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소냐는 왜 몸을 팔아야만 했을까. 024

가난이 문학과 예술의 근원이 되는 이유에 관하여

by몸글 작가 고결
소냐 앞에 엎드린 라스콜니코프, 손상기 화백 풍으로 AI가 묘사함

[캔버스의 묘사: 녹색 두건 앞의 붕괴]

화폭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손상기 화백 특유의 무겁고 습한 흙빛과 탁한 잿빛입니다.


에어컨 아래의 쾌적함과는 거리가 먼, 곰팡이 핀 벽지가 떨어져 나가는 비좁은 방. 거칠고 두꺼운 나이프 자국과 붓터치는 숨 막히는 가난의 무게를 날것의 질감으로 캔버스 위에 짓이겨 놓았습니다.

그 냄새나는 마구간 같은 캔버스의 중심부 곁에 녹색 두건(숄)을 쓴 소냐가 서 있습니다.


그녀가 두른 녹색은 온실 속 화초의 싱그러운 초록이 아닙니다. 비바람과 삶의 먼지에 닳고 닳아 퇴색된, 멍든 상처 같기도 하고 깊은 심연 같기도 한 탁한 녹색입니다.


손 화백의 시선 속에서 소냐의 형태는 비너스처럼 매끄럽지 않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느라 등은 조금 굽어 있고, 손마디는 투박하게 뭉그러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그 낡은 녹색의 물감 덩어리는, 척박한 바닥에서 기어코 솟아난 지독한 생명력처럼, 혹은 십자가를 진 성녀의 비천한 후광처럼 화면의 중심을 고요하게 장악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발치에 무너져 내린 라스콜니코프.


그는 손상기 화백이 그렸던 <공작도시>의 '거대한 리어카를 끄는 사내'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한때 자신을 비범인이라 믿었던 오만한 이성은 온데간데없고, 보이지 않는 거대한 죄의식과 삶의 무게에 짓눌려 기형적으로 꺾이고 비틀린 육체만이 남았습니다.


거친 잿빛 물감으로 칠해진 그의 등은 속절없이 구부러졌고, 뾰족하게 튀어나온 어깨뼈는 바닥을 향해 고꾸라져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구축했던 '스스로 고결하다 믿었던 세계'가, 가장 비천한 창녀의 발밑에서 처절하게 바스러진 형상입니다.

이 무거운 그림을 구원하는 것은 빛입니다.

나의 텅 빈 탑차 안으로 스며들었던 바로 그 붉고 탁한 저녁 햇살이 좁은 창문을 뚫고 들어와 이 두 사람을 비스듬히 가릅니다.


빛은 무너져 내린 차가운 회색빛의 남자와, 그를 말없이 내려다보는 퇴색된 녹색 두건의 여자를 하나로 묶어줍니다.


세상의 모든 위선과 껍데기가 벗겨진 이 처절한 가장자리에서, 마침내 두 영혼의 바다와 육지가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고 있습니다.




『죄와 벌』을 읽다가 마주한 잔잔한 충격이 한동안 가슴속을 맴돌았다.


극빈. 처절하게 가난한 소냐가 몸을 판 것은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와 새어머니, 이복동생을 살리기 위한 희생이었다.


가난은 그녀를 희생하게 했고 가족은 그런 그녀를 의지하게 만들었다. 가난은 사람을 비루하고 초라하게 한다.


하지만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고결하게 살 수 있다고 여겼던 라스콜리니코프의 오만한 이성이,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 스스로 몸을 던진 소냐의 맹목적인 사랑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 압도적인 역설을 펼쳐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전개 앞에서 참 많은 질문을 가지게 된다.


냄새나는 마구간(가난, 극빈)에서 이처럼 고결한 사랑이 어떻게 피어날 수 있는 걸까.


실패와 경멸의 대상인 가난 속에서 숭고한 아름다움과 위로가 담긴 수많은 예술과 문학이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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