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도서관의 육중한 벽 안에서 시간은 본연의 **질서(秩序)**를 상실했다.
한울은 매일 같은 자리에 **정좌(正坐)**하고 있었다. 좁은 창틀로 스며드는 광선(光線)의 각도만이 무상(無常)하게 흐르는 시간의 궤적을 일러줄 뿐이었다. 서늘한 새벽의 여명(黎明), 먼지 입자들이 군무(群舞)를 추는 정오의 백광(白光), 그리고 만물을 핏빛으로 물들이며 사위어가는 황혼(黃昏)의 잔조(殘照). 그리고 이내 찾아오는 끝을 알 수 없는 **적막(寂寞)**의 밤.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새로운 손님을 대면(對面)했다.
이번에 당도한 이는 마흔 줄의 사내였다. 성명은 이태준. 칠 년 전, 불의(不意)의 교통사고로 처자(妻子)를 동시에 잃은 뒤, 술이라는 가혹한 마취제 없이는 단 하루도 명줄을 잇지 못하는 고달픈 영혼이었다.
“저는… 그저 망각(忘却)하고 싶을 뿐입니다. 운전석에서 미소 짓던 아내의 얼굴, 아빠라고 부르며 매달리던 딸아이의 음성… 그 찬란했던 기억들이 이제는 제 심장을 도려내는 **예도(銳刀)**가 되었습니다.”
한울은 침묵 속에 그의 거친 손을 맞잡았다.
기억의 **투영(投影)**이 시작되었다. 성하(盛夏)의 눈부신 가로수길. 라디오의 선율을 따라 흥얼거리던 아내의 노랫소리, 뒷좌석에서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천진하게 웃던 딸의 모습. 그리고 찰나의 순간을 가르고 들어온 비명 섞인 브레이크 파열음과 거대한 충격.
태준은 사고 직전, ‘조금만 더 속도를 줄였더라면’이라는, 실낱같은 **후회(後悔)**를 품었다. 그 한 줄기 사념(思念)이 칠 년, 즉 이천오백오십오일 동안 그의 인생을 산 채로 갉아먹고 있었다.
기억의 전이가 끝난 뒤, 한울은 태준의 비애(悲哀)를 자신의 흉부 속으로 조용히 침잠(沈潛)시켰다. 이제 그의 내면에는 열한 개의 타인(他人)의 생(生)이 함께 고동치고 있었다.
태준이 물러간 뒤, 한울은 서가로 걸음을 옮겨 새로운 서바카라을 안착시켰다.
『이태준의 기억』
바카라이 서가에 꽂히는 순간, 한울의 어깨가 미세하게 하강했다. 실존하는 무게였다. 하나, 예전처럼 영혼이 파열되는 고통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깊고 아득한 체력(體力)의 고갈이자, 숙명적인 피로감에 가까웠다.
그는 테이블로 돌아와 자신의 서바카라을 펼쳤다.
『한울의 기억』
이미 사십칠 페이지가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오늘 그는 붓을 들어 이렇게 기록했다.
『2026년 4월 19일. 열한 번째 기탁자(寄託者), 이태준. 그는 가족을 잃은 후 이천오백오십오 일간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나는 그의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대신 대부(代負)했다. 하중(荷重)은 실로 막중하나… 견딜 만하다.』
한울은 펜을 놓고 창밖의 세상을 응시했다. 도서관 너머의 풍경은 여전히 **생동(生動)**하고 있었다. 인간들은 사랑에 빠지고, 배신하며, 이별하고 재회하며, 죽고 태어나는 **윤회(輪廻)**를 반복했다. 그 모든 찰나의 편편(片片)들이 결국 이곳으로 귀결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이제는 그리 두렵지 않았다.
관리인이 다가와 그의 맞은편에 **좌정(坐定)**했다. 근래 들어 관리인의 형체는 점점 희박해지고, 그의 존재감 또한 연기처럼 흐릿해지고 있었다.
“이제 이 고역(苦役)에 익숙해졌느냐?”
한울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익숙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온전히 수용(受容)하게 되었을 뿐이지요.”
관리인은 입가에 희미한 뇌살(惱殺)적인 미소를 띄웠다.
“그것이 진정한 사서(司書)로 거듭나는 최후의 단계다. 고통의 감각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동거(同居)**하는 법을 체득하는 것.”
그날 밤, 한울은 서가를 유영(遊泳)하듯 거닐었다. 수천 권의 서바카라이 엄숙한 증인이 되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서바카라 하나하나의 바카라 등을 경건하게 어루만지다, 마침내 『이수아의 기억』 앞에 멈춰 섰다. 한울은 속으로 나직이 고백했다.
