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를 배우며 다시 알게 된, 내 안에 남아 있던 것들
엑셀 자료를 취합할 때면 두 모니터를 번갈아 보았다.
한쪽에는 숫자를 모을 파일을 띄워 놓고, 다른 쪽에서는 여러 구·군에서 보내온 파일을 하나씩 열었다. 필요한 시트를 찾고, 셀을 복사하고, 취합파일의 맞는 칸에 붙여넣었다. 한 기관의 자료를 옮기고 나면 다음 기관의 파일을 열었다.
같은 양식이라고 일이 간단해지지는 않았다. 시트가 여러 개이고 옮길 항목이 많으면 손은 같은 동작을 숱하게 되풀이했다. 어디까지 했는지 확인하다가, 숫자를 엉뚱한 칸에 넣지는 않았는지 다시 들여다보았다.
눈과 손은 바쁜데 일은 더디게 나갔다.
그렇게 숫자를 한 파일에 모았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기관의 실적이 늘었는지, 다른 곳과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인지 살펴야 했다. 숫자들을 보고받는 사람이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문장으로 바꾸는 일은 그다음에 시작되었다.
나는 1993년 공직에 들어왔다. 올해로 34년째다. 지금은 팀장이지만 직원들이 올리는 결재문서만 보는 것은 아니다. 빈자리에 사람이 채워지지 않으면 실무를 나누어 맡았고, 팀의 주요 업무계획이나 시바카라사업을 직접 작성할 때도 있다.
AI를 배우기 시작한 데에는 거창한 이유가 없었다. 내 손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 일을 조금 덜 힘들게 해 보고 싶었다.
예전에는 공문 하나, 보고서 하나를 붙들고 거의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업무 내용을 안다고 글이 저절로 써지지는 않았다.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무엇을 앞에 놓아야 할지, 어떤 표현을 써야 뜻이 정확히 전달될지 고민했다. 문장 하나를 고치다 보면 앞 문단의 순서까지 다시 바꾸게 되었다.
그래서 선배가 쓴 좋은 보고서를 개인 폴더에 모아 두었다. 비슷한 일이 생기면 그 폴더부터 열었다. 내용을 그대로 가져다 쓰려는 것이 아니라, 일을 어떤 순서로 풀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같은 사실도 어떻게 엮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보고서가 되었다.
그 폴더에는 문서만 쌓인 것이 아니었다. 일을 설명하는 방식도 조금씩 쌓였다. 상대가 먼저 알아야 할 것과 나중에 읽어도 될 것, 길게 풀어야 할 대목과 한 줄이면 충분한 대목을 배웠다.
당시에는 그것을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익히게 되는 요령쯤으로 여겼다.
2024년, 전북 완주에서 1년간 장기교육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AI 활용에 대해서도 제법 긴 시간 배울 기회가 있었다. 교육에서 익힌 것을 실제 업무에 적용하면서, 예전에 모아 둔 보고서를 펼치던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제는 허용된 자료를 준비하고, 필요한 결과를 설명한다. 어느 시트의 어떤 항목을 모아야 하는지, 무엇과 비교해야 하는지, 어떤 형식으로 정리해야 하는지 알려 준다. 자료의 성격과 도구의 기능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여러 파일을 오가며 손으로 옮기던 작업의 상당 부분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일을 맡기려면 먼저 내가 그 일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했다.
무슨 자료가 필요한지 몰라서는 자료를 골라 줄 수 없었다. 보고서의 목적이 흐릿하면 요청도 흐릿해졌다. 결과가 나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문장이 매끄럽다는 이유만으로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무엇이 빠졌는지, 숫자와 해석이 맞는지, 정작 필요한 질문에 답하고 있는지 읽어야 했다.
오랫동안 문서를 쓰고 고치며 익힌 것들이 그때 다시 쓰였다. 새로운 도구를 배우는 중이었지만,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처음부터 시작하는 일은 아니었다.
컴퓨터를 다루는 속도나 새로운 프로그램에 적응하는 능력은 젊은 직원들이 나보다 나을 것이다. 그런데 주변에서 AI 활용 방법을 내게 묻거나 도움을 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조금 뜻밖의 일이다. 하지만 AI에게 일을 맡기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아주 낯선 일도 아니다.
