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아야 치유가 됩니다
나도 모르게 숨을 길게 내쉰 적이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몸이 먼저 숨을 밀어냈다. 한숨은 그렇게 온다. 생각보다 먼저, 이유보다 먼저. 우리는 왜 한숨을 쉬었는지 나중에야 더듬어 찾는다. 마치 몸이 마음보다 정직해서, 마음이 아직 모르는 것을 먼저 알아버린 것처럼.
그날도 그랬다. 창밖은 그저 흐렸고, 커피는 식어 있었고, 특별할 것 없는 오후였다. 그런데 가슴 한복판에서 무언가가 길게 빠져나갔다. 나는 그 한숨을 붙잡아 거꾸로 걸어보기로 했다. 이 숨이 어디서 왔는지, 그 끝에 무엇이 앉아 있는지.
한숨의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니, 가장 먼저 만난 것은 과거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과거는 실제로 있었던 그대로가 아니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 시절을 손에 쥐고 반질반질하게 닦아 왔다. 더 아름다웠던 것으로, 혹은 더 억울했던 것으로. 좋았던 날은 실제보다 눈부시게 채색했고, 아팠던 날은 실제보다 잔인하게 덧칠했다.
그렇게 나는 지나간 시간을 기억한 게 아니라, 지나간 시간을 조각해 왔다. 실재하지 않는 조각상을 방 한가운데 세워 두고, 매일 그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때가 좋았지."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조각상은 대답이 없었다. 대답할 리 없었다. 애초에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내가 만든 형상이었으니까.
허상의 무서운 점은, 그것이 거짓이라서가 아니다. 너무 오래 바라봐서 진짜보다 선명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눈을 뜬 채로 그 조각상을 지켰다. 눈을 뜨고 있는 한, 그것은 계속 거기 있었다.
허상을 조금 옆으로 밀어내자, 그 뒤에서 무언가가 이빨을 드러냈다.
분노였다.
처음엔 그것이 누군가를 향한 줄 알았다. 나를 저버린 사람, 나를 알아주지 않은 세상, 나를 여기까지 밀어붙인 시간. 나는 오랫동안 그들에게 화가 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조각상 뒤 어둠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분노는 바깥이 아니라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이 미운 게 아니었다. 그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세상이 원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세상 앞에서 작아졌던 내 어깨가 부끄러웠던 것이었다.
분노는 늘 밖을 가리키는 척하면서, 실은 자기 자신을 겨눈 화살이다. 우리는 그 사실이 견디기 힘들어서, 화살촉을 억지로 바깥으로 돌려놓는다. 그래야 조금 덜 아프니까. 남 탓이 자기 탓보다 언제나 가볍다.
분노라는 화살마저 조심스레 뽑아내자, 마지막 방이 나왔다.
그곳에 아픔이 있었다. 분노처럼 소리치지도, 허상처럼 번들거리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오래된 아이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알아보았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허상은 이 아픔을 덮으려고 세운 조각상이었고, 분노는 이 아픔을 지키려고 세운 울타리였다.
우리는 정작 아픈 곳은 건드리지 않으려고, 그 위에 허상을 쌓고 분노를 두른다. 그렇게 겹겹이 방을 만들어 가장 안쪽의 아이를 숨긴다. 아무도 못 보게. 나조차 못 보게.
그런데 그 아이는 숨겨지길 원한 적이 없었다. 그저 한 번, 제대로 보아주길 기다렸을 뿐이었다. 나의 한숨은, 그 아이가 방문 틈으로 내쉰 작은 신호였다. "여기 있어요." "아직 여기 있어요."
여기서 나는 오래 헤맸던 답을 찾았다.
이 모든 방—허상도, 분노도—은 눈을 뜨고 있을 때만 존재한다. 조각상은 시선을 먹고 자라고, 화살은 과녁이 보여야 날아간다.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과거를 노려보는 한, 허상은 더 선명해지고 분노는 더 날카로워진다. 뜬 눈은 자꾸만 바깥의 대상을 찾는다. 탓할 사람, 원망할 세상, 되돌리고 싶은 장면.
그런데 눈을 감으면, 바깥이 보이지 않는다.
시선이 갈 곳을 잃은 그 어둠 속에서, 비로소 가장 안쪽 방의 아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그 아이가, 눈을 감아야 만져진다. 치유는 무언가를 더 똑똑히 보는 데서 오지 않는다. 그동안 너무 뜨겁게 바라보던 허상과 분노를, 잠시 놓아주는 데서 온다.
눈을 감는다는 건 도망이 아니다. 그것은 바깥을 향하던 시선을, 처음으로 안쪽으로 돌려주는 일이다. 세상을 향한 눈을 감아야, 나를 향한 눈이 뜨인다.
만약 당신이 오늘 이유 없이 한숨을 쉬었다면.
특별한 일이 없었는데도 가슴 한편이 무거웠다면. 누군가가 자꾸 밉고, 지난 어떤 날이 자꾸 떠올라 놓아지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이 약해서가 아니다. 당신 안 가장 깊은 방의 아이가, 문틈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오래 참았다고, 이제는 한 번 보아 달라고.
그럴 때 우리는 대개 눈을 더 크게 뜬다. 원인을 찾겠다고, 해결하겠다고, 이겨내겠다고. 하지만 그 뜬 눈이 자꾸만 조각상과 화살만 키운다는 것을, 나는 한숨을 거슬러 오르고서야 알았다.
그러니 오늘 밤, 딱 한 번만 반대로 해보길 권한다.
불을 끄고, 눈을 감고, 아무것도 보지 않는 채로 가만히 있어 보는 것이다. 그 어둠 속에서 처음 만나는 것이 조금 아프더라도, 도망치지 말고 그저 곁에 앉아 있어 주는 것이다. 당신 안의 그 아이 옆에. "여기 있었구나" 하고, 딱 그 한마디만 건네면서.
한숨은 끝이 아니라 문이다.
그 문을 여는 열쇠는, 더 크게 뜬 눈이 아니라 조용히 감은 눈에 있다.
눈을 감아야,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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