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된 단어는 종종 사유의 한계를 긋는다. 오늘의 글 <인간의 마지노선>에서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를 다루며 그 부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번역으로는 이 단어가 품은 뜻 자체가 제대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놀다'라는 우리말의 뉘앙스만봐도 그렇다. 대체 이 '루덴스'라는 개념이 왜 그토록 의미있는 것인지 도무지 공감되지 않는다.
학창 시절에 <위대한 개츠비>나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같은 명작들을 처음 읽었을때도 그랬다. 대체 무엇이 감동적인지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훗날 원어로 그 글들을 다시 읽고 나서야 비로소 그 진짜 가치를 깨달았다. 내가 글을 쓸 때 괄호 안에 굳이 원어를 병기하고 번거롭게 출처를 밝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음먹고 파고들고 싶다면, 직접 그 맥락을 찾아보며, 번역의 한계를 넘어 진의에 닿을 수 있도록 그 과정의 돌다리를 놓고 싶기 때문이다.
라틴어 동사 '루데레(Ludere)'의 현재분사형인 '루덴스(Ludens)'는 본래 "연기하다", "게임하다", "규칙 안에서 움직이다"라는 뜻을 품고 있다. 그 명사형인 '루두스(Ludus)'가 고대 로마에서 어떻게 쓰였는지 살펴보면, 이를 단순히 '빈둥거림'이나 '가벼운 장난'으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단편적인지 알 수 있다.
고대 로마인들은 대단히 진지하고 역동적인 활동들을 모두 '루두스'라 불렀다. 아이들이 배우는 기초 학교가 루두스였고,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리는 검투사들의 양성소 역시 '루두스 글라디아토리우스(Ludus gladiatorius)'였다. 엄격한 대본 아래 합을 맞추는 연극, 제국의 거대한 국가적 제전, 그리고 체스나 주사위처럼 규칙 안에서 승부를 겨루는 보드게임까지 모두가 루두스의 영역이었다.
즉, 라틴어 '루덴스'가 내포한 놀이의 본질은 무위도식하는 휴식이 아니다. "일상과 분리된 특정한 무대 위에서, 정해진 규칙을 기꺼이 감내하고, 타인과 치열하게 합을 맞추며, 승패를 떠나 그 행위 자체에 온 에너지를 쏟아붓는 찬란한 몰입", 그것이 바로 진짜 놀이다.
하위징아가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지혜)나 호모 파베르(도구)를 넘어 '호모 루덴스'라 명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법정에서의 숨 막히는 변론(법), 제단 앞에서의 엄숙한 의식(종교), 운율을 맞추는 시와 음악(예술), 지혜를 겨루는 철학적 논쟁(정치)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위대하고 진지한 문화적 성취들은 모두 이 잉여적이고 자발적인 '루두스'에서 기원했다. 법정, 신전, 무대, 경기장이라는 분리된 규칙의 시공간 안으로 기꺼이 자신을 던져 치열하게 몰입하며 문명을 빚어낸 것이다.
10여 년 전, 조던 B. 피터슨(Jordan B. Peterson)이 대중적인 명성을 얻기 전 캐나다의 한 대학 교수로 강단에 서던 시절의 강의가 떠오른다. 그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고 했다. "이기고 지는 것보다, 거듭해서 놀이에 초대받는(invite to play) 사람이 되어라." 당장의 승패보다 모두가 함께 'play' 하고 싶어 하는 존재가 될 때, 가장 많은 기회를 얻고 마침내 탁월함에 도달한다는 통찰이다. 결국 가장 빈번하게 무대에 오르는 사람이 마침내 가장 잘하게 된다는 진리를 설명한 것이다.
문제는 루덴스든 플레이든, 한국어 '놀다'로는 이 '자발성'을 온전히 담아내기 역부족이라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진정으로 원해서 스스로 뛰어든 일일때 결국 고유한 빛을 발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나 자신을 가만히, 유심히, 잘 관찰해보자. 혼자 있을때 꼬물꼬물 뭘하고 있는지.. 내가 가장 자주하는 행동이 뭔지.. 뭘 할때 가장 신나는지, 어디에서 가장 마음이 편안한지.. 누구랑 있을때 가장 활기찬지.. 거기에 답이 있다. 우선 내가 나를 알아야 비로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