직원에게 업무를 맡길 때, 보고서 하나를 작성해 달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 필요한지, 어떤 자료를 참고해야 하는지, 무엇을 검토해야 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결과물을 받아 보고 부족한 부분을 짚어 주는 과정도 필요하다.
AI와 일할 때도 비슷하다. 요청을 잘하려고 생각하다 보면, 그동안 직원에게 일을 설명하며 해 온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그렇다고 오래 일한 사람이 언제나 더 잘한다는 뜻은 아니다. 연차가 쌓였다고 모든 일을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내 경우에는 문서를 쓰고, 남의 문서를 읽고, 업무를 나누어 맡기며 익힌 요령이 도움이 되었다.
결재문서를 볼 때도 그 차이를 느낀다. 같은 AI를 활용했어도 결과는 같지 않다. 말끔하게 정리된 문장 사이에 필요한 근거가 빠져 있기도 하고, 업무의 핵심에서 벗어난 설명이 길게 놓이기도 한다.
초안을 쉽게 얻는 것과 실제로 쓸 수 있는 문서로 완성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AI가 덜어 주는 수고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만큼 사람이 보아야 할 것이 더 선명해지기도 한다. 빈칸이 어느새 0으로 처리되지는 않았는지, 숫자의 차이만 보고 이유까지 단정하지는 않았는지 확인해야 한다. 맡길 수 있는 자료인지 먼저 살피는 바카라임도 여전히 내게 있다.
새로운 도구가 생겼다고 오래된 일이 통째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손이 하던 일의 일부가 줄어든 자리에, 내가 알고 판단해야 할 일이 남았다.
변화를 특히 실감하는 작업은 회의용 PPT다.
예전에는 전문가가 만든 듯한 발표자료를 보면 내가 저 정도로 만들려면 얼마나 오래 붙들고 있어야 할까 싶었다. 내용을 아는 것과 그것을 화면에 보기 좋게 담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지금은 AI의 도움을 받아 예전 같으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자료를 짧은 시간에 만든다. 그렇게 만든 자료를 회의에 여러 차례 활용했고, 주변에서 좋은 평가도 받았다.
물론 무엇을 전달할지, 어느 내용을 먼저 놓을지까지 도구가 알아서 결정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한 장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지는 않았는지, 보기 좋은 화면이 정작 중요한 내용을 가리지는 않는지 살핀다.
예전에 보고서의 문단 순서를 고치며 하던 고민이, 이제는 발표자료의 화면을 고치는 데에도 쓰인다.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넓어졌지만, 그 안에서 내가 하는 생각까지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퇴직까지 시간이 많이 남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새로 배우는 일이 늦었다고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배운 것을 써 볼 일이 여전히 있고, 오래 해 온 일도 다른 방식으로 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러 AI 서비스를 직접 써 보며 나름의 방법을 익히고 있다.
이제는 그 과정을 글로 남겨 보려 한다. 기능을 잘 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일에서 막혔고 무엇을 준비했으며 결과를 어디까지 믿고 어디서 다시 확인했는지 적고 싶다. 잘된 결과만큼 뜻대로 되지 않았던 부분도 함께 남길 생각이다.
예전의 나는 누군가 잘 써 놓은 보고서를 개인 폴더에 모았다. 그 문서들은 비슷한 일을 앞두고 막막할 때마다 작은 길잡이가 되었다.
이제 내가 익힌 방법도 누군가에게 그런 자료가 될 수 있을까.
엑셀 파일을 하나씩 열며 두 모니터 사이를 오가던 시간이 있다. 보고서의 첫 문장을 쓰지 못해 선배의 문서를 펼쳐 보던 시간도 있다. 그때는 그저 일을 끝내기 위해 애썼지만, 돌아보니 그 과정에서 배운 것들이 새로운 도구를 쓰는 바탕이 되어 있었다.
오래 일한 시간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일을 설명할 때, 빠진 근거를 찾을 때, 문장의 순서를 바꿀 때 그 시간을 꺼내 쓰고 있다. 이제는 그렇게 꺼내 쓴 것들을, 다른 사람도 열어 볼 수 있는 곳에 조금씩 옮겨 두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