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 브라질 최악의 대가뭄과 1888년 에티오피아 가뭄과 전염병
브라질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1877~1878년 '대가뭄'과 에티오피아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1888~1892년의 '기푸 켄(Kifu Ken)'은 엘니뇨 남방진동(ENSO)과 각국의 정치슬롯적 대응, 노예제 폐지와 식민 제국주의 격퇴 등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사건입니다.
엘니뇨 남방진동(El Niño-Southern Oscillation, ENSO)은 적도 태평양의 무역풍이 약화되며, 서태평양에 축적되어 있던 따뜻한 해수 풀이 남미 연안인 동태평양으로 이동하면서 심해의 차갑고 영양 염류가 풍부한 해수의 용승을 억제합니다. 해수면 온도 상승은 단순한 해양 현상이 아닌 전 지구적인 현상으로 변모하여 어떤 곳에는 대홍수를, 다른 곳에는 치명적인 가뭄을 초래합니다.
1877~1878년에 발생한 엘니뇨는 지난 150년간 기록된 사건 중 가장 강력했던 '슈퍼 엘니뇨'입니다. 1870~1876년 길게 이어지던 라니냐 한랭기 직후에 강력한 엘니뇨로 급격히 바뀌면서 아시아 몬순 시스템과 남미, 아프리카 강수 시스템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전 세계가 가뭄으로 고통받던 1878년 남아프리카 서부 및 중앙부의 포트엘리자베스 인근 등지에서는 오히려 강수량이 평년 대비 75% 이상 증가하는 현상이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브라질 북동부 대가뭄(Grande Seca, 1877~1878)
브라질 북동부, 특히 세아라 주와 페르남부쿠 등지에서 가뭄 피해가 매우 컸습니다. 이 시기 농민들은 겨울철 단기적으로 내리는 강우에 의존하여 작물과 가축을 키워왔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발생한 엘니뇨는 세르탕 지역에 내려야 할 비를 완전히 없애버렸습니다. 당시 세르탕의 농업은 대지주 중심의 소작농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무분별한 방목과 화전 및 벌채로 토지의 상태가 굉장히 나쁜 상황이었습니다.
수자원 보존을 위한 인프라는 아예 없었고, 가난한 소작농은 장기 가뭄에 대비할 어떠한 방편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자 파종한 작물이 말라죽는 것을 시작으로 수백만 마리의 가축이 폐사하며 내륙 생태계 붕괴되었습니다.
기후 난민 발생과 참혹한 실상
식량과 물이 사라지자 내륙의 농민들은 생존을 위한 대규모 이주를 감행했습니다. 대가뭄 기간 동안 브라질 북동부 인구 약 80만 명 중 40~50만 명은 굶주림과 풍토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생존한 이들 중 약 12만 명은 아마존 강 유역으로, 6.8만 명은 상파울루를 비롯한 브라질 남부 등지로 목숨을 건 이주를 시작했습니다.
인구 과밀과 영양실조, 처참한 위생 상태는 전염병 창궐에 불을 지폈고 1878년 하반기, 천연두 바이러스가 브라질 북동부에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수백 명씩 사망하며 당시 병원들은 이미 포화 상태였고, 시내 곳곳에는 부패해 가는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카레캉가 지역 늪지대에 집단 매장된 사례가 100년이 넘게 잊혀 있다가 1994년 공사 중 유골 더미가 발견되며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 당시, 브라질 제국 정부와 부유한 엘리트 계층은 북동부 국민들이 굶어 죽는 것을 막겠다고 선언했으나 사실상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외부에서 구호 자금이 들어오더라도 정치적 편향에 따라 배분되거나 부패한 관료들의 주머니로 들어갔습니다. 심지어 시골에서 몰려든 난민들을 불결한 전염병의 매개체이자 도시 미관을 해치는 위협으로 간주했습니다.
이에 브라질 정부는 이들의 도시 진입을 막기 위해 거대한 난민 수용소를 급조했으나 사람들은 이를 '정부의 구유' 혹은 '집중수용소' 등으로 불렀습니다. 가축을 가두는 구유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10만 명 이상의 피난민은 이 철조망 안에 갇혀 열악한 식량 배급과 강제 노역, 질병으로 죽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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