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뒤의 장면
나는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다. 인생에서 분에 넘치게 좋은 친구들과의 우정을 누렸다. 내향적 성격 때문에 친구 수가 많지는 않고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가끔 보더라도 마음의 경계를 풀고 소통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 행복하다.
외국에서 사는 친구들은 만나는 빈도가 더 낮다. 그 친구들이 몇 년에 한 번 들어와서 만날 때도 있지만 시간의 갭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금방 대화에 몰입이 된다. 올해는 여러 친구들이 한국에 왔었고 한국에 있었어도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사람들과도 다시 연결이 되어 만나게 되었다. 모두가 예술을 사랑하고 세속적인 가치만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이라 만나고 들어오면 영혼이 맑아진 느낌이 든다.
좋은 전시나 풍경을 보면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든다. 이야기만 해도 하루가 금방 가고, 밤새워서 이야기해도 모자라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좋은 장소에 같이 가서 좋은 작품을 같이 보고 싶다. 요즘 대한민국은 문화 강국이고 예술가들도 수준이 세계적이어서 볼거리가 풍부하다. 각자 어디에서 와도 시간이 비슷하게 걸리는 약속 장소를 생각해 보면 도심이 적격이다. 고궁도 있고 미술관도 많은 광화문 근처나 시청 근처로 주로 약속을 잡다 보니 같은 전시를 여러 번 본 적도 많다. 나이 많은 것의 가장 큰 장점은 문화 행사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궁 입장부터 미술관 관람까지 나이만 증명하면 프리패스다. 하하. 어떤 전시는 나라 차원에서 모든 사람에게 무료로 개방하기도 한다. 좋은 나라다.
덕수궁 근처는 고궁 안도 둘러볼 수 있고 돌담길도 예쁘고 정동길까지 이어지는 산바카라길도 좋다. 또한 덕수궁 미술관과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도 항상 좋은 전시를 한다. 최근의 전시는 유영국의 <산은 내 안에 있다>와 이대원의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였다. 우연히도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같은 스승 아래서 수학한 화가들인데 서로 다른 개성으로 우리를 감동시킨다. 여러 포인트가 있겠으나 유영국은 주제가 ‘산’이고 후기로 갈수록 단순한 모양의 추상과 색의 대비로 내면적으로 완성된 마음을 보는 듯했다. 이대원도 긴 시간 변화를 보여주지만 농원(과수원)의 과실수를 표현한 대작에서 보여주는 화려한 색감과 상상력으로 관람객에게 그림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1차적으로는 남편과 관람을 하는 편이다. 그리고 친구와 만나게 되면 다시 가서 본다. 작품에 대한 파악을 대충 한 경우라 특히 좋았던 작품을 다시 한번 자세히 본다. 그리고 그리웠던 친구의 옆모습과 뒷모습도 몰래 실컷 본다. 첫 번째 관람에서는 그림을 사진 찍었다면 N차 관람에서는 그림을 보는 친구를 찍는다. 작품이 있고, 작품을 보는 친구가 있고, 그 뒤에 그림을 보는 친구를 보는 내가 있다. 겹겹의 모습을 상상하면 너무나 정겹다.
유난히 친구의 사진을 예쁘게 찍어주는 그녀의 남편이 있다. 그 사진을 보면 그가 친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보인다. 사진을 볼 때 나는 그 사진을 찍는 사람까지 보인다.
영화를 보아도 처음에는 내용에 몰입하고, 다음번에 다시 볼때는 그 장면을 찍는 감독의 의도까지 보려고 한다. 감동적인 영화 <애프터썬>에서도 감독이 된 딸은 나이가 들어 아빠가 죽은 나이와 같아지는 시점에 과거 여행 동영상을 확인하며 어릴 때는 몰랐던 아빠의 카메라 뒤의 모습과 표정을 상상한다. 그리고 아빠를 이해한다.
그림을 볼 때도 화가가 대상을 오래 보고 사랑하고 시간을 초월하는 특징을 잡아 작품을 완성한 것이 느껴진다. 그림은 사진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상대를 바라보아야 하니 찰나의 인상이 아닌 시간을 관통하는 이미지를 찾아내서 그린다. 그래서 어떤 그림은 초점도 여러 개인 경우도 있고 여러 계절이 섞이기도 한다. 나뭇가지나 돌담의 색도 여러 순간의 색이 섞인다.
무엇이든 오래 봐야 이해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다 그렇다. 모두 증발하는 순간을 붙잡는 행위이지만 그 뒤에는 따뜻한 시선이 있다. 이제 그것까지 보이는 나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