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는 늘 움직인다.
하늘 끝까지 치솟을 것처럼 달려오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스르르 몸을 눕힌다. 허연 거품을 입에 문 채 손톱을 세우고 달려드는 악마였다가, 잠시 뒤에는 모래사장을 어루만지는 순한 아기 천사가 된다.
바다 안에 오래 있어 본 사람은 안다. 지금 눈앞의 파도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거센 현실이 밀려온다. 아무리 애써도 안 될 것 같고, 불운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마음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이 악몽에서 평생 빠져나오지 못할 것만 같다.
그럴 때 사람은 파도보다 먼저 두려움에 삼켜진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들을 머릿속에서 수없이 만들어 낸다. 망상은 또 다른 망상을 낳고, 젖은 솜처럼 몸과 마음이 무겁다. 한 걸음만 떼면 될 일을, 발끝조차 들지 못하게 만든다.
그럴수록 나는 바다를 떠올린다.
파도는 멈추라고 소리친다고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고 영원히 몰아치지도 않는다.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휩쓸리지 않을 만큼만 몸을 낮추고, 날씨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것.
신기하게도 시간이 조금 흐르면 바람이 먼저 잦아든다. 먹구름이 흩어지고, 물결은 다시 제 리듬을 찾는다. 문제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닌데, 견딜 수 있을 만큼 작아져 있다. 아니면 내가 그만큼 단단해져 있거나.
거센 파도를 여러 번 만난 사람은 바다와 힘겨루기를 하지 않는다. 파도가 높으면 물러설 줄 알고, 잔잔해지면 다시 노를 젓는다.
매일 목소리를 높이며 우리를 괴롭혔던 사람들은 어느새 자기들끼리 부딪히며 진흙탕 싸움을 하다 지쳐 간다. 내가 관여하지 않아도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그때마다 깨닫는다.
세상의 모든 파도에 뛰어들 필요는 없다는 것을.
높은 파도는 언젠가 반드시 낮아진다.
오늘도 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잔잔한 얼굴로 해변을 쓰다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