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날인데 쉴 때는 출근하느라 누려 본 적 없는 것들을 해보자.
더 부지런 떨어 어디라도 여행 갔으면 하는 아쉬움 뚝뚝 흘리다간 오늘을 놓치고 말 것이다.
전업주부들만이 누린다는 평일 오전 필라테스를 가보았다.
오전 9시,
나는 세상 힙한 쫄쫄이 바지를 입고 모든 발가락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게 할 필라테스 전용 양말을 신었다. 평소대로라면 우리 반 아이들에게 오늘의 단도리(아침 조회)를 단디하고 노트북, 테블릿 챙겨들고 부랴부랴 1교시하러 갔을 즈음이다.
오전 9시의 햇살, 바람, 온도, 사람들의 에너지가 모두 달랐다.
실내에서 하루 종일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느낄 수 없는 모든 감각들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이것은 마치.... 죄수에게 잠시 주어지는 운동시간에 한 줄기 햇살에 넋을 놓고 자신을 내맡기는 느낌적인 느낌이라고 할까....ㅎㅎ
저녁에 만나던 필라테스 선생님은 이른 아침에도 저녁만큼이나 텐션이 높으셨다.
아침 수업에 데모해 보고 저녁에 더 좋은 수업으로 완결되는 느낌이 아니라 단 한 번의 수업을 위해 며칠 전부터 준비한 것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진행을 보였다.
난 어떤데?
나도 당연히 수업 준비를 열심히 한다.^^
교탁 앞에서 어리바리한 교사는 더 이상 아이들 앞에 당당할 수 없다.
똑같은 Be동사를 가르치더라도 구글클래스룸으로 들어가라, 패들릿에 결과물을 올려라, 일어나서 친구를 찾아가 5명한테 묻고 와라 등등 별별 꾸밈과 장식으로 학생들의 혼을 빼놓는다.
하지만 첫 차시를 함께하는 반은 어쩔 수 없이 마루타가 된다.
나의 야심찬 계획이 실행에서는 삐그덕 거리기도 하고 나의 오류를 학생이 꼬집어 주면 빠른 사과와 수정으로 보답한다. ^^;;
필라테스를 마치고 기분 좋게 팔, 다리가 털려 후들거리며 집에 오니 도저히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죄수에게 주어진 햇살을 좀 더 누려야 할 것 같았다.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알록달록 밭일 모자에 장화까지 장착했다.
장비발 필수라 앉은뱅이 방석을 던져두고 호미와 종류별 가위를 챙겨 들고 화단에서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이제는 없으면 서운할 에어팟을 귀에 끼고 유튜브도 들으니 원예치료 지대로 였다.
그 와중에 일흔이 훌쩍 넘으셨을 것 같은 지나가던 어르신이 뭐라고 자꾸 말씀을 하신다.
어른들이 또 이런저런 훈수를 두시려나 싶어 얼른 대꾸해드려야지 싶어 에어팟을 뺐다.
어르신이 잡초를 뭣하러 뽑냐며 본인이 저 짝에 커피 마시러 가는데 같이 마시러 가잔다. 농사지어보니 이런 잡초 따위야 어차피 계속 자라니 이 좋은 날 고생하지 말고 여유를 즐겼으면 하는 어르신의 오지랖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예~ 저는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응대하고 더 가열차게 호미질을 했다.
그런데 그 어르신은 두 번, 세 번 더 고집스럽게 커피를 마시러 가잔다.
나... 원.... 참.... 귀찮아서 갈아입지 않은 필라테스 쫄쫄이에 장화가 너무 힙했을까....
여기는 내 집이라 잡초를 뽑아 화단을 가꾸는 일이 가장 여유로운 힐링임을 굳이 설명하기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좋게 거절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좀 더 단호한 목소리로 저는 풀 뽑는 일이 지금 중요합니다.라고 하니 아쉬움 뚝뚝 떨구며 가신다.
하하하......
쉬는 날이 내게 주는 찐코믹버라이어티였다.
올해 나를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을 것이라더니 이런 것인가? ㅎㅎㅎㅎ
큰 웃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