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악산

험한 암릉과 깊은 협곡에서 침묵을 배우다

by진경수
“경춘로를 따라 의암코스에 들어선 뒤 상원사와 깔딱 고개, 가파른 암릉을 지나 용화봉에 오른다. 흥국사와 계곡길, 등선폭포를 따라 돌아오는 길에서 삼악산은 힘으로 이기기보다 흐름에 순응하고, 말 없는 자연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법을 일깨운다.”



DSC_0259.JPG삼악산 용화봉 정상/사진 진경수



정상 : 용화봉 654m

출발 : 등선주차장

거리 : 약 8.8km 원점회귀

주제 : 집중과 순응

산행일 : 2025. 8. 10.



삼악산 등산지도.png





01. 산의 흐름에 몸을 맡기다



DSC_0044.JPG운무가 머문 의암호의 아침/사진 진경수




“사람과의 만남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면 산과의 만남은 마음을 낮추게 한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그날의 하늘과 바람, 계절과 빛은 단 한 번뿐이다. 같은 산을 다시 찾아도 같은 산을 만날 수 없는 까닭이다. 새로운 풍경 앞에서 마음을 낮추면 익숙한 삶도 처음 만나는 세계처럼 다가온다. 경외는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이면서 삶을 대하는 태도다.


의암코스는 시작부터 가파른 계단으로 산객을 맞는다. 운무와 습기를 머금은 숲을 지나 작은 폭포의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가쁜 숨과 번잡한 생각이 차츰 가라앉는다. 몸이 산길의 리듬을 받아들일 때 마음도 비로소 조용해진다.




DSC_0064.JPG상원사를 향하는 길, 마음을 씻어주는 작은 폭포수/사진 진경수




“자연에는 흐트러짐 속에 질서가 있고 질서 또한 끊임없이 흐트러짐을 품고 있다.”

상원사 위 너덜지대에는 크고 작은 돌들이 제각기 흩어진 듯 놓여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서로를 기대며 하나의 길을 이룬다. 삶의 질서도 완벽하게 정돈된 상태만을 뜻하지 않는다. 흔들림과 부족함까지 품으며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데 더 깊은 질서가 있다.


발아래 흔들리는 돌을 딛고 오르며 힘으로 길을 이기려는 마음을 내려놓는다. 길의 흐름에 몸을 맡길 때 발끝은 다음 자리를 알아본다. 뜻대로 다스리는 것보다 주어진 형편을 읽고 그에 맞추는 지혜가 우리를 더 멀리 데려간다.




02. 한 걸음보다 한 번의 집중


DSC_0135.JPG가파른 암릉을 오른다/사진 진경수




“눈앞의 바위 하나 발을 디딜 자리 하나에 온 마음을 모은다.”

깔딱 고개를 지나면 수직에 가까운 암릉이 이어진다. 철제 난간과 발판이 위험을 덜어주어도 산의 위험까지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먼 정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지금 잡을 곳과 디딜 곳을 살핀다. 집중은 더 빨리 가는 기술이 아니라 실수하지 않고 살아가는 태도다.


잡념이 사라지고 호흡과 발걸음만 남는 순간 시야가 열리며 의암호가 모습을 드러낸다. 현재에 온전히 머물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있다. 산은 생각을 없애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의 한 걸음에 필요한 것만 남기라고 조용히 가르친다.




DSC_0190.JPG운무에 뒤덮인 의암호/사진 진경수




“산에서는 쉼 또한 산행의 일부다.”

전망대까지 남은 0.3km가 가장 길게 느껴질 때 바위에 몸을 기대고 빠른 심장이 제자리를 찾기를 기다린다. 쉬는 시간은 걷지 못한 시간이 아니다. 몸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다음 걸음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멈춤을 허락할 줄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속도로 오래 걸을 수 있다.


예상과 달리 길은 곧장 암릉을 넘지 않고 산허리를 돌아간다. 오래 산을 다닌 몸은 힘으로 오르는 법보다 흐름을 따르는 법을 기억한다. 삶에서도 정면으로만 돌파하려는 고집을 내려놓으면 새로운 길이 보인다. 돌아가는 길이 때로는 가장 지혜로운 전진이다.



03. 말없이 남는 가르침



DSC_0265.JPG정상에 올라 저 멀리 화악산을 조망한다/사진 진경수




“오를 수 없는 길이 있기에 다시 찾아올 이유도 생기는 법이다.”

전망대에서 칼바위 능선을 바라보지만 예전 같지 않은 몸을 생각해 눈으로만 그 길을 따른다. 모든 길을 걸어야 산을 온전히 만나는 것은 아니다. 허락되지 않은 길을 인정하는 순간 아쉬움은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마음으로 바뀐다. 한계를 받아들이는 일도 자연과 오래 동행하는 방법이다.


용화봉에 서니 혼자라는 사실이 낯설지 않다. 동행이 있어도 결국 자신의 걸음과 숨으로 정상에 닿는다. 삶의 중요한 선택도 대신 걸어줄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 걷는다는 것은 고립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바카라임을 온전히 마주하는 일이다.




DSC_0358.JPG바위가 흐름을 만들고 물이 생명을 만든다/사진 진경수




“산은 언제나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침묵은 어떤 가르침보다 깊다.”

등선폭포를 품은 협곡을 천천히 걷는다. 바위는 시간을 품고 폭포는 쉼 없이 그 시간을 씻어낸다. 거친 암릉과 깊은 협곡, 단단한 바위와 부드러운 물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하나의 산을 완성한다. 삶도 서로 다른 시간을 밀어내지 않고 품을 때 비로소 깊어진다.


삼악산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답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길을 내어주고 묵묵히 제 모습을 보여주었다. 성냄도 자랑도 없는 자연의 침묵 앞에서 마음속 소음이 잦아든다. 무언지교, 말하지 않고도 삶을 바꾸는 가르침은 오래도록 마음 한편에 남는다.




DSC_0472.JPG등선폭포/사진 진경수




산이 남긴 질문


나는 삶을 뜻대로 다스리려 서두르고 있는가
아니면 지금의 흐름을 읽으며 한 걸음에 집중하고 있는가.




이전 14화운악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