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을 따라 걷다가 자꾸 멈춰 선 날
그냥 걸었다.
함께 걷자고 하는 사람도 없었고, 딱히 어디로 가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가을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길가 담벼락 밑에 풀잎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자기들끼리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쪼그만 것들이 모여 앉은 모양새가 영락없는 수다판이었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해?”
“응, 우리 수다 떠는 중.”
내 눈에는 꼭 그렇게 보였다.
그런데 말을 걸어 놓고 보니, 그들도 별로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자기들 이야기가 더 재미있나 보다.
“그래, 그럼 사진이나 한 장 찍자.”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 한 장 꽝 찍어 놓았다. 수다판에 끼지는 못했어도 사진첩에는 데려왔다.
조금 더 걷다가 전화 부스 앞에서 발이 멈췄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문득 누군가에게 가을을 전해 주고 싶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을, 담벼락 밑에서 만난 수다스러운 풀잎들을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여기 가을이 와 있어.”
그렇게 말을 꺼내면 그다음 이야기는 저절로 나올 것 같았다. 무슨 대단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할 말은 있었다.
전화 부스 옆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다. 나란히 서서 가을이 저만치 가고 있다고 알려 주는 것 같았다.
아직 여기 있는데.
조금 더 있어도 될 텐데.
나무를 올려다보다가 괜히 지나온 시간까지 생각했다. 계절은 가끔 이렇게, 걷던 사람을 지난 시간 앞에 세워 놓는다.
다시 걸었다.
꽃집 앞에는 꽃들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한참 들여다보니 지나가는 가을이 아쉬운 얼굴들 같았다. 어쩌면 아쉬운 쪽은 나였을 텐데, 나는 자꾸 꽃들에게 내 마음을 물었다.
너희도 아쉽니.
이렇게 피어 있는데 가을이 간다니.
그 꽃들도 사진첩에 접어 두려고 한 장 찍었다. 나중에 펼쳐 보면 이날의 꽃집 앞에 잠깐은 다시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가을 열매도 나랑 이야기하자고 했다.
조금 더 가니 하얗고 작은 꽃들이 또 발걸음을 붙잡았다.
이쪽에서도 잠깐.
저쪽에서도 잠깐.
얘들은 자꾸 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곁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서 있는 동안에는 멈춰 들여다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다들 가야 할 곳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작은 꽃들 앞에 조금 더 서 있었다.
이렇게 피어 있는데.
가을이 다 가는데.
그러다가 혼자 피식 웃었다. 풀잎들에게는 관심도 못 받고 돌아섰으면서, 이제는 꽃들이 나를 붙잡는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혼자 걷는 길에서도 나는 제법 바빴다. 말을 걸었다가, 대답을 상상했다가, 휴대전화를 꺼냈다가.
함께 걷는 사람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내가 자꾸 멈추는 바람에 몇 걸음 앞서 가다가 돌아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나는 손짓했겠지.
“잠깐만. 여기 이것 좀 봐.”
사진첩을 열어 보니 풀잎도, 전화 부스도, 은행나무도 들어와 있었다. 꽃집 앞의 꽃들과 가을 열매, 하얗고 작은 꽃들까지.
그냥 걸으러 나갔는데 가을을 몽땅 담아 왔다.
사진을 한 장씩 넘겨 본다.
전화 부스 앞에서 하고 싶었던 말이 아직 남아 있다.
여기 이것 좀 봐.
내가 어제 만난 가을이야.
— 쉼표 JEONG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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