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우스의 리더쉽

인간의 본능은 수천년전이나 변한것이 없구나…

byAltusSolum
https://www.greekboston.com/culture/mythology/about-homer-poet/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덕분에 호메로스의 <오디세이(Odyssey)>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대부분 우리는 '트로이 목마' 이야기나, 여신의 유혹을 뿌리치고 지고지순한 아내에게 돌아간 낭만적인 영웅담 정도로만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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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오디세이>는 호메로스라는(시각 장애인이라고 알려짐) 작가가 쓴 작품인데, 단행본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거대한 세계관인 '트로이 서사시군(Epic Cycle)' 총 8권 중 7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전쟁의 발발 원인을 다룬 1권 <키프리아>부터 오디세우스의 죽음을 다룬 8권 <텔레고네이아>까지 이어지는 이 방대한 서사 속에서, 온전히 텍스트로 살아남은 것은 호메로스가 쓴 2권 <일리아스>와 7권 <오디세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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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체 서사시군 안에서 두 작품의 역할은 극명하게 나뉜다. 2권 <일리아스>가 신념과 명예를 위해 앞뒤 안 가리고 피를 흘리는 '젊은 전사들의 맹목적인 투쟁과 파괴'를 다룬다면, 7권 <오디세이>는 전쟁이 끝난 후 폐허가 된 일상으로 돌아와 무너진 삶을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를 다루는 '살아남은 자의 묵직한 바카라임과 질서 복원'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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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오디세이>는 피 끓는 청춘의 무용담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조직을 이끌고 생존해야 하는 '리더십의 잔혹한 시험대'이자 '어른의 서사'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7번째 서사시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위대한 영웅의 아름다운 승리'로 포장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읽는다. 오디세이는 낭만적인 동화가 아니다. 오히려 자아(Ego)를 통제하지 못한 리더의 오만과 허영심, 그리고 비전을 공유하지 않는 닫힌 카르텔이 어떻게 같은 배에 탄 선원들을 몰살시키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처절한 '실패의 해부학'이다. 흥미로운 점은 오디세이를 읽다보면 이 글이 수천년전에 써진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현대적이라는것이다. 세 가지 결정적 장면을 통해, 오늘날 한국 슬롯의 민낯을 마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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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 자아성취

사람들은 오디세우스가 영원한 생명과 쾌락을 약속한 여신 칼립소를 버리고, 늙어가는 아내 페넬로페에게 돌아간 것을 두고 '위대한 사랑'이라 찬양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뭐 일부 그럴수도 있겠지만..냉정하게 말해, 그저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아름다운 여신의 품을 떠나는 남자는 세상에 존재하기 어렵다. (성별을 반대로 해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페널로페에 대한 사랑때문이라고 한다면 결국 그 마음은 그 사람 자체라서라기보다 그녀가 이미 자신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이 온전히 나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 부분 만큼은 진실로 '낭만'적일 수 있겠다. 아마도 이 둘은 오래 떨어져 서로를 그리워했기 때문에 가능한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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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디세우스가 고향인 이타카로 기어이 돌아가려 했던 진짜 이유는 로맨스가 아니다. 여신의 섬에서 그는 영원히 늙지 않을지는 몰라도, 결국 여신에게 종속되어 총애받는 '대상 중 하나(one of them)'이거나 그냥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반면 이타카에서 그는 온전한 통제권을 쥔 왕이다. 즉, 이타카는 자신의 질서를 세울 수 있는 현실의 영토였다. 그는 낭만을 좇은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신의 '실존적 권력과 바카라임의 무대'를 선택한 극도의 현실주의자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온전히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고 가치를 창출하며 효능감을 느낄 때 기쁨을 느낀다. 그런데 지혜롭고 현명한 전략가인 영웅 오디세이우스가 여신 칼립소의 곁에서는 한낱 미물에 불과했으니 그리고 그 상태로 7년을 보냈으니 말그대로 화려하고 안정된 천국에서 얼마나 불행했을지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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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슬롯는 상투적인 '정상'의 가치나 '안정'적인 삶 같은 낭만적인 껍데기로 본질을 가리려 든다. 하지만 인간을 움직이는 진짜 동력은 '내가 내 삶의 온전한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실존적 감각이다. 이러한 본능을 고취시키고 장려해서 각 개인이 온전히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슬롯에서 비로소 우리는 성장 할 수 있다.


폴리페모스(Polyphemus)

우티스(Nobody) < 쇼타임(Showtime!)

이 서사시에서 오디세우스가 저지른 최악의 패착은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인 폴리페모스의 동굴에서 탈출할 때 벌어진다. 폴리페모스가 이름을 묻자, 그는 "나는 아무도 아닌 자(Nobody, 그리스어로는 Outis)다"라고 속이는 놀라운 지혜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한다. 하지만 동굴을 무사히 빠져나와 안전한 바다에 이르렀을 때, 그는 그 찰나의 오만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기어이 소리친다.

"내 이름은 이타카의 오디세우스다!"

왜 그랬을까?

자신을 괴롭힌 괴물에게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과시하고 싶었던 이 오만(Ego) 때문에, 그는 폴리페모스의 아버지인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게 되고 끝내 끔찍한 저주가 시작된다.

그 저주의 결과가 무엇인가?

오디세우스 본인이야 물론 온갖 고생 끝에 기어이 고향에 돌아가 왕좌를 되찾는다.

왜? 스토리의 주인공이니까..

