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읽던 내가, 지금은 글을 쓴다

40년 전 문장에서 얻은 희망을, 이제 내 문장으로 노래한다

by쉼표JEONGSEON


어떤 문장은 읽는 데 몇 분이면 충분하지만, 그 문장을 읽은 사람이 자기 꿈을 알아채기까지는 40년이라는 세월이 걸리기도 합니다.

오늘 새벽, 식어가는 커피 잔을 곁에 두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끝까지 읽고 어떤 마음으로 창을 닫을까?’

내게는 옷을 만들던 고단한 시간, 베트남에서 차마 내뱉지 못했던 말들, 허름한 담벼락 아래 보라꽃에게 건네던 안부 하나까지…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은 삶의 조각들입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엔 늘 아릿한 질문이 따라붙곤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소중하게 꺼내놓은 이야기가, 정말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닿을 수 있을까? 혹시 나 혼자만 감정에 겨워 적어 내려간 글은 아닐까.'

이 질문을 가만히 붙들고 있다가, 뜻밖에도 40년 전 낡은 바카라장에 멈춰 서 있던 어린 날의 내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돌아보면 저 역시 누군가의 글을 읽을 때 그런 기분을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문장은 근사하고 이야기는 풍성한데, 다 읽고 나서도 왠지 그 작가의 집 대문 밖에 우두커니 서 있는 듯한 기분 말입니다. 작가의 근사한 삶을 한참 구경하긴 했는데, 정작 내 마음은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모를 때가 있지요.

반면에 어떤 글은 들어와 앉으라는 말 한마디 없는데도 슬쩍 내 자리를 내어줍니다. 남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데 이상하게 잊고 지낸 내 옛 기억이 불쑥 꺼내지고,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는 글.

내게는 40년 전 읽었던 유안진 시인의 에세이가 꼭 그랬습니다.

‘슬리퍼를 신고 찾아가도 반겨줄 친구.’

‘이 사이에 낀 고춧가루를 보고도 흉보지 않을 친구.’

정확한 문장과 순서는 세월 속에서 까마득히 흐려졌지만, 그때 그 글을 읽으며 가슴이 뭉클했던 느낌만큼은 여전히 어제 일처럼 선명합니다.

'말끔하게 갖추지 않은 쌩얼로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니…'

그런 생각을 하던 어리고 서툰 나는, 그 문장들 사이에서 작고 수줍은 희망 하나를 몰래 품었습니다.

‘나도 나이 들면, 누군가에게 이런 자리를 내어주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꿈보다 납기를 먼저 내밀었습니다. 그 뒤로 오랫동안 천을 만지고, 바늘을 들고, 눈앞의 하루를 살아내느라 글을 쓰고 싶었던 마음 같은 건 잊고 산 날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 문득 깨달았습니다.

‘어라, 나이 들면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던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잖아?’

조용히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희망이 이루어졌다고 누가 문을 두드려 알려준 것도 아닌데, 나는 이미 그 꿈 한가운데 들어와 앉아 있었습니다. 새벽마다 커피를 내리고, 문장을 지우고 다시 쓰며, 독자들의 댓글에 다정하게 답글을 건네는 사람.

그토록 바랐던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왜 자꾸만 '내가 잘하고 있나' 하고 숫자와 반응에 마음을 태웠던 걸까요.

내가 40년 전 유안진 시인의 글에서 얻은 것은 거창한 지식이나 글쓰기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참 좋다, 또 읽고 싶다, 나도 이런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하는 따뜻한 울림 하나였습니다. 그 작은 마음이 바늘을 들고 살던 단단한 세월을 함께 건너와, 펜을 든 지금의 나에게로 들어와 준 것입니다.

독자가 내 글을 읽고 바카라을 덮은 뒤의 시간을 내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친구를 만나러 가는 버스 안에서, 화분에 물을 주다가, 혼자 밥을 먹다가… 문득 자기 마음을 따스하게 알아주는 내 문장 하나가 곁에 나란히 서 준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지금 화면 앞에는 아직 다듬어야 할 문장들이 수두룩하지만, 오늘 새벽만큼은 이 한 가지를 가슴에 온전히 담아두려 합니다.

40년 전, 낡은 바카라을 읽으며 꿈꾸었던 그 하루를, 지금 나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래된 내 희망은 오늘도 편안한 잠옷 차림으로 앉아 있습니다. 따스한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당신의 마음에 가닿을 다음 문장을 조용히 고르면서요.




? 오늘 쉬어 간 글

이 글은 이승섭 평론가님의 *“내가 지나온 삶의 한 장면이 누군가의 기억을 깨울 때, 글은 개인의 기록을 넘어선다”*라는 문장을 읽고, 내 문장이 독자에게 무엇을 남기는지 돌아보며 시작되었습니다.


함께 듣는 음악

오래전 읽었던 문장과 그 안에 조용히 남아 있던 꿈을 떠올리며 이 음악을 곁에 놓습니다.

[「바람에 남은 이름」 · truepen]

음악을 나눠주신 truepen 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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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꽃이 뽑히는 것을 보며 울었다」




— 쉼표 JEONG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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