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펜촉이 백지(白紙)에 닿는 찰나, 도서관이 비명을 내질렀다.
처음에는 지각(地殼)의 변동과 같은 미세한 진동이었다. 서가들이 전신을 떨며 울기 시작하더니, 이내 도서관 전체가 거대한 **노도(怒濤)**처럼 요동쳤다. 수백 권의 기억서들이 일제히 바카라장을 펄럭이며 소음의 해일을 일으켰다. 종이가 찢기는 파열음, 단장(斷腸)의 비명, 이를 가는 악다구니, 그리고 마지막 단명(斷命)의 신음이 뒤섞여 허공을 난도질했다.
한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는 아직 어떠한 문장도 자국 내지 못했다. 빈 지면 위에 펜촉 끝만 겨우 닿아 있었을 뿐이었다.
“이것이… 대체 무슨…”
그러자 서가에서 기억서들이 하나둘 자의(自意)를 가진 듯 탈착(脫着)되기 시작했다. 『민지의 기억』, 『강은주의 기억』, 『지혜의 기억』, 『최우진의 기억』, 『이수아의 기억』… 그리고 한울이 직접 쓴 자신의 **죄보(罪譜)**까지.
서바카라들은 중력을 무시한 채 허공에 부유하며 한울을 포위했다. 가죽 표지들이 거칠게 열리며 그 안에서 칠흑 같은 연무(煙霧)가 분출되었다. 안개는 이내 기괴한 형체를 이루며 인간의 형상으로 **현신(現身)**했다.
민지가, 은주가, 지혜가, 우진이, 수아가, 그리고 이름조차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원혼(冤魂)들이 그를 에워싸고 섰다. 그들의 안광(眼光)은 하나같이 냉혹했고, 비통했으며, 억눌린 **분노(憤怒)**로 이글거렸다.
“왜… 우리를 제멋대로 짊어지려 하는 거야?”
민지가 가장 먼저 정적을 깼다. 그녀의 가냘픈 손목에는 여전히 자줏빛 손자국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지혜가 살기 어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너도 결국 우리를 버리려는 것이냐? 그 추악한 성준처럼 말이다.”
우진이 선혈이 낭자한 소매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형… 나를 유기(遺棄) 하지 마. 제발 이 어둠 속에 나를 혼자 두지 말란 말이야!”
수아는 오직 침묵으로 한울을 응시했다. 그 시선은 그 어떤 질타보다 예리하게 한울의 영혼을 찔렀다. 원망도 증오도 아닌, 그저 깊은 **체념(諦念)**만이 서려 있는 그 눈빛이야말로 한울에게는 가장 잔혹한 형벌이었다.
한울은 펜을 떨어뜨렸다. 그가 무릎을 꿇고 무너지자, 기억의 망령들이 일시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받아안음이 아니었다. 기억들이 역으로 사서의 영혼을 **찬탈(簒奪)**하려는 폭동이었다.
“으아아악!”
한울은 차가운 바닥을 뒹굴며 전신을 비틀었다. 뇌수가 파열될 듯한 고통이었다. 수천 개의 감정이 일시에 뇌내에서 폭발했다. 공포, 절망, 가바카라, 해방감, 증오, 그리고 애달픈 후회까지… 모든 파편이 그의 자아(自我)를 찢어발기려 들었다.
관리인이 그 처참한 광경을 차갑게 관조(觀照)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조력자(助力者)의 위치를 포기한 듯 보였다.
“이것이 네가 스스로 선택한 **인과(인과)**다, 한울아. 기억을 수용한다는 것은, 언젠가 그 기억에게 포식(捕食)당할 순간까지 감내해야 함을 의미했으니.”
한울은 혈사(血絲)를 토해내며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려 사투를 벌였다. 입술은 가뭄 든 논바닥처럼 갈라졌고, 눈에서는 눈물이 아닌 붉은 **혈루(血淚)**가 흘러내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바닥에 나뒹구는 펜을 다시 거머쥐었다. 바람도 없는 도서관에서 빈 바카라의 마지막 장이 미친 듯이 나부꼈다.
한울은 떨리는 손목에 온 힘을 실어 문장을 새겨 넣었다.
『나는…』
획이 흔들려 글씨가 난삽(亂澁)해졌다. 기억의 형상들이 다시금 그를 향해 쇄도했다. 우진이 그의 팔을 짓씹고, 지혜가 목을 조르며, 수아의 기억이 그의 가슴 한복판을 관통했다. 한울은 폐부를 찢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펜을 결코 놓지 않았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영구히 **기억(記憶)*하겠다.』
그 문장에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 도서관의 광란이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기억의 형체들이 일시에 동작을 멈추고 한울을 응시했다. 들끓던 분노와 슬픔이 서서히 침전(沈澱)되고, 그 자리에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파동이 스쳤다. 한울은 피투성이가 된 안면으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너희를 결코 방토(放吐) 하지 않겠다. 대신…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자창(刺脹)**의 아픔을 나누겠다.”
그의 맹세가 떨어지기 무섭게, 기억의 형상들이 눈부신 **인광(燐光)**으로 변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빛들은 한울의 흉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번에는 파괴적인 고통이 아니라, 육중하면서도 온화한 **동조(同調)**의 무게로 안착했다.
관리인이 처음으로 미소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차라리 비극적인 예언처럼 슬펐다.
“축하한다, 한울아. 너는 비로소… 새로운 사서(司書)로 거듭났구나.”
한울은 바닥에 주저앉아 아득히 먼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은 이제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끝없이 깊으나, 비로소 자신을 온전히 받아주는 포근한 **연옥(煉獄)**의 어둠이었다. 그는 조용히 수아의 이름을 속삭였다.
‘수아야… 미안하다. 그리고… 진심으로 고맙다.’