‘수아야. 나는 이제야 비로소 너를 용서한다. 아니… 나 자신이라는 지옥을 비로소 용서하려 한다.’
그는 미소 지었다. 비장(悲壯)하지만 더 이상 비릿한 통증은 없는, 정화(淨化)된 미소였다.
한울은 창가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기댔다. 먼지 입자들이 달빛 속에서 유유히 부유(浮游)하고 있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제 그의 하루는 영원히 반복될 터였다. 누군가의 지옥을 대신 짊어지고, 그 무게와 더불어 조금씩 노쇠(老衰)해가는, 하나 결코 고독하지 않은 영원한 하루.
한울은 심상(心象)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에 존재한다.’
도서관의 인광(燐光)이 그의 안면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 빛의 품 안에서, 한울은 처음으로 이 기묘한 유폐(幽閉)의 공간이 자신의 진정한 **귀처(歸處)**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도서관의 칠흑 같은 천장에서 처음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검은 허공으로부터 하얀 소낙눈이 정적(靜寂)을 가르며 조용히 하강했다. 한울은 창가에 앉아 그 **백설(白雪)**의 낙하를 묵묵히 응시했다. 눈꽃은 그의 어깨와 무릎, 그리고 무수한 사연이 깃든 서바카라들 위로 소복이 안착했다. 그것은 차가웠으나, 더 이상 살을 에는 듯한 통증을 동반하지는 않았다.
오늘로 정확히 **일주년(一週年)**이었다.
관리인은 이미 이곳에 부재(不在)했다. 그가 연기처럼 증발한 자리에 남은 것이라고는, 희미한 송향(松香)과 오랜 세월 묵혀온 서적의 퀴퀴한 향취뿐이었다. 관리인이 떠난 후, 도서관의 모든 열쇠는 비로소 한울의 손에 쥐어졌다.
한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서가 사이를 소요(逍遙)했다. 수천 권의 기억서들이 엄숙한 증인이 되어 그의 거동을 주시했다. 이제 이 바카라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울의 파편이었고, 한울은 그들의 **전부(全部)**가 되었다.
그는 『이수아의 기억』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손을 뻗어 바카라 등을 어루만지자 기분 좋은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수아야.”
한울은 아주 나직하게, 연인의 이름을 읊조렸다.
“나는 이제 너를 온전히 놓아주려 한다. 하나, 결코 망각(忘却) 하지는 않겠다. **영원(永遠)**히.”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비장(悲壯)하지만, 더 이상 비릿한 통증은 서려 있지 않은 정화(淨化)된 미소였다.
한울은 자신의 서바카라인 『한울의 기억』을 꺼내 최후의 장을 펼쳤다. 이미 삼백육십오 페이지가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그는 붓을 들어,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기록해 나갔다.
*『2027년 4월 20일. 나는 오늘, 이 도서관의 진정한 **사서(司書)*가 되었다. 영구히.
나는 더 이상 도피(逃避) 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지옥을 대부(代負)하고, 누군가의 단장(斷腸)의 아픔을 대신 기억하며, 침묵 속에 이곳을 지키겠다.
*이곳은 낙원이 아니다. 그저 아파하는 영혼들이 서로의 하중(荷重)을 조금씩 나누어 짊어지는, 영원한 **연옥(煉獄)*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연옥의 성실한 문지기가 되기로 작정했다.』
한울이 바카라을 덮는 찰나, 도서관의 모든 등불이 온화한 빛을 발하며 일제히 명멸했다. 수천 권의 서바카라들이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며, 마치 새로운 주인을 경배하듯 그를 맞이했다.
한울은 다시 창가로 돌아가 **정좌(正坐)**했다. 눈이 끊임없이 내리는 창밖의 풍경을 응시했다. 도서관 너머의 세계는 여전히 거칠게 조동(燥動)하고 있었다. 인간들은 사랑하고, 상처 입히며, 오열하고, 환희하며, 죽고 태어나는 **윤회(輪廻)**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들 중 가혹한 운명에 처한 누군가는 이 육중한 문을 두드릴 터였다.
한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심상(心象) 속에서 수많은 음성이 해일처럼 밀려와 속삭였다.
‘고맙다.’
‘미안하다.’
‘부디 살아다오.’
‘나를 기억해 다오.’
한울은 그 모든 유령 같은 목소리를 가슴 깊이 끌어안았다. 무겁고, 따스하며, 영원히 짊어져야 할 **숙명(宿命)**의 무게를. 그는 심연을 향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나는 오늘도, 이곳에 **현존(現存)**한다.”
도서관의 눈은 정적 속에 끝없이 대지를 덮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울은, 그 시린 눈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생(生)**의 의미를 체득하고 있었다.
『기억 도서관』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