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와인을 마신다는 것

한 잔의 와인, 천천히 살아가는 시간

by행운의 여신


처음 와인을 알아갈 때
저는 와인이 꽤 어려운 친구를 사귀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게는 조금 낯선 단어들과
잔을 돌리고, 향을 맡고,
어떤 맛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까지.

잘 느껴지지 않아도
‘체리 향이 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해야 하나
생각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와인을 마시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 긴장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혹시 모르는 것은 아닐까.
혹시 잘못 마시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와인이라는 친구를 사귀는 일이
꼭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와인의 스타일과 균형,
맛과 품질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은
훈련된 감각과 경험이 필요한 영역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와인 전문가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애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저에게 와인을 알아간다는 것은
평가하거나 정답을 맞히는 일이 아니라
천천히 바라보고,
조금 더 오래 머물러 보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사람을 알아가는 것과도
아주 닮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왠지 어려워 보였던 사람이
의외로 다정한 마음을 보여줄 때가 있고,
참 순하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가까이 지내면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습니다.

사람도 와인도
첫인상만으로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시간을 두고 바라보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그 사람의 곁에 머물러 보아야 합니다.

어쩌면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마음을 알아가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빨리 지나치며 살아갑니다.

음식은 맛을 느끼기도 전에 삼켜버리고,
계절이 바뀌는 것도
어느 날 문득 뒤늦게 알아차릴 때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도
사진 한 장 남길 틈 없이 지나치고,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있으면서도
다음 약속과 해야 할 일을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도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걱정하고,
지나간 어제를 다시 돌아봅니다.
그러는 사이
정작 제가 서 있는 지금은
조용히 흘러가 버립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빨리 지나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저는
와인을 마시는 시간이 좋습니다.

한 잔의 와인이
제게 잠시 멈추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입니다.

와인을 시음할 때는
보통 네 가지 과정을 거칩니다.

바라보고,
향을 맡고,
마시고,
그리고 여운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네 가지 와인 마시는 방법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과도 참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첫 번째, 바라보기

와인을 마시기 전
잔을 들어 빛을 바라봅니다.

잔 안에서 천천히 흔들리는 색과
유리벽을 타고 내려오는 작은 물결을 봅니다.

젊은 레드 와인은
맑고 선명한 루비빛을 품고 있고,
시간을 오래 품은 와인은
조금씩 벽돌빛을 닮아갑니다.

화이트 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린 레몬빛으로 시작해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 더 깊고 따뜻한 황금빛을 품습니다.

와인은 색으로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얼굴에도
살아온 시간이 조금씩 새겨지듯이 말입니다.

마흔이 지나면
사람의 얼굴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계절이 보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쁜 날에는 웃음이 머물고,
많이 울었던 날에는
눈가에 조용한 깊이가 생깁니다.

사랑했던 시간도, 상처받았던 시간도,
혼자 견뎌낸 밤도
어느새 얼굴 어딘가에 흔적을 남깁니다.

그래서 요즘은 사람을 볼 때
단순히 그 사람의 표정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어떤 시간이 머물러 있는지를
조금 더 바라보게 됩니다.

와인을 바라보듯
사람도 조금 천천히 바라보는 것.

어쩌면 이해는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향을 맡기

이제 잔을 코 가까이 가져갑니다.

한 번 가볍게.
그리고 조금 더 깊게.

와인의 향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잘 익은 과일의 향이 나기도 하고,
어느 봄날의 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비가 내린 뒤 젖은 흙냄새 같기도 하고,
오래된 나무가 있는 숲길을 걷는 듯한
묘한 향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꼭 그 이름을 맞힐 필요는 없습니다.
체리인지 라즈베리인지
정확하게 구별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저 그 향이 나에게 무엇을 떠올리게 하는가.
한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봄날의 정원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어린 시절 할머니가 깎아주시던
사과 한 조각일 수도 있습니다.

또 누군가에게는
오래전 사랑했던 사람과 걷던
늦은 시간의 골목일 수도 있습니다.

향은 기억을 깨웁니다.

