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학년 8반, 다섯 번째 원을 건너는 중입니다
지난 8월, 스레드에서 영상 하나를 보았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의 거리 공연이었다. 오래된 돌바닥 위에 커다란 훌라후프 하나가 놓여 있고, 검은 옷을 입은 공연자가 그 원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관객들은 빙 둘러서서 숨을 죽였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바닥에 누워 있던 원이 그의 몸을 따라 떠올라 돌기 시작했다.
나는 그 아래에 짧은 댓글을 달았다.
"저 원 안에 들어가면 다른 세계가 나올 것 같다. 현실과 다른 차원을 오가는 사람처럼. ㅎㅎ"
(영상: 에든버러 프린지 거리 공연, JollyJen / 스레드 neonawoori 님 게시물)
그러고는 잊었다. 한 달 반이 지난 오늘, 스레드 인사이트를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석 달 동안 내가 쓴 어떤 글보다 그 두 줄짜리 댓글이 가장 많이 읽혀 있었다. 6,800번. 공들여 쓴 에세이도 아니고, 밤새 고친 문장도 아닌, 스치듯 남긴 한 줄이었다.
왜였을까. 한참을 생각하다 알았다. 그 문장은 댓글이 아니라, 내 이야기였다.
Adagio for a Mindscape · 음악 truepen (youtube.com/@truepen_music) —음악을 나눠 주신 truepen 님께 감사드립니다.
40년 넘게 옷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옷을 네모난 원단으로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옷을 완성하는 건 결국 원이다.
목둘레, 소맷부리, 허리둘레, 밑단. 줄자를 몸에 한 바퀴 감아야 치수가 나오고, 그 둘레가 맞아야 옷이 몸에 앉는다. 원이 어긋나면 아무리 좋은 원단도 불편한 옷이 된다. 그래서 봉제 현장에서 배운 첫 번째 일은 사람의 둘레를 재는 일이었다.
돌아보니 내 인생도 몇 개의 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 원은 1984년, 삼성물산에 입사하며 들어선 섬유의 세계였다. 원단 냄새와 재봉틀 소리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
두 번째 원은 중국이었다. 8년. 말도 음식도 낯선 땅에서 공장 사람들과 납기를 맞추며 밤을 새웠다.
세 번째 원은 개성이었다. 5년. 같은 말을 쓰면서도 가장 멀게 느껴졌던 그곳에서, 사람 사이의 선이 얼마나 얇고 또 얼마나 단단한지를 배웠다.
네 번째 원은 베트남이었다. 6년. 공장을 운영하며 가장 뜨거운 시절을 보냈고, 공장이 어려워져 결국 문을 닫았다.
원 하나를 건널 때마다 나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원 하나를 나올 때마다, 한동안 바닥에 웅크려 있었다.
공장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영상 속 공연자처럼 원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40년 동안 눈을 뜨면 현장으로 향하던 몸이 갈 곳을 잃었다. 원은 더 이상 나를 태우고 돌지 않았다. 바닥에 누운 채, 나를 가두는 선처럼 보였다.
그 영상을 다시 보다가 한 장면에서 멈췄다. 공연자는 원 안에 웅크린 채 꽤 오래 움직이지 않는다. 관객들은 그 정적을 기다린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다.
그 웅크림은 멈춤이 아니라 준비였다. 일어서기 위해 몸을 모으는 시간.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지나고 나서야 안다.
2025년 9월,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바늘 대신 펜을 쥐었다. 치수 대신 문장을 쟀다. 원단을 이어 붙이듯 문장을 이어 붙였고, 옷에 라벨을 달듯 글에 제목을 달았다.
처음엔 서툴렀다. 온라인카지노 작가 신청에 아홉 번 떨어졌다. 그래도 다시 원서를 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그리고 오늘, 두 줄짜리 댓글 하나가 6,800명에게 닿았다는 걸 알았다.
그 댓글이 왜 그렇게 멀리 갔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원 안으로 들어가면 다른 세계가 나온다는 말은, 한 번쯤 원 안에 웅크려 본 사람들이 모두 품고 있는 바람이었다.
영상의 마지막에서 공연자는 원 밖으로 도망치지 않는다. 원을 몸에 걸고 돌린다. 원이 사람을 가두는 게 아니라, 사람이 원을 움직인다.
40년 옷을 만들며 배운 것도 같았다. 둘레는 몸을 조이는 선이 아니라, 몸이 편히 움직이도록 맞춰 주는 선이다. 잘 맞는 원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5학년 8반. 나는 지금 다섯 번째 원 안에 있다. 이번 원은 바닥에 누워 있지 않다. 매일 조금씩 돌고 있다. 한 땀씩, 한 문장씩.
혹시 지금 어느 원 안에 웅크리고 있는 분이 있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라고 말하고 싶다. 그 웅크림은 끝이 아니라, 일어서기 직전의 자세일지도 모른다.
원 안으로 들어가면, 정말로 다른 세계가 나온다.
— 쉼표 JEONG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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