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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영웅

제4막: 영해 해방구

by조삿갓

칠보산(七寶山)의 능선은 험준했다. 기암괴석과 빽빽한 소나무 군락이 3월의 삭풍을 가두어 협곡의 기온을 떨어뜨렸다. 달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어둠 속, 쫓기는 자들의 거친 숨소리와 낙엽 밟는 소리만이 울렸다.


"헉... 헉... 형님, 지는 틀렸심더. 고마 짐 덩어리 놔두고 가이소."


칠성의 등에 업힌 달삼이 신음했다. 벌고개에서 후퇴하던 중 쏟아진 유탄이 그의 오른쪽 허벅지를 관통한 뒤였다. 뿜어져 나온 피가 칠성의 적삼을 적시고, 얼어붙은 진흙 바닥 위로 점점이 핏자국을 남겼다.


"주둥이 닥치라! 내 등짝이 니 하나 업었다고 부러질 줄 아나!"


칠성이 악을 썼지만, 가파른 산비탈과 달삼의 출혈 앞에서 그의 걸음도 점차 무거워지고 있었다.

산 아래쪽에서 랜턴 불빛들이 명멸했다. 군견 짖는 소리와 추격대의 군화 소리가 턱밑까지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피 냄새를 맡은 추격대는 끈질겼다.


대열 맨 뒤에서 총구를 겨누며 걷던 늙은 포수 최학수가 걸음을 멈췄다.


"이대로 가다간 날 밝기 전에 꼬리를 밟힌다."


최학수의 시선이 방금 지나온 바위틈, 성인 남자 두 명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칼바위 목구멍'에 머물렀다. 그는 절뚝이는 다리를 바위 틈새에 버티고 서서, 녹슨 베르단 소총의 노리쇠를 당겼다.


"어르신! 뭐 하시는 겁니까! 빨리 능선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앞서가던 진우가 다급히 달려왔다.


"다리 다친 놈을 업고서는 꼭대기를 넘지 못한다."


최학수는 진우를 돌아보지 않은 채, 탄띠에 남은 마지막 실탄 세 발을 약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누군가는 이 좁은 목구멍을 막고 놈들의 발목을 끊어야 해. 내 무덤은 12년 전 광화문에서 이미 파였다. 덤으로 산 목숨, 오늘 여기서 왜놈들 길동무로 삼기에 제격이구나."


"안 됩니다! 지사님께서 모두 살아서 돌아오라 하셨습니다. 제가 남겠습니다. 전술을 아는 제가 더..."


진우가 앞으로 나서려 하자, 칠성이 진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등에 업고 있던 달삼은 이미 권태원에게 넘긴 뒤였다. 칠성의 입에서 허연 입김이 뿜어졌다. 그는 허리춤에서 짐승의 기름이 묻은 발골도(發骨刀)를 뽑아 들었다.


"니는 그 비상한 대가리를 써가 우리 동포들을 빼내야 할 거 아이가. 칼부림으로 고기 써는 건 내 전공입니데이."


"형님...!"


진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놈들의 총알받이가 되시겠단 말입니까! 살아서 같이 가야 합니다!"


"개죽음 아이라 캤제."


칠성이 진우의 멱살을 쥐었다. 그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으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내 평생 남들이 던져주는 찌꺼기나 먹고,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살았데이. 근데 오늘 영해 장터에서 나도 꼿꼿한 사람새끼라는 걸 맛봤다 아이가. 내 목숨 하나 던져가 동포들 살릴 수 있다마... 천한 백정 놈한테 그보다 더 좋은 상이 어데 있노."


칠성이 진우를 밀어냈다. "퍼뜩 가라. 내 피가 끓어가 왜놈들 대가리 쪼개기 전에."


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합리적인 전술을 따지던 이성은 이들의 희생 앞에서 의미를 잃었다. 진우는 허리를 굽혀 가장 깊은 절을 올렸다.


"백 년 뒤 세상에서도... 두 분의 이름을 제가 기어이 기억하겠습니다."


진우가 달삼을 업은 대원들을 이끌고 멀어지자, 좁은 칼바위 앞에는 노병과 백정 두 사람만 남았다.


"백정 놈이 저승 길동무라, 어르신 냄새나서 고생 좀 하시겠구마."


칠성이 칼날을 소매로 닦으며 웃었다.


"허허... 12년 전 먼저 간 내 부하 놈들도 너처럼 무식하게 생겨먹었지. 백정 칼맛을 보면 아주 기겁을 하겠구나."


최학수가 개머리판을 어깨에 단단히 고정했다.


투타타탁—!


랜턴 불빛과 함께 추격대 선두가 핏자국을 따라 칼바위로 쇄도했다. 최학수는 숨을 멈추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


낡은 베르단 소총이 불을 뿜었다. 가장 먼저 달려오던 헌병이 쓰러졌다. 놈들이 당황해 멈칫하는 찰나, 최학수는 남은 두 발의 실탄을 연달아 쏘았다.


"적이 있다! 쏴라!"


일본군 보병들의 소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총탄이 빗발치며 바위 파편이 튀었다. 최학수의 오른쪽 어깨를 탄환이 관통했으나 노병은 신음하지 않았다. 그는 실탄이 바닥난 소총의 총열을 거꾸로 쥐고 바위 위로 일어섰다.


"대한제국 시위대! 최학수가 여기 있다!"


최학수가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바위를 오르던 일본군을 내리치는 순간, 바위틈에서 칠성이 놈들의 진형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으아아아아!"


칠성의 발골도가 허공을 갈랐다. 세련된 검술이 아닌, 짐승의 뼈와 살을 발라내던 날것의 칼질이었다.


탕! 타앙!


영거리에서 발사된 총탄이 칠성의 옆구리와 허벅지를 뚫고 나갔다. 살점이 뜯기는 고통 속에서도 칠성은 자신에게 총을 쏜 놈의 목을 끊어냈다.


"찌르고 쏴라! 악귀 같은 놈들이다!"


좁은 칼바위는 순식간에 난전으로 변했다. 최학수는 총검에 배가 찔리자 놈의 멱살을 쥐고 절벽 아래로 함께 굴러 떨어졌다. 칠성은 온몸에 여러 발의 총탄을 맞고도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며 칼을 휘둘렀다.


일본군 수십 명의 전진이 단 두 명 앞에서 멈춰 섰다.


털썩. 마침내 칠성이 무릎을 꿇었다. 입에서 선혈이 쏟아졌다. 하지만 칠성의 두 손은 통로 양쪽의 바위벽을 꽉 움켜쥔 채, 죽어서도 길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듯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산등성이 너머, 대원들을 이끌고 계곡으로 접어든 진우의 귓가에 울리던 총성과 비명 소리가 일순간 멎었다.


진우는 걸음을 멈추고 칠보산을 돌아보았다. 뜨거운 눈물이 시야를 가렸다.


그들의 이름은 2026년의 번듯한 기념비에 새겨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역사바카라의 건조한 활자들은 산비탈에서 죽어간 늙은 포수와 젊은 백정의 서사를 기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우는, 그리고 영해의 땅은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기록되지 않은 이들이 흘린 피가 칠보산의 흙으로 스며들어, 다가올 미래의 가장 단단한 바닥을 다져내었음을. 1919년의 칠보산에는 밤새도록 매서운 삭풍만이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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