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있는 지금의 나는
딸이 자기 전에
새벽 5시 15분에 깨워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어제 아들과 한글 공부 한답시고 또 둘이서 말싸움하느라
나도 아들도 12시 넘어 잠들었다.
일어나니 5시 45분이다.
헐레벌떡 딸을 깨우니 기분이 별로 안 좋은 눈치.
아직도 깨우면 잠결이라 그런지
아기 때 하던 짓을 하는 딸이다.
그런데 오늘은 쌀쌀맞다.
늦게 깨워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실은, 전날 밤 내가 목욕하러 욕실에 갔더니
세탁기와 욕실 미닫이문 사이의 좁은 틈에
교복 카디건이 처박혀 있다.
손을 뻗어도 닿을락 말락 닿지 않아 짜증이 났다.
옷을 벗다 말고 긴 막대기를 가져와서
가까스로 카디건을 꺼냈다.
먼지를 털고 딸 방에 가서 널브러져 있던
교복 스커트와 카디건을 함께 걸어 주면서
교복을 벗으면서 바로 옷걸이에 거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에 대해 거친 질문을 던졌다.
침대에서 먹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하는데도
엎드려서 짭짭 맛있게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꼬라지를 보고 있으니 내 짜증은 더더욱 가중된다.
내 목소리에서 짜증 냄새를 귀신처럼 맡아낸
개코 딸의 눈이 도끼처럼 번득인다.
여기서 한 마디 더 했다가는 또 전쟁이다.
숙련된 파이터는
상대 파이터가 언제 놓아두었는지도 모를
아이스크림 나무막대를 들고 슬며시 방을 빠져나온다.
아침에 딸을 챙겨 보내고
아들을 깨워 밥을 먹여 학교에 보내고 나니
비가 와서 운동을 가지 않는 남편이 어슬렁어슬렁 내 주위를 맴돈다.
보통 때는 운동 시간에 맞춰 내가 아이들 챙기는 동안 아침을 먹고 나가는데......
'아놔, 왜 또 오늘은 비가 오는 거야!'
날씨에게도, 남편에게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삐릿삐릿 화가 난다.
어젯밤에 아이들이 늦게 내놓은 도시락통을 씻으면서 짜증이 몰려온다.
굳이 지금 안 해도 되는데
짜증을 내면서 박박 씻고 있자니 더 화가 난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 걸까.
도대체 나는 늘 왜 이렇게 화가 많지?
짜증쟁이인가?
또 시작이다.
자기 비하. 에효......
말라서 떨어지지 않는
도시락통의 밥풀떼기를 무심히 문지르다가
한마디가 튀어나온다.
"아, 배고파......"
맞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내 행동을 반추해 본다.
금요일은 퇴근이 밤 9시 반 넘어서다.
그래서 저녁은 집에 오는 전철 안에서
너츠 정도로 가볍게 때우고(음식이 가능한 전철)
집에 와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씻고 잔다.
아침에 아이들 챙겨 학교 보내고 나서
거의 12시간 넘게 빈 속으로 왔다 갔다 하는 셈이다.
남편이 운동을 가고 난 다음에
대충이라도 아침을 챙겨서 먹는데
오늘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무심코 내뱉은
"아, 배고파......" 한 마디에
나는 문득 스스로를 너무 들볶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짜증이 난 이유는 단지 배가 고파서일 수도 있다.
따뜻한 밥을 먹고 배가 두둑했다면
난 방글방글 웃으며
흩뿌려진 딸의 교복을 콧노래를 부르며 걸 수도 있었고
아들의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재미나게 풀어 갈 수도 있었고
남편의 어슬렁거림을 귀엽게 바라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난 이제까지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나 자신을
항상 못난 사람, 수양이 부족한 사람, 철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단정해 온 것만 같다.
자신의 인격을 의심하고 좌절하기 전에
먼저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었던 건 아닐까.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도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저 사람은 원래 저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단정 짓기 전에
그 사람이 놓인 상황을 한 번쯤 살펴 볼 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토록 품위 있는 지금의 나는......
어슬렁 남편과 나란히 앉아
비 오는 공원을 바라보며 따뜻한 밥을 먹고
배가 두둑해지고 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