그리고 기억은 우리를 다시 그 시절로 데려갑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멀리 데려가는 것 같지만
어떤 향 하나만으로도
그때의 공기와 햇살,
함께했던 사람들의 생기까지 되살아나
우리는 어느새 오래전 그날의 나로 돌아갑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수많은 향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순간들이
어딘가에 조용히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 번째, 한 모금 마시기

이제 와인을 한 모금 마십니다.

급하게 삼키지 않습니다.

잠시 입안에 머금고 천천히 느껴봅니다.
달콤한지, 상큼한지,
부드러운지,
혹은 조금 묵직한지.

혀끝에서 느껴지는 작은 감각을 들여다봅니다.

첫 모금은 조금 낯설 수 있습니다.
어쩌면 거칠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모금에서는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던 향이 나타나기도 하고
세 번째 모금에서는
조금 더 부드러운 표정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몰랐던 마음이
시간이 지나면서 보이기 시작할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차갑게만 보였던 사람이
어느 날 아무렇지 않게 건넨 한마디에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날 때도
첫 모금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더 만나보고,
조금 더 이야기하고,
조금 더 마음을 나누다 보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그 사람만의 향이
천천히 드러날 테니까요.

와인도 사람도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가보다 먼저 느끼고 싶습니다.

좋다, 나쁘다는 건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일 뿐,
지금 이 순간 제 마음에 무엇이 남는지를
조용히 바라보고 싶습니다.


네 번째, 여운을 느끼기

와인을 삼켰다고 해서
와인의 이야기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아주 조용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입안에 남아 있는 향,
천천히 사라지는 맛,
그리고 모두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마음에 남아 있는 감각.

그것을 우리는
‘여운’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여운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끝난 뒤에야 비로소
무언가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게 되는 것.

혹시 여러분에게도
마음에 오래 여운을 남긴 사람이 있으신가요.

관계는 끝났지만
그 사람이 제게 남기고 간 것이 있는 사람.

한 모금의 와인이 사라진 뒤에도
향이 남아 있듯,
좋은 사람도 떠난 뒤
마음 한구석에 온기를 남깁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선명해지는 기억,
아마 그것이
삶의 여운일 것입니다.

삶도 와인도
마지막 한 모금을 마셔보기 전까지는
어떤 맛으로 남을지 알 수 없습니다.

많이 살아본 사람이
삶의 모든 답을 아는 것은 아니듯,
와인을 많이 마신 사람이
반드시 와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인 것도 아닐 것입니다.

기억에 남는 와인은
맛으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떤 와인은
그날의 풍경으로 남아 있고,
어떤 와인은
함께 마셨던 사람의 얼굴로 남아 있으며,
또 어떤 와인은
잊고 있던 저의 한 시절을
다시 데려옵니다.

그래서 와인은 기억이 되고,
감정이 되고,
때로는 오래 닫아두었던 마음의 문을
살며시 열어주는 시간이 됩니다.

오늘 하루가 너무 빨랐다면
지금 내 앞에 놓인
한 잔의 시간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시기를 바라봅니다.

지금 걸어가는 길의 향기를
놓치지 않는 것.

많이 가지는 것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알아보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찾던 인생의 정답에
가장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의 계절은
언젠가 지나갑니다.

그리고 훗날
그 계절을 떠올리며
그때의 나를 조금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 참 좋았지.”

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을
오늘 하나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와인을 마신다는 것과
삶을 살아간다는 것의
닮은 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읽기 전에 잠깐!
와인과 조금 더 친해지고 싶은 초보자분들을 위해 준비한 가벼운 참고 자료입니다. 편하게 즐겨주세요!




와인 테이스팅에 대해 알아보아요


와인 테이스팅이란?


사람이 감각 기관을 활용하여 와인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맛을 간별하고 평가하는 과정이에요



와인을 잘 마시기 위한 시험이 아니에요
답을 꼭 맞히지 않아도 됩니다



와인을 볼 때



복잡하게 색을 분석할 필요 없이


“밝은가? 어두운가?” “맑은가? 깊은가?”


정도만 봐도 충분합니다.



레드 와인 → 루비, 자줏빛, 벽돌빛
화이트 와인 → 레몬빛, 금빛, 황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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