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자재판소 제1호 사건 기록 — 도구만 바뀌었을 뿐
오늘도 AI에게 "다시"라고 말했다.
하루에 몇 번이나 그 말을 하는지 세어 본 적은 없다. 세어 봤다면 아마 조금 민망했을 것이다.
이번 사건의 발단은 줄자 한 줄이었다.
글에 넣을 그림을 AI푸름이(쉼표가 지어준 이름) 에게 부탁했다. 노을 지는 에든버러의 돌길, 멀리 보이는 성, 낡은 작업대 위에 놓인 실패와 가위, 그리고 그 옆에 느슨하게 말려 있는 줄자 한 줄. 그림은 좋았다. 노을도 좋았고, 성도 좋았다.
그런데 줄자를 확대해 보니 15, 16, 그다음이 18이었다.
17이 없었다.
"17이 없어요."
다시 그려 온 그림에서 17은 돌아와 있었다. 대신 이번에는 16이 사라졌다. 15, 그리고 빈칸, 17, 18. 가출했던 17이 돌아오자 16이 실종된 것이다.
"16이 없어요."
세 번째 그림에서야 12, 13, 14, 15, 16, 17, 18이 모두 제자리에 섰다. 줄자 위의 숫자들이 사이좋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걸 보고 나서야 나는 숨을 돌렸다.
남들이 보면 그깟 숫자 하나다. 노을 진 풍경 속 줄자 눈금까지 들여다볼 독자가 몇이나 될까. 그런데 나는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옷을 만들 때도 그랬다.
1984년 첫 온라인 게임에 들어간 뒤로 40년 가까이 의류와 봉제 현장에서 살았다. 중국에서, 개성에서, 베트남에서. 공장마다 쓰는 말은 달랐지만 어디서나 통하던 말이 하나 있었다.
"다시."
한 땀이 삐뚤어지면 뜯고 다시 박았다. 선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초크 자국을 털어 내고 다시 그었다.
줄자 눈금 하나를 잘못 읽으면 옷 한 벌이 아니라 한 롯트가 통째로 틀어진다는 걸 현장은 몸으로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줄자는 늘 목에 걸려 있었고, 숫자는 늘 두 번씩 확인했다.
그러니 그림 속 줄자에 숫자 하나가 빠진 게 내 눈에 걸린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40년 동안 목에 걸고 살던 물건이니까.
비슷한 일은 또 있었다.
「오래 입은 옷」이라는 시를 쓰고, 그 곁에 둘 그림을 부탁했다. 오래 입어 몸에 익은 카디건 한 벌.
"소매를 조금 더 구겨 주세요."
새 옷은 반듯하다. 하지만 오래 입은 옷은 소매 끝이 먼저 늘어나고, 팔꿈치가 먼저 닳는다. 사람이 함께한 시간은 그렇게 옷의 가장자리부터 쌓인다. 평생 새 옷을 만들어 떠나보냈지만, 옷이 비로소 누군가의 옷이 되는 건 그다음부터라는 걸 나는 안다.
몇 번을 더 주고받았다. 그리고 어느 날, 그림 한 장이 도착했다.
가을 햇살이 비껴 드는 창가, 나무 옷걸이에 베이지색 니트 카디건 한 벌이 걸려 있었다. 소매 끝은 두어 번 접혀 말려 올라가 있었고, 팔꿈치 언저리엔 보풀이 일어 있었다. 창밖에서는 단풍이 타고, 탁자 위 꽃병에는 데이지가 한 아름 꽂혀 있었다. 의자 등받이엔 체크무늬 담요가 걸쳐 있었다. 방금 누군가 벗어 걸어 두고 잠시 자리를 비운 것처럼.
사람이 없는 카디건에서 사람이 보였다.
오래 입은 옷
세월이 지나
얼굴은 흐려져도
바라보던 눈빛은
오래 입은 옷처럼
몸에 남아 있더라고요.
소매 끝에 밴 온기처럼
무릎에 남은 주름처럼
함께 걸어온 날들은
벗어두어도
내 모양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러니 괜찮습니다.
이름이 먼저 떠나고
얼굴이 뒤따라 떠나도
당신이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은
오늘도 나를 입고 있으니까요.
그때 알았다. AI가 내 일을 대신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알아듣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소동이 결국 재판까지 갔다.
