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면도날. -2

언중을 13년 만에 만나는데 생뚱맞게 석고상이야기나 하고.

by이규만

비너스 말이야. 나는 비너스가 그리스·로마 신화에 아름다운 여인네를 닮은 신들, 중의 그 이름을 따서 모든 여성을 지칭할 때 비너스라고 부르는 줄 알았어. 아프로디테, 헤라 같이. 그런데 말이야. 왜 비너스마다 앞에 수식어가 하나씩 붙지? 보통 우리가 처음 대하는 비너스는 밀로의 비너스, (우리 화실은 비너스가 두 개잖아) 그 옆에 곰보투성이의 비너스는 파르테논의 비너스. 알고 보니까, 다른 비너스가 여럿 된다며? 비너스가 여러 종류이긴 한데 뭐 굳이 그걸 다 나열하려면 복잡하고 -앞에 수식어 내지는 다른 이름들이 있는 건 처음 발견했을 당시에 장소들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경우가 많아. 밀로의 비너스는 농부가 멜로스 섬에서 밭을 갈다 발견해서 멜로스 아프로디테라고도 불러. 그리고 곰보 비너스는 파르테논 신전에서 발굴되었다고 해서, 파르테논의 비너스라 부르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속옷 선전할 때 상표처럼 따라오는 밀로의 비너스 말인데, 팔이 두 개 없잖아. 그 팔을 달아보려고 조각가들이 갖은 노력을 다 해보았는데, 아무리 달아보아도, 그 전신상의 자세를 취한 상태에서는 어색하더라는 거야. 아무래도 밀로의 비너스는 실패작이고, 팔이 없을 때가 가장 자연스럽대. 얼굴에서 가슴, 허리에 이르는 S자 몸매 곡선. 어떤 여자가 저 관능미를 어떻게 쫓아가겠어. 이른바 황금 비율이라는 거지. 수채화를 그릴 때도 정물화는 S 구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잖아. 석고상 중에 도화지에 옮겨 그릴 때 8등분으로 가장 과학적이고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두상은 비너스뿐이래. 그래서 기본 석고상에서 형태를 잡을 때 비너스를 모태로 하면 가장 정확해서, -비너스를 잘 그리면 모든 석고데생을 잘 그릴 수 있다. -는 말이 나올 정도야. 아그리파나, 줄리앙도 중요하지만, 미술을 입문하는 학생들은 비너스를 기본 석고상으로 잡고 그림을 시작하게 돼. 아무래도 아그리파같이 우직한 장군의 얼굴 이미지를 그리는 것보단, 아름다운 여성의 우아한 곡선으로 시작하는 것이 낫지 않겠어? 말은 이렇게 해 놓고 그런데 난 왜 자꾸 아그리파만 그리게 되는지 모르겠어. 아그리파에 너무 길들었나 봐. 그래도 대학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파릇파릇한 네가 아이들 맡아서 수업해. 나 같은 늙다리가 나서면 여자 꼰대 소리나 듣지. 나는 뒤편에서 학부모 상담하고. 어떡하겠어! 너나 나나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아이들한테 데생이나 가르치면서 평생 먹고살 수 있는 길은 이것밖에 없어. 마음 추스르지 못해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이거나 같이 열심히 해보자고.

그나저나, 앞에 세 번째 줄, 창가 쪽에 앉은 사람이 언중이라고? 그런데 나는 왜 못 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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