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생각보다 가까운 세계입니다
와인숍이나 마트의 와인 코너 앞에 서면
늘 비슷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수많은 병들이 조용히 서 있고,
낯선 이름들과 숫자들이 라벨 위에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그 앞에서 한참을 머물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이건 어떻게 읽는 걸까.
이 와인과 저 와인은 무엇이 다를까.
나는 어떤 것을 골라야 할까.
달콤한 것이 좋다고 말하면서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그냥 조용히 지나쳐버린 날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별한 날을 위해 와인 한 병을 고르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채 돌아섰던 기억.
와인은 어쩐지
가까이 있지만 조금은 먼 세계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와인의 시작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와인은 포도에서 옵니다.
햇살을 오래 머금고 자란 포도 한 송이가 수확되고
그 껍질과 과육이 조용히 으깨지며
그 안에 있던 당분이 시간을 만나 발효되어
와인이 됩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와인도 너무나도 평범한 출발을 가진 셈입니다.
그런데도 와인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 그 안에 ‘시간’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포도가 자라난 땅,
그 위를 스쳐 간 바람,
계절마다 달라졌던 햇빛과 비의 결,
그리고 그것을 기다리던 사람의 시간까지.
와인은 자연과 사람의 시간이 함께 겹겹이 쌓인 결과입니다.
그래서 같은 포도라고 해도 맛이 다르고
같은 지역이라도 해마다 다른 표정을 가집니다.
어떤 와인은 봄의 공기처럼 가볍고
어떤 와인은 여름의 저녁처럼 깊으며
또 어떤 와인은 늦가을의 햇살처럼 오래 남는 온기를 가집니다.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어쩌면 술을 마시는 일이 아니라
포도 한 알의 시간과 한 계절을 천천히 넘기는 일인 것만 같습니다.
포도밭 위에 머물던 햇빛을 마시고
그 사이를 지나던 바람을 마시고
기다림의 시간을 마시는 일.
그래서 저는 와인이 좋습니다.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포도 한 알이 시간과 자연과 사람을 만나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해가는 과정이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와인은 결코 어려운 세계가 아닙니다.
누구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조금씩 알아가며 자신만의 취향을 찾아가는
아주 다정한 언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첫 이야기는 오늘,
당신이 문득 손에 들어 올린 한 병의 와인에서
조용히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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