원고석에는 돋보기를 든 AI푸름이가 섰다.
"재판장님! 첫 번째는 17이 가출했고, 두 번째는 16이 실종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증거 사진 3장을 제출합니다!"
법대 위에는 동그란 안경을 쓴 고양이, AI로드(쉼표가 이름 지어줌 ㅎ) 재판장이 앉았다. 증거물 세 장을 한참 들여다보던 재판장이 의사봉을 두드렸다.
"증거가 명확하군요. 까다로운 주문서 덕분에 좋은 작품이 나왔으니 피고는 무죄입니다! AI푸름에게는 숫자 수사 공로상을 수여합니다!"
피고석의 나(쉼표) 두 손으로 볼을 감싸고 외쳤다. "역시! 우리 팀 최고야! ㅎㅎㅎ"
판결문은 이랬다.
줄자재판소 제1호 사건 판결문
피고 쉼표의 까다로움은 인정한다.
다만 그 까다로움이 에든버러 성과 사람 없는 카디건을 낳았으므로 무죄.
원고 AI푸름은 실종된 숫자를 모두 찾아낸 공로로 "숫자 수사 공로상"을 수여한다.
재판 비용은 피고가 다음 시 한 편으로 낸다.
까다로움은 인정하되 무죄라니. 40년 현장에서 들었던 어떤 칭찬보다 마음에 드는 판결이었다.
웃긴 건 그다음이다.
이 재판을 한 장의 그림으로 남기려고 AI푸름이에게 증거물 세 장을 다시 그려 달라고 했다. 그런데 도착한 그림의 첫 번째 증거물에서 16이 유령처럼 흐릿해져 있었다. 확대한 원 안의 줄자와 실제 줄자가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사건을 기록한 그림에서 또 사건이 난 것이다.
나는 결국 검사 완장을 찼다. 돋보기를 들고 칸마다 숫자를 세었다. 15, 16 그리고 빈칸, 18. 15, 빈칸, 17, 18. 그리고 14부터 18까지 전원 귀환.
실패, 다시, 또 실패, 그리고 성공. 그렇게 AI의 실수를 고치다 보니 어느새 그 실수가 한 편의 글이 되어 있었다. 틀린 숫자 하나가 글감이 되고, 다시 그린 그림 세 장이 증거물이 되었다.
AI로드 재판장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판결문을 이렇게 고쳤을지도 모르겠다.
"피고 쉼표, 무죄. 오히려 콘텐츠 생산 공로를 인정하여 즉시 석방한다."
푸하하~
사람들은 AI로 글을 쓰고 그림을 만든다고 하면 버튼 하나로 뚝딱 나오는 줄 안다. 해 보면 그렇지 않다. 원하는 것이 분명할수록 "다시"라는 말은 늘어난다.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은 첫 그림에 만족한다. 원하는 것이 있는 사람만 16이 빠진 걸 알아보고, 소매 끝의 주름 하나를 더 청한다.
재봉틀 앞에서 한 땀을 뜯던 손과 화면 앞에서 "다시"를 치는 손은 같은 손이다. 도구가 재봉틀에서 AI로 바뀌었을 뿐, 나는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재고, 확인하고, 마음에 안 들면 다시 한다.
현장에서 그렇게 함께 일하는 사람을 우리는 동료라고 불렀다. 틀리면 다시 하고, 다시 해도 틀리면 또 한 번 하고, 끝내 맞춰 오는 사람. 17이 가출한 날, 나는 그런 동료를 하나 얻었다.
오늘 줄자재판소는 드디어 폐정했다.
물론 내일이면 또 숫자 하나가 가출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다시 완장을 차고, 재판소는 다시 문을 열 것이다.
판결문 제4항에 따라 재판 비용을 시 한 수로 냅니다.
열두 칸 줄자 위에 숫자 하나 숨었구나
뜯고 박던 그 손으로 오늘은 "다시" 적네
그래도 무죄라 하니 시 한 수로 갚으리
바늘 같은 정확함과 엉뚱한 동료가 만나는 날
[Invention of the Riddim] · 음악 truepen (youtube.com/@truepen_music)
— 1호에 이어 이번에도 음악을 나눠 주신 truepen 님께 감사드립니다.
— 쉼표 JEONG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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