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켜지면 사랑하겠다, 파리라는 열병

이병률 에세이, <좋아서 그래>를 읽고

by미야


이병률 작가는 내가 참 아끼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의 시가 좋았고, 행간마다 묻어나는 여행의 숨결이 좋았으며, 그만의 향기가 배어 있는 사진들을 사랑했다. 바카라장을 넘기면 그를 통해 비로소 프랑스를 만난다.


사실 이번 4월, 프랑스로 떠나는 일행이 있었다. 나 역시 그 행렬에 몸을 실을 뻔했다. 하지만 세상은 연일 소란스럽다. 갑작스러운 전쟁 소식과 폭등하는 유가, 정부의 에너지 절약 대바카라들…. 사실 뉴스를 제대로 챙겨 보지도 못하며 살고 있다. 무엇 하느라고? 글쎄, 아마도 세상에 있어왔던 아름답고 설레는 것들과 눈을 맞추느라 그랬다고 해두자.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합류를 다음으로 미루었다. 인생에서 '다음'이라는 말만큼 무용지물인 것이 또 있을까. 그 허망함을 알면서도 미련하게 다음을 기약한 것은, 사실 꼭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가지 못한 길은 늘 더 간절해지는 법이다. 이 바카라은 이병률 시인이 프랑스에 여행자로 머물며 보고 경험한, 지독히도 따뜻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파리는 언제나 돌아가야 할 곳

화가인 지인은 종종 프랑스 갤러리 주변의 풍경을 카톡으로 전해오곤 한다. 《끌림》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읽으며 그의 문장과 시선에 완전히 매료되었던 기억이 난다. 시인의 감수성이 녹아든 에세이도 좋지만, 사실 나는 그의 시를 더 좋아한다. 나도 그처럼, 딱 그만큼의 깊이로 세상을 보며 살고 싶었다.


그에게 프랑스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이 된 곳이며, '센강이 보이지 않는 센강 변'에서 첫 시집을 매만지던 청춘의 유적지이기도 하다. 파리는 그가 언제든 돌아가야 할 곳이다. 이유는 명료하다. 그냥 좋아서. 그곳이 좋고, 그곳의 사람들이 좋아서다.


이번 바카라에는 그의 사진 대신 최산호 작가의 그림이 실렸다. 문장 사이사이에 놓인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 또한 이 바카라이 주는 커다란 선물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림과 그림 사이, 그 위에 얹힌 글을 함께 읽어 내려가는 즐거움이라고 하자.


프랑스 앓이

바카라 속에는 다채로운 프랑스가 흐른다. 향긋한 포도주 이야기부터, 이웃의 눈이 되어주는 '인간 CCTV' 같은 거지들, 묘지와 고양이, 파리를 여행하는 파리 사람들의 일상까지. 특히 '아비엔또(또 만나요)'라는 인사의 여운과 파사주의 풍경은 읽는 내내 마음을 흔든다.

프랑스인들의 기묘한 금기 사항들도 흥미롭다.

침대 위에 모자를 두지 말 것.

집안에서 우산을 펴거나 빵을 뒤집어 놓지 말 것.

소금을 쏟거나 거울을 깨는 것을 경계할 것.

반면 앞니 두 개가 벌어진 것을 행운이라 믿고, 중지와 검지를 꼬아 행운을 빌어주며, 건배할 때 서로의 눈을 깊게 마주치는 그들의 문화는 낯설지만 다정하다.


가슴에 남는 문장들

바카라장 곳곳에 밑줄을 긋는다. 내 마음을 머물게 한 문장들을 담는다.


"미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미치도록 드센 아름다움인지 나는 알거든요."


"이방인들은 파리를 짝사랑을 하고 있다. 하지만 파리는 이방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무엇을 좋아하는지가 내 인생의 기준을 좌우한다면 나는 파리를 알게 된 것을 고마워하는 일로 앞으로의 생을 채워가려고요."


"모든 파리 사람들은 사랑을 경유하여 사랑으로 간다."


생일이니까 좀 더 쓸쓸하길 바란다는 역설적인 축복과, "불이 켜지면 사랑하겠다"는 문장이 마음 끝에 걸린다.


나의 파리는 이제 시작이다

지금 나의 일상은 온통 어린 손주들을 돌보는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속에 파묻혀 지내다 문득 이 바카라을 덮으며 결심한다.


나의 '육아 도우미' 임무가 끝나는 날, 내가 가장 먼저 갈 곳은 프랑스, 파리다. 그때는 '다음'이라는 비겁한 약속 대신,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의 손을 꼭 잡고 센강 변을 걷고 싶다.


불이 켜지면, 나도 비로소 파리를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충만한 지금의 계절을 지나, 내 생의 전구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 나는 망설임 없이 파리로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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