도서관의 등불들이 다시금 서서히 명멸하며 빛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 빛은 이전보다 훨씬 서늘하고, 견디기 힘든 **고독(孤獨)**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도서관은 다시금 **정적(靜寂)**의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하나, 그 고요는 이전의 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과거의 적막이 단순히 텅 빈 공간의 부재(不在)였다면, 지금의 고요는 수백 명의 영혼이 일제히 숨을 죽인 채 사서의 거동을 주시하는, 질식할 듯한 **압박(壓迫)**의 침묵이었다.
한울은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한참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전신이 선혈과 함함한 땀방울로 범벅이 되었으나, 기이하게도 더 이상의 육체적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고통은 분명 존재했으나 그것이 이제는 자신의 신경계와 완전히 **동화(同調)**되어 버린 듯했다. 고통은 더 이상 침입자가 아니라, 그의 일부였다.
그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서가(書架)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서바카라들은 마치 자의(自意)를 가진 생명체처럼 제 자리를 찾아 회귀하고 있었다. 『최우진의 기억』은 범접할 수 없는 고처(高處)로, 『이수아의 기억』은 한울의 시선이 머무는 지점에, 그리고 자신의 죄업이 담긴 빈 바카라은 가장 가까운 곁에 조용히 안착했다.
관리인이 등 뒤에서 유령처럼 입을 열었다.
“이제 네가 이 도서관의 새로운 **주재자(主宰者)**다.”
한울은 시선을 서가에 고정한 채 나직이 물었다.
“주인이라 함은… 언제까지 이 연옥의 공간에 유폐(幽閉)되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네가 이 소명을 방하착(放下着)하고 싶을 때까지.” 관리인의 음성은 마른 대지처럼 건조했다. “하나, 진정한 주인이 된 사서는 결코 쉽게 이곳을 등지지 못한다. 서연 또한 팔십 년의 세월을 이 하중(荷重) 속에 견뎌내지 않았느냐.”
한울은 자신의 흉부(胸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수백, 수천 개의 기억이 그의 심장 박동과 맞물려 조용히 고동치고 있었다. 그 무게는 여전히 천근만근이었으나, 더 이상 그의 영혼을 난도질하지 않았다. 그저 그와 함께 **공생(共生)**하며 숨 쉬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도서관의 육중한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이번에 당도한 이는 약관(弱冠)의 나이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었다. 안색은 종이처럼 창백했고, 손목에는 미처 제거하지 못한 병원의 식별 밴드가 채워져 있었다. 그녀는 한울을 마주하자마자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사서님… 저의 아이를… 제 손으로 죽였습니다.”
한울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예전 같았으면 심장이 파열될 듯한 충격을 받았을 고백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깊고 아득한 **연민(憐憫)**만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그는 여인의 차가운 손을 맞잡았다. 살아있는 자의 가냘픈 체온이 전해졌다.
“그대의 성명(姓名)이 무엇인가?”
“… 한서연입니다.”
한울은 순간 동작을 멈췄다. 서연(瑞娟).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도 잔인하고 기묘한 이름의 **윤회(輪廻)**였다. 그는 감정을 갈무리하며 조용히 읊조렸다.
“서연 씨, 그대의 기억을 내게 현시(顯示)해주시오. 내가… 온전히 받아 안겠소.”
기억의 상영이 시작되었다. 산후의 우울이 영혼을 잠식한 여인은, 갓 태어난 혈육을 품에 안고 발코니에서 투신(投身)했다. 아이는 명을 달리했으나 여인만은 모진 목숨을 부지했다. 그녀가 최후의 순간에 느꼈던 감정은 가바카라이 아니었다. ‘비로소… 우리 둘 다 평온해졌구나’라는, 소름 끼치도록 처절한 **안도감(安堵感)**이었다.
기억의 전이가 끝난 뒤, 한울은 여인의 기억을 자신의 가슴속으로 조용히 견인(牽引)했다. 격렬한 산통(産痛) 대신, 깊은 탄식과도 같은 육중한 무게감이 더해질 뿐이었다. 한울이 여인에게 나직이 말했다.
“그대의 죄업, 이제 내가 함께 대부(代負)하겠소. 그러니… 이제는 그 아이를 원망의 눈으로 보지 마시오. 그 어린 생명 또한 당신을 증오하지 않을 터이니.”
여인은 한참을 오열하다, 씻은 듯 가벼워진 걸음으로 도서관을 나섰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주 미세한 **희망(希望)**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관리인이 한울의 어깨를 툭 치며 곁으로 다가왔다.
“훌륭하군. 하나 명심해라. 너는 이제 매 순간을 이리 살아야 한다. 타인의 지옥을 대신 짊어지고, 그 무게에 잠식되어 조금씩 **사멸(死滅)**해가는 삶을.”
한울은 서가에 몸을 기댄 채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은 극도의 피로와 슬픔,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해탈(解脫)**이 뒤섞인 기묘한 미소였다.
“이미… 각오한 바입니다.”
그는 창밖의 풍경을 응시했다. 도서관 너머의 세상은 여전히 불변(不變)했다. 인간들은 여전히 사랑하고, 증오하며, 죽고 태어나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굴레를 반복하고 있었다. 한울은 속으로 수아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수아야… 나는 이제야 비로소 너를 온전히 놓아주려 한다. 대신… 너라는 존재를 내 영혼에 영원히 각인(刻印)하겠다.’
도서관의 등불이 이전보다 따스하게, 그러나 동시에 한없이 고독하게 명멸했다. 한울은 서가에서 새로운 빈 바카라 한 권을 꺼내 표지에 조용히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한울의 기억(記憶)』
그리고 첫 페이지를 넘겼다. 이제 그의 진정한 연옥(煉獄)의 서사는, 여기서부터가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