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서적

by이효선

나는 정말 바카라을 사랑했을까?




우리는 바카라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오늘 기형도 시인의 「오래된 서적」을 읽으며 문득 생각했다.

나는 과연 내 삶을 지나간 바카라들을 얼마나 깊이 있게 대하며 살아왔을까.


한때 나를 위로하고 희망을 보여주었던 수많은 바카라들. 막막한 밤을 건너게 해 주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열어주었던 문장들. 그 많은 바카라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바카라에는 주인이 없다는 말이 있다.

노름빚과 빌려 준 바카라은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속담도 있다.

지금도 여전히 통하는 말이다. 바카라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떠돌며 살아간다.

누군가에게 빌려준 바카라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고, 한 번 손을 떠난 바카라은 다른 인연을 찾아간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렇게 쉽게 바카라들을 떠나보냈을까.


내가 애써 고르고, 밑줄을 긋고, 때로는 눈물까지 떨어뜨리며 읽었던 바카라들인데. 내 숨이 되었고 내 마음을 지탱해 주었던 바카라들인데. 어째서 다녀오라는 인사 한마디 없이 그렇게 잊어버렸을까.


바카라에 대해서는 늘 핑계가 많다.


집이 좁아서.

이사를 해야 해서.

다 읽은 바카라이라서.

이제는 필요 없는 바카라이라서.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며 바카라을 정리한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바카라이 사람처럼 감정을 가진 존재라면 어떨까.

자신을 품어주던 사람에게서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서러울까.


오늘 「오래된 서적」을 읽고 산문시를 쓰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어린 시절 내가 읽던 바카라들은 어느 날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 후 내가 집을 떠나 도시로 향하면서 그 바카라들은 기억 속에서도 조금씩 멀어졌다. 새로운 바카라을 읽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느라, 한때 나를 키워주었던 바카라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결혼 후에는 더 현실적인 이유가 생겼다. 아파트는 좁았고 수납공간은 늘 부족했다. 결국 나는 그동안 아끼고 사랑했던 바카라들을 사과 상자에 눌러 담았다. 테이프로 단단히 봉한 뒤 1톤 트럭에 실어 부모님 집 낡은 창고로 보냈다.


언젠가 다시 읽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언젠가는 끝내 오지 않았다.

바카라들은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긴 시간을 보냈고, 나는 그 존재를 잊은 채 살아갔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그 바카라들 고물상에 줘 버렸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잠깐 짜증을 냈다. 왜 허락도 없이 버렸느냐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감정은 상실감이 아니었다. 그리움도 아니었다.

그저 아깝다는 생각이었다.

그 안에 비싼 바카라도 있었는데.

절판된 바카라도 있었는데.

좋은 바카라들이 많았는데.

그 정도였다.


만약 정말 사랑했다면 나는 달랐을 것이다. 창고에 넣어둔 채 수년 동안 잊고 살지도 않았을 것이고,

버려졌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담담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바카라은 하루에도 쉼 없이 쏟아져 나온다.

읽은 바카라 보다 읽고 싶은 바카라이 더 많고,

새로 출간되는 바카라들은 늘 우리의 관심을 끌어당긴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새로운 바카라을 사면서도 오래된 바카라을 잊는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방금 산 신간보다 오래전에 읽은 바카라들이다.

어린 시절 손때를 묻혀가며 읽었던 동화바카라, 청춘의 밤을 함께 견뎌준 소설바카라,

삶이 무너질 때마다 붙들었던 에세이와 시집들. 그 바카라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바카라은 종이가 아니다. 누군가의 시간이고, 생각이며, 삶의 흔적이다.

그래서 바카라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많이 읽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성장시킨 바카라들의 존재를 잊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다시 나의 바카라장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조용히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정말 바카라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바카라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인가.

바카라을 사랑한다는 말의 무게를 생각하며, 오래전 나를 키워준 바카라들에게 뒤늦은 안부를 건네 본다.


너 거기서 잘 지내니?






오래된 서적

(이효선)




나를 아끼던 그가 떠난 뒤에도

나는 오랫동안 그 집 다락방에 남아 있었어.


세월에 뜯겨나간 창문 틈으로 바람이 드나들었고,

계절은 말없이 지나갔지.

창밖 냄새를 맡으며 지금쯤 봄이겠거니,

가을이겠거니 짐작하며 시간을 견뎠어.


한때 내 안을 가득 채우던 싸구려 잉크 냄새는 어느 날 바람을 따라 떠나버렸고,

나를 빼곡히 새겨 두었던 검은 문장들은

조금씩 회색으로 바래갔어.


그래도 나는 믿었지.

이렇게 오래 버려질 줄은 몰랐으니까.


어느 날 젊은 손이 나를 들어 올렸어.

내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내 몸속을 들춰냈지

오랫동안 멈춰 있던 내 심장이 다시 뛰는 것 같았어.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너는 내 취향이 아니네."


그 한마디와 함께 나는 다시 바닥으로 던져졌고, 문 닫히는 소리가 다락방을 흔들었어.


얼마 후 밖이 소란스러워졌을 때,

나는 직감했어.

아, 이제 이곳을 떠나는구나.

그것이 새로운 삶인지,

죽음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낡은 트럭 위에서 아무렇게나 실려 가며

나는 오랜만에 햇살을 만났고

바람을 맞았어.

이상하게도 미련은 없었지.


너무 오래 잊혀 있었기에

삶에 대한 애착마저 희미해져 있었거든.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나는 오래전 서가를 함께 지키던 친구들을 만났어.


누렇게 바랜 시집도,

등이 해진 소설바카라도,

모서리가 닳은 사전도 있었지.


우리는 반가운 얼굴들을 바라보며

잠시 옛날을 추억했어.

그리고 함께

커다란 통 속으로 들어갔어.


종이가 종이에게 돌아가는 곳.

그 이후의 기억은 없어.

다만 가끔 생각해.


어쩌면 나는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새 바카라 속 한 페이지가 되어

다시 세상에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