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은 해마다 검진하면서, 삶은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했다
봉투가 왔다.
해마다 이맘때면 잊지 않고 찾아온다.
두꺼운 종이봉투를 뜯으면 숫자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혈압, 혈당, 콜레스테롤, 간 수치. 낯선 이름의 항목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 옆에는 어김없이 두 글자가 붙어 있다. 정상. 정상. 정상.
나쁜 소식이 없다는 건 분명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그 다행함 속에서,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이 서늘해진다.
이 종이는 나를 참 성실하게도 들여다본다. 내 피를 뽑고, 내 뼈를 찍고, 내 몸속 어둠까지 카메라를 들이민다. 밀리미터 단위로, 수치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그런데 이 꼼꼼한 종이 어디에도 없는 질문이 하나 있다.
요즘, 마음은 어떠십니까.
그 칸은 없다. 처음부터 없었다.
우리는 100세 시대를 산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물으면 대개 건강을 첫 손에 꼽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토록 열심히 몸을 잰다. 더 오래 살기 위해, 덜 아프기 위해, 숫자를 관리한다. 몸을 향한 이 지극한 정성은 어쩌면 시대의 미덕이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그렇게 애써 늘려놓은 그 긴 시간을, 우리는 무엇으로 채우고 있을까.
오래 사는 법은 온 세상이 앞다투어 가르쳐준다. 무엇을 먹고, 어떻게 걷고, 몇 시에 자야 하는지. 하지만 그 길어진 하루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는, 아무도 결과표에 적어주지 않는다. 몸의 수명은 이렇게 정성껏 관리하면서, 마음의 안부는 왜 아무도 묻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정말 중요한 것들은 전부 숫자로 잴 수가 없다.
오늘 하루 몇 번이나 진심으로 웃었는지. 창밖을 얼마나 오래 바라보았는지. 오랜만에 떠오른 누군가에게 안부를 물었는지, 아니면 또 미뤘는지. 밥을 먹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삼키기만 했는지.
이런 것들은 어떤 기계로도 측정되지 않는다. 결과표에 정상이라 찍히지도, 이상이라 표시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슬그머니 잊고 산다. 재지 않는 것은 챙기지 않게 되니까.
형편은 나아졌다는데 마음은 왜 더 헛헛해지는지, 그 답이 어쩌면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잴 수 있는 것만 관리하며 살아왔다. 통장의 숫자, 몸의 수치, 남들이 볼 수 있는 것들. 정작 삶을 삶답게 만드는 것들은, 눈금이 없다는 이유로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니 나는 이 결과표의 맨 아래에 칸 하나를 더 그려 넣고 싶다.
거창한 진단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저 잠깐 멈춰 스스로에게 묻는, 작은 쉼표 하나면 된다. 문장 사이에 쉼표가 없으면 숨이 가빠지듯, 삶에도 그런 자리가 필요하다. 달려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나를 돌아보는, 아주 짧은 쉼.
오늘 밤, 봉투 속 어떤 수치보다 먼저 이 질문을 나에게 건네보려 한다. 세상 어느 검진표에도 실리지 않은, 그러나 가장 오래 미뤄둔 안부를.
마음은, 안녕하십니까.
간판 없는 카페, 다른 이야기
이 글이 잠시 멈춤이 되었다면, 같은 자리에서 쓴 다른 쉼표들도 만나보세요.
마음의 안부를 좀 더 오래 묻고 싶다면,
같은 결의 이야기를 묶은 전자바카라 『나는 쉼표다』가 있습니다.
오늘 당신의 마음은, 안녕하신가요?
결과표에 없는 그 칸을, 댓글에 한 줄 적어보셔도 좋겠습니다.
✉️ 이런 쉼표가 필요한 날, 조용히 편지로 찾아갑니다.
「쉼표의 편지」 — 매주 금요일 밤, 마음의 안부를 묻는 짧은 글.
구독하기: https://maily.so/comma.jeongseon
— 쉼표 JEONGSEON
#건강검진 #100세시대 #에세이 #쉼표 #마음챙김 #서정에세이 #삶의성찰 #간판없는카페 #오늘의위로 #온라인카지노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