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에 가지 못한 날

잘못 든 길에서 할슈타트를 만나다.

by박계장

발바닥에 돌의 굴곡이 느껴졌다. 체스키크룸로프의 이른 아침, 오래된 건물 사이로 난 골목을 걸었다. 길에 촘촘히 박힌 돌들은 높이와 모양이 조금씩 달랐다. 매끈한 길에서는 잊고 걷던 발바닥이 그곳에서는 자꾸 길을 알아챘다.


전날 저녁에는 성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지붕들이 낮게 모여 있었고, 블타바강은 그 사이를 크게 돌아 나갔다. 해가 기울자 지붕과 강물의 빛도 조금씩 달라졌다. 우리는 한동안 내려가지 못했다. 아침에 골목을 걷다가 다시 만난 강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다리를 건너 돌아보면 조금 전 지나온 집들 위로 성이 보였다. 몇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도시의 모양이 달라졌다.

좀 더 머물고 싶었지만 떠나야 했다. 이번 연수는 프라하에 도착해 카를로비바리와 체스키크룸로프를 거쳐 부다페스트로 갔다가, 다시 프라하에서 귀국하는 7박 9일의 여정이었다. 이날은 비엔나를 둘러보고 부다페스트의 숙소까지 가기로 했다.


운전대를 잡은 후배는 친구가 불러주는 목적지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우리는 화면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갔다. 독일어로 적힌 알 수 없는 표지판보다 작은 핸드폰 속 화살표 하나가 알아보기 쉬웠다. 어디쯤 가고 있는지 제대로 살피지 않아도 차는 잘 달렸다.


세 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한 곳은 잘츠부르크였다.


비엔나가 아니었다.


차를 세우고 나서야 목적지를 잘못 입력했다는 것을 알았다. 비엔나와는 다른 쪽으로 한참을 온 뒤였다. 돌아가서 애초 일정을 따르기에는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누가 잘못 불렀는지, 누가 잘못 눌렀는지를 따져도 차가 달려온 길은 줄어들지 않는다. 나 역시 화면을 들여다보거나 지도를 확인하지 않고 편히 앉아 온 사람이었다.


우리는 비엔나를 포기했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잘츠부르크를 둘러보기로 했다. 모차르트 생가를 보고 구시가지로 나왔다. 처음부터 오려던 곳은 아니었지만 거리를 걷다 보니 일정이 틀어졌다는 생각도 잠시 잊었다. 그러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여행을 시작하고 몇 차례 이용한 화장실에서는 입구의 게이트에 카드를 대면 되었다. 돈을 내는 일에는 차츰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날도 공공화장실 표지를 따라 들어갔는데 카드 결제기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서성이고 있으니 중년 여성이 나와 이용료를 받았다. 현금이 없다고 했지만 카드는 받지 않았다.


문 앞까지 가 놓고 돌아섰다.


조금 더 걷다가 스타벅스를 발견했다. 커피를 주문하고 화장실을 이용한 뒤 자리에 앉았다. 커피잔을 내려놓고 보니 조금 전 일이 새삼스러웠다. 한국에서 화장실을 찾을 때는 지갑에 현금이 있는지를 먼저 생각한 적이 없었다. 카드 한 장이면 어지간한 일은 해결된다고 믿었는데, 그날은 화장실 문 하나를 통과하지 못했다.


어릴 때는 우리나라에도 돈을 내고 들어가는 화장실이 있었다. 휴지를 따로 챙기기도 했고, 들어가기가 꺼려져 참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지하철역이나 공원, 휴게소에서 깨끗한 화장실을 무료로 이용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편해지는 동안에는 그 변화를 잘 몰랐다. 낯선 도시에서 문을 등지고 돌아서고 나서야 평소의 편리함을 생각했다.


식당의 물도 그랬다. 여행 중 생수를 주문하면 음식값과 함께 계산되었다. 어떤 곳에서는 물 한 병 값이 맥주 한 병과 크게 다르지 않아 환율을 다시 계산해 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식당에 앉으면 물부터 나오고, 모자라면 더 마셨다. 여행을 와서 새로 보는 것만 신기할 줄 알았는데, 늘 누리던 물 한 잔까지 새삼스러워졌다.


잘츠부르크를 둘러본 뒤 다시 지도를 펼쳤다. 이번에는 평소 가보고 싶었던 할슈타트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까지 온 김에 가까운 곳이니 들르기로 했다. 비엔나로 제대로 갔다면 찾아가기 어려웠을 곳이었다. 처음에는 잘못 들어선 길이었지만, 이제부터 더 돌아가는 것은 우리가 고른 일이었다.


할슈타트에서는 호수보다 산이 먼저 보였다. 물가까지 내려온 산이 마을 뒤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집들은 산과 호수 사이의 좁은 자리에 모여 있었다. 건물을 보다가도 시선이 자꾸 숲과 능선으로 올라갔다. 체스키크룸로프에서는 지붕들이 오래 눈에 남았는데, 이곳에서는 집을 둘러싼 산과 물이 훨씬 컸다.

호수에는 산과 집이 한 번 더 비쳤다. 수면이 움직일 때마다 지붕과 나무도 조금씩 흔들렸다. 휴대전화를 꺼내 여러 장을 찍었다. 눈앞에서는 높고 넓던 풍경이 화면 안에서는 금세 작아졌다. 조금 전에는 산이 너무 커서 집들이 작아 보였는데, 사진에서는 그 산마저 작았다. 몇 장을 더 찍다가 휴대전화를 내렸다. 담으려 애쓰던 동안에도 호수는 그대로 눈앞에 있었다.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하루를 마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부다페스트까지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었다. 할슈타트를 나설 때는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호수 앞에서 오래 머문 만큼 숙소에 도착하는 시간도 뒤로 밀렸다. 길을 잘못 들어 좋은 곳을 보았다고 웃기에는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하니 밤 한 시가 가까웠다. 여섯 명이 함께 쓰는 도미토리 방에는 다른 투숙객 한 명이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가 짐을 풀고 차례로 씻었다. 조심한다고 해도 캐리어를 여닫고 침구를 정리하는 소리가 났다. 한 사람이 눕고 나면 또 한 사람이 움직였다.


미안했지만 우리도 지쳐 있었다. 그때는 그 말로 마음을 조금 덜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늦게까지 돌아다닌 사정이 먼저 잠든 사람의 잠보다 앞설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는 뜻밖의 호수를 만난 하루였지만, 그에게는 늦게 들어온 네 사람이 있는 밤이었다.


다음 날 그를 만나 잠을 설치게 한 것은 아닌지 물으며 사과했다. 그는 전날 많이 돌아다녀 몹시 피곤했다며 웃었다.


“귀마개하고 수면안대 덕인지, 너무 피곤해서였는지 잘 잤어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우리도 피곤했다는 사정만으로는 덜어지지 않던 미안함이 그의 웃음에 조금 가벼워졌다. 잘츠부르크로 잘못 간 일도, 할슈타트에서 오래 머문 일도 이제는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엔나에 가지 못한 날을 떠올리면 할슈타트의 산과 호수가 먼저 보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잘 잤다며 웃던 젊은 한국인 여행자의 얼굴도 함께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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