다만 우리 우매(愚昧)한 귀가 그 깊은 연유(緣由)를 다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야무지게, 때로는 아프도록 매섭다. 바람이라는 존재가 이토록 많은 손을 가진 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모자를 낚아채려 기승을 부리고, 정성껏 빗어 넘긴 머리카락을 단숨에 헝클어놓으며, 외투 속으로 기어들어 차가운 손으로 등을 쓸어내린다.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밀어내 보지만, 바람은 오히려 더 바싹 달라붙는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옛 동무를 만난 반가움이 조금 과격(過激)할 뿐이리라. 그 무례(無禮) 함조차 바다의 성정(性情)이라 여기니, 오히려 마음이 푸근해진다.
방파제 끝에 서면 세상이 비로소 두 갈래로 갈라진다. 등 뒤로는 익숙한 육지(陸地), 앞으로는 알 수 없는 바다. 뒤를 돌아보면 옹기종기 모인 마을 지붕과, 골목 어귀에서 피어오를 듯한 된장찌개 냄새가 떠오른다. 소박(素朴)한 하루가 조용히 저물어가는 평온(平穩)한 풍경이다. 그러나 정면(正面)을 응시하면 오직 시퍼런 바다와 끝없는 수평선(水平線)뿐. 하늘과 물이 어디서 만나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그 무한(無限)의 경계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작고 미미(微微)한 지 새삼 절감(切感)한다.
그 작음은 공포가 아니라 오히려 안도(安堵)로 다가온다. 작아도 괜찮다는, 아니 작아야만 거대한 자연의 품에 온전히 안길 수 있다는 묵계(默契)를, 바다가 조용히 건네주는 듯해서다.
파도는 한순간도 쉬지 않는다. 테트라포드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고 흩어졌다가도, 어느새 다시 대열(隊列)을 정비해 거침없이 달려온다. 포기(抛棄)라는 단어를 배운 적 없는 듯, 물러섬이라는 법도를 알지 못하는 듯하다. 매번 처절하게 부서지면서도 다시 몸을 일으켜 도전(挑戰)하는 파도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진다. 부서짐이 끝이 아니라는 것, 흩어짐은 다시 모이기 위한 전제(前提)라는 것을, 파도는 태고(太古)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너지면 다시 일어서는 것이 바다의 불변(不變)하는 법칙(法則) 임을, 나는 그 장엄(莊嚴)한 광경 앞에서 한동안 말없이 배운다.
바람이 다시 찾아온다. 이번에는 조금 더 부드럽게, 귓가에 밀어(密語)를 속삭이듯 다가온다. 거칠게 몰아치던 기세는 사라지고, 이제는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는 전령(傳令)처럼 감미롭다. 이 바람 또한 먼 곳에서 출발해 험한 산령(山嶺)을 넘고 들판을 가로질러, 누군가의 빨랫줄을 흔들고 창문을 두드리며 이 바닷가까지 당도(當到)했을 터. 그러니 이 고단한 바람에게 잠시 옷깃을 내어주고, 그 야무진 손길을 환대(歡待)하는 것이 도리(道理) 일 것이다.
수평선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장엄한 일몰(日沒). 해가 바다의 심장(心臟)으로 내려앉을 때, 쿵쿵거리던 파도 소리도 한결 낮아지는 듯하다. 처음엔 천둥처럼 무섭게 들리던 그 소리가, 이제는 깊은 잠을 유도하는 자장가처럼 평온하게 감긴다. 바다는 그렇게 사람을 길들인다. 처음엔 경외(敬畏)와 놀라움으로 압도(壓倒)하다가, 어느 순간 모든 것을 포용(包容)하는 어머니의 품으로 변한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등을 돌리니 마을 창마다 불빛이 하나둘 켜진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고, 언덕 위 노거수(老巨樹)의 실루엣은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처럼 든든하다. 바다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돌아본다. 파도는 여전히 달려오고, 바람은 또 다른 곳을 향해 분주히 떠나간다.
그리움이란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 두고 온, 이름 모를 무언가를 자꾸만 돌아보게 만드는 마음.
파도 소리를 묵직한 짐처럼 등에 업고, 나는 다시 나의 안식처(安息處)를 향해 느린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