하지만 배 밑바닥에서 말없이 노를 젓던 '이름 없는 선원들'은 모두 수장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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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년이 지났지만 인간의 본능은 별로 변한 것이 없어서 이러한 행태는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오디세이우스 정도의 영웅이나 주인공이 아님에도, 매번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누군줄 알아?"라고 묻는 자들은 본인들이 정말 뭐라도 된줄 안다는데 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현대슬롯의 민낯이다. 실무자들이 과로로 피를 쏟으며 죽어갈 때, 바카라임져야 할 리더들은 거인(언론과 대중) 앞에서 자신의 이름과 직위만 과시하기 바쁘다. 리더가 묵묵히 자신의 에고를 버리고 'Nobody'로 남되 모두를 살리는 결정을 내리지 않고, 지금은 "내 세상이야! 쇼타임!" 을 외치며 허영심을 부릴 때, 죽어 나가는 것은 언제나 힘없는 선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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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와 독점 < 신뢰와 공유

이타카가 저 멀리 눈앞에 보이던 날, 오디세우스의 배는 어이없게도 다시 폭풍우 속으로 튕겨져 나간다.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가 '항해에 방해가 되는 모든 거친 바람(악풍)'을 꽉 묶어 담아준 자루를, 오디세우스가 잠든 사이 선원들이 열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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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누구는 이 장면을 보고 "무지하고 탐욕스러운 부하들 때문에 일을 그르쳤다"고 혀를 찰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며칠 밤낮을 새워 고향을 눈앞에 둘 때까지, 오디세우스는 단 한 번도 부하들에게 그 자루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이올로스가 비밀로 하라고 한것도 아니었다. 그 자루는 모두가 무사히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공동의 '생존 템'이었다. 그런데 그는 입을 꾹 닫고 그저 "절대 열어보지 말고 노나 저어라"라고 통제했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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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는 공명심이다. 오디세이우스는 신의 선물 덕으로 고향에 귀환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 능력으로 해냈다는것을 증명하기 위해 며칠 밤낮을 자지 않고 혼자 키를 잡으며 자루를 끌어안고 있었다. 우리 모두의 협력으로 귀환한것이 아니라, 위대한 영웅의 공로에 의해 제자리를 찾았다는 평가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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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엘리트주의를 들 수 있다. 애초에 선원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나 파트너로 보지 않았던것이 아닐까? 물론 고대 그리스 시대인 점을 감안하면 '오디세이우스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겠다' 싶지만, 오늘날 현대슬롯에서조차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기득권이 수두룩하다는 점은 참으로 씁쓸하다. "복잡한거 설명해봐야 뭘 알겠어? 그냥 너희는 알것없고, 시키는대로만 해라"라면서 통제하고 정보를 독점하는 폭력를 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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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는 권한 위임의 실패다. 오디세이우스는 이타카가 눈앞에 보일때까지 무려 9일 밤낮을 한숨도 자지 않고 혼자 키를 잡고 있었다. 정상적인 리더였다면 "이 자루 안에 우리를 죽일 악풍이 들어있다. 우리 모두가 안전하게 귀환하기 위해 교대로 이 자루를 지켜라."라고 임무를 위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도 믿지못해 혼자 모든것을 통제하려다가 결국 기절하듯 잠들어버렸고, 그 '소통없는 통제'가 화를 부른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현대의 리더들은 절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갈아넣는 이런 류의 '과로'를 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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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배 위에서 비전과 정보를 투명하게 공유하지 않는 이런 류의 지휘관을, 선원들이 도대체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우리는 뼈 빠지게 노만 젓는데, 대장은 저 안에 금은보화를 숨겨두고 혼자 다 가지려는 게 아닐까?" 이 합리적 의심은 선원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오디세우스가 그들의 마음과 신뢰를 얻는 데 철저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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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내가 만났던 가장 훌륭했던 상사는 나에게 거의 모든것을 맡겼고, 거의 묻지도 않았다. 물론 내가 불안해서 중간보고를 자주 하긴 했지만 그때마다 듣는 둥 마는 둥 하시면서.. 가끔 핵심적인 질문과 원칙 몇가지만 말씀하셨다. 그리고 1년간 준비해왔던 그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한 후, 내가 여쭤봤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경험도 없는 나에게 그 일을 맡길수 있으셨는지.. 근데 그때 그분이 한말씀하셨다. "내가 맡겨야, 온전히 바카라임감을 느낄 수있으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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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지점이 지금 청년세대가 느끼는 분노의 핵심이다. 겉으로는 "우리는 한 배를 탔다"며 짐은 같이 지자고 다독이지만, 보상과 핵심 정보(자루)는 언제나 기득권 카르텔끼리만 은밀하게 독식한다. 배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한들, 그 영광과 전리품은 철저히 선장과 이너서클만의 차지라는 것을 청년들은 이미 뼈저리게 겪었다. 정보의 비대칭 속에서 실무자들에게는 그저 묻지 말고 묵묵히 노를 젓는 기계의 역할만 주어질 뿐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거대한 전체 그림 속에서 어떤 퍼즐 조각인지, 혹은 어떤 건물의 벽돌인지를 제대로 안다면 아무리 고된 노동이라도 덜 억울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철저히 소외당한 채 맹목적인 노동만 강요받으니, 결국 길을 잃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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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닫힌 자루를 기어이 열어젖힌 선원들의 행동은 단순한 탐욕이나 일탈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성을 박탈당한 배 위에서 내 몫의 권리와 진실을 요구하는 처절한 몸부림에 가깝다. 비전을 공유하지 않는 오만한 리더십은, 이처럼 바로 눈앞에 성공을 두고도 끝내 조직 내부의 불신에 의해 파멸로 내몰리게 된다. 결국 <오디세이>는 영웅의 찬가가 아니다. 바카라임은 지지 않은 채 자신의 이름과 권력만 과시하려는 오만한 리더들, 그리고 그 위선적인 배 위에서 묵묵히 반전을 꿈꾸며 생존의 사투를 벌이는 오늘날의 청년들을 향한 과거의 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