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호메로스가 던진 질문, 놀란이 던진 대답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속 머릿속을 맴돈 인물이 있었다.
오디세우스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아내 페넬로페였다.
영화는 페넬로페를 기다리는 왕비로 만들었지만, 호메로스는 그녀를 또 다른 오디세우스로 그렸다.
우리는 흔히 페넬로페를 "20년 동안 남편을 기다린 현모양처"로 기억한다.
하지만 호메로스는 그녀를 그렇게 단순하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와 가장 닮은 사람이다.
오디세우스가 바다에서 거짓말과 계략으로 살아남았다면, 페넬로페는 궁전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수의 이야기다.
구혼자들이 재혼을 강요하자 그녀는 말한다.
"시아버지의 장례 수의를 완성하면 결혼하겠습니다."
낮에는 베를 짜고, 밤에는 몰래 풀어 버린다. 무려 3년 동안.
이것은 '아무도 아니다(Outis)'만큼이나 뛰어난 계략이다.
호메로스는 이 부부를 서로 닮은 사람으로 그린다.
한 사람은 바다에서 살아남고, 한 사람은 궁전에서 살아남는다.
둘 다 무력보다 지혜를 사용한다.
둘 다 상대를 속인다.
둘 다 끝까지 인내한다.
그래서 많은 고전학자들은 '오디세이아'를 "영리한 남편과 영리한 아내가 다시 서로를 알아보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 결말 역시 내게는 조금 아쉬웠다.
원작에서 구혼자들을 모두 죽인 뒤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남아 있다.
오디세우스가 자신이 남편이라고 말하자 페넬로페는 쉽게 믿지 않는다.
그녀는 하녀에게 말한다.
"침대를 밖으로 옮겨라."
그러자 오디세우스가 화를 낸다.
"그 침대는 절대로 움직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침대는 올리브나무를 뿌리째 남겨둔 채 직접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둘뿐이다.
그 순간 페넬로페는 비로소 남편임을 인정한다.
나는 이 장면이야말로 '오디세이아'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이 사랑해서가 아니다.
서로를 끝까지 시험했기 때문이다.
호메로스는 진정한 신뢰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끝까지 의심하고 확인한 뒤에도 남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런 지적인 긴장감이 전혀 없다.
호메로스는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신화를 사용했다.
나는 영화를 보며 계속 이런 생각을 했다.
호메로스는 신화를 통해 인간을 설명했다.
그렇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인간의 심리를 통해 신화를 설명했다.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접근이다.
호메로스에게 키클롭스는 오만이고, 세이렌은 욕망이며, 키르케는 인간성과 본능이고, 칼립소는 불멸의 유혹이며, 아테나는 지혜이고, 페넬로페는 인내와 메티스(지략)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각각의 에피소드는 서로 다른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그 질문들이 하나의 질문으로 합쳐진다.
죄바카라감.
키클롭스도 죄바카라감, 세이렌도 죄바카라감, 키르케도 죄바카라감, 칼립소도 죄바카라감, 아테나도 죄바카라감.
그 결과 신화는 심리학이 되고, 모험은 속죄가 된다.
실제로 많은 평론가들은 바로 이러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이 영화를 단순한 신화 영화가 아니라 전쟁 이후 인간의 죄바카라감과 속죄를 탐구한 현대적 비극으로 해석하며 높은 점수를 주었고, 놀란 특유의 연출력과 철학적 깊이를 극찬했다. 호메로스의 신화를 현대인의 언어로 번역해 냈다는 평가 역시 적지 않았다.
나 역시 이러한 평가가 왜 나오는지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나의 작품으로만 본다면 놀란은 여전히 놀란다운 방식으로 인간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그만의 색깔이 분명한 훌륭한 영화를 완성했다.
그러나 내가 끝내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또 하나의 심리극이 아니라, 호메로스가 2,700년 전에 써 내려간 신화와 철학이 스크린 위에서 되살아나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두 번 본 것 같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해서 겹쳐 보이는 듯 뇌리를 스치는 것이 영화 '오펜하이머'였다.
두 영화의 배경도, 주인공도, 장르도 다르다.
하지만 놀란이 던지는 질문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한 인간은 자신의 선택이 남긴 결과를 어떻게 감당하며 살아가는가?"
이 질문은 '오펜하이머'에서는 원자폭탄을 통해, '오디세이'에서는 트로이 전쟁을 통해 반복된다.
나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독이 자신의 철학을 일관되게 탐구한다는 점은 존중할 만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호메로스가 2,700년 전에 만들어 놓은 다채로운 철학적 세계가 너무 많이 단순화된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은 끝내 지울 수 없었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놀란의 오디세우스'가 아니었다.
영화를 싫어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뛰어난 연출이고, 압도적인 영상이며, 훌륭한 배우들이 만들어낸 수작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극장에서 만나고 싶었던 것은 놀란이라는 감독이 아니라 호메로스라는 시인이었다.
나는 외눈박이 거인을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언어가 무력보다 강하다는 철학을 보고 싶었다.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욕망을 스스로 묶는 인간의 지혜를 만나고 싶었다.
키르케의 마법을 기대했던 것이 아니다. 인간은 언제 짐승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듣고 싶었다.
칼립소의 아름다움을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보다 유한한 삶을 선택하는 인간의 위대함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전쟁 영웅의 죄바카라감이 아니라,
지혜와 거짓말, 오만과 유머, 인간적인 약점까지 모두 품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내게 이 영화는 잘 만든 영화였지만, 끝내 내가 기다렸던 '오디세이아'는 아니었다.
아마 이것이 내가 이 영화를 보며 느낀 가장 큰 아쉬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