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전시회에 다녀와서
토요일 오전, 바카라과 강연 소셜클럽에서 유영국의 <산은 내 안에 있다> 전시회를 다녀왔다.
오늘의 드레스 코드는 흰색이었다. 그림의 색감이 화려하니 관람하는 우리는 흰색으로 맞추자는 김정아 리더님의 제안이었다고 한다.
우중 새벽 달리기를 마치고 흰색 옷을 코디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지난번 바자회에서 산 초록 넥타이 스카프를 목에 둘렀다. 휑한 목을 감싸주면서 화룡점정처럼 제 몫을 해냈다. 생각해 보니 유영국의 그림에도 초록이 많았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오늘 전시와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서울시립미술관에 도착하니 저 멀리 흰색 옷을 차려입은 무리가 눈에 띄었다. 덕분에 쉽게 일행을 찾았다.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이 반가워 내내 웃었다.
소셜클럽 문화홍보팀 운영진들이 오늘 행사를 기획해 주셨다. 1시간 20분 동안 각자 자유롭게 감상한 뒤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를 골라 에세이를 써야 했다.
목적이 있으니 그림을 보는 눈부터 달라졌다. 그냥 예쁘다, 멋지다 하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유영국은 김환기, 장욱진 등과 함께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라고 하는데 나는 그를 잘 몰랐다. 평생 산을 소재로 추상화를 그렸다는 설명을 읽었다.
왜 하필 산에 꽂혔을까?
왜 추상화를 택했을까?
그 의문을 품은 채 그림을 따라 걸었다.
전시의 마지막에 영상을 보고서야 그의 생각을 조금 알게 되었다. 피카소 같은 천재라면 무엇이든 그릴 수 있겠지만 자신은 천재가 아니므로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산을 소재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그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림에 대한 생각도 흥미로웠다. 누구나 설명할 수 있는 그림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 자기 삶의 방식대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그림. 그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전시장 벽에는 그의 말도 적혀 있었다.
"산은 추상의 빈 그릇일 수도 있다."
영상을 보고 다시 그림을 보니 처음과 달랐다.
그림에서 그의 시선이 보이고 삶이 보였다. 평생 하나의 화두를 붙잡고 그려온 그의 열정과 끈기와 의지를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졌다.
특히 작업실에서 사용했다는 의자와 이젤 앞에서 한참 머물렀다.
의자는 오랜 시간 한 사람이 앉았던 자리답게 닳아 있었다. 거대한 나무 이젤 곳곳에는 물감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들이 그의 땀방울처럼 보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저 의자에 앉아 보냈을까.
그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오랜 시간 생각했다고 한다. 무엇을 그릴지, 어떻게 표현할지, 저 의자에 앉아 캔버스를 바라보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이다.
전시장에는 화려하고 강렬한 그림이 많았다. 붉고 푸르고 노란 산들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내가 글을 쓰려고 고른 작품은 아주 단순한 그림이었다. 어두운 바탕 위에 청록빛 선으로 커다란 마름모가 그려져 있고 그 왼쪽에 초록색 삼각형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마름모꼴 초록 선 안의 넓은 어둠에서 그의 고뇌에 찬 시간이 보였다. 옆의 초록색 삼각형에서는 평생 산 하나를 화두로 삼았던 그의 세계가 떠올랐다.
문득 마름모의 선이 하나의 틀처럼 보였다.
의자와 이젤도 그랬다.
그는 작업실에서 한 의자에 앉아 이젤과 한 몸이 되어, 산이라는 하나의 화두를 붙잡고 살았다. 혹시 그것이 그를 한 곳에 가두는 감옥이 되진 않았을까.
아니면 오히려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며 자유로웠을까.
몸은 그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얼마나 많은 산을 넘나들었을까. 현실의 산은 한 곳에 서 있지만 그가 그린 지구는 빨갛기도 하고 파랗기도 하고 보라색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는 한 곳에 앉아 우주를 넘나드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감상을 마치고 우리는 정동길을 따라 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예약한 식당은 꽃과 식물로 장식되어 무척 예뻤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며 15분 동안 각자의 에세이를 썼다. 이어서 한 사람씩 자신이 고른 그림과 글을 소개했다.
같은 그림을 보았는데 마음에 남는 것이 모두 달랐다.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끌어와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있었다. 유영국이 말한 사람마다 자기 삶의 방식대로 다르게 보는 그림이 무엇인지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른 작품들은 어떻게 보았는지 더 듣고 싶었는데 시간이 다 되었다.
아쉬움이 남아 여진, 미옥 작가님과 덕수궁으로 향했다. 덕수궁 돈덕전에 가서 반화를 보고 다시 자리를 옮겨 2차의 시간을 가졌다.
비가 와서 운동화가 젖은 채로 돌아다녔지만 충분히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