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란 말에서는 봄바람 실려 오는 햇풀 냄새가 난다

김용택의 《연애시집》 을 읽고

by미야

스마트폰 화면 속 오디오북 버튼을 누르자, 나지막한 낭독 소리가 귓가를 감쌌다. 밀리의 서재에서 뜻밖에 다시 만난 김용택 시인의 《연애시집》(2002)이었다. 귀로 들려오는 시인의 숨결에 끌려, 스마트폰 화면 속 문장들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시집의 첫 장을 밝히는 시인의 자서(自序)에서부터 봄의 설렘과 여름으로 가는 길목, 가을이 깊어가는 소리, 그리고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한 인간의 성실하고 진실한 일상이 오롯이 묻어났다.


"작년 어느 가을날 갑자기 시가 쓰여졌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시가 되었다. 그럴 때가 있다. 그렇게 보이는 것들이 다 내 말이 되어줄 때가 있다. (...) 연애란 말에서는 봄바람에 실려오는 햇풀 냄새가 난다. 연애라는 말을 떠올린 순간, 세상 어느 곳에서 상큼한 머릿결 냄새가 이는 것 같다." — 김용택, 《연애시집》 자서 중에서


갑자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시가 되고 내 말이 되어주었다는 시인의 고백. 10년이 넘게 간직하던 시들에게 작고 멋들어진 '집'을 지어주고 비워진 마음으로 "봄 지난 산같이 한가롭고 싶다"던 시인은, 마침내 아내와 함께 강천사 도랑물에 맨발을 담그고 웃던 그 다정한 행복의 순간에 이 시집을 바친다.



자연에서 시를 받아 적으려면 적어도 자연과 깊이 벗할 수 있어야 한다. 밭을 메다가도 바람 끝에 매화 향이 스치면 선뜻 호미를 던져두고 꽃 구경을 떠날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이 있어야만 세상의 모든 풍경이 나에게 다가와 시가 되어주는 법이다. 눈앞의 규율과 팍팍한 일상에만 매여 틈을 내지 못하는 이에게는, 자연이 곁에서 수없이 아름다운 문장을 읊어주어도 단 한 구절조차 받아 적지 못한다.



그의 시를 읽으며 잊고 지내던 유년의 풍경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어두운 헛간 무 구덩이에서 살짝 언 무를 꺼내어 동무들과 입술이 붉어지도록 베어 물며 키득거리던 그 겨울밤의 새하얀 길들. 꽃이 피면 피어서 설레고, 꽃이 지면 지대로 서럽고, 여름이 와 산천이 푸르게 짙어지면 그 역시 축복으로 받아들이던 시절. 가을이 오는 것을 서러워 않고 겨울의 추위도 마다하지 않으며, 흘러가는 것들을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던 순박했던 마음이 선연히 되살아났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본다. 정해진 규칙 안에서 아이들이 궤적을 벗어나지 않도록 파수꾼처럼 제자리를 지키며 살아온 성실한 삶이었다. 그러나 계절이 흘러 한 갑자를 돌아선 지금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강물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삶의 진정한 순리라는 것을. 억지를 부린다고 안 될 일이 되는 것도 아니며, 최선을 다하되 그 결과는 온전히 나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은 나 혼자의 노력이 아니라 세상 만물이 함께 어우러져 건넨 고마운 선물이었다.



시인은 시집 속에서 가만히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세월이 가면 / 길가에 피어나는 꽃따라 / 나도 피어나고 / 바람이 불면 / 바람에 흔들릴라요 세월이 가면 / 길가에 지는 꽃 따라 / 나도 질라요 / 강물은 흐르고 / 물처럼 가버린 / 그 흔한 세월 내 지나온 자리 / 뒤돌아다보면 / 고운 바람결에 / 꽃 피고 지는 / 아름다운 강 길에서 / 많이도 살았다 많이도 살았어 바람에 흔들리며 / 강물이 모르게 가만히 / 강물에 떨어져 / 나는 갈라요 — 〈세월이 가면〉 전문


사물과 자연을 가만히,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는 따뜻한 심성이 있었기에 시인은 세상 만물과 연애하듯 시를 써 내려갈 수 있었으리라.



뜨거운 여름을 뒤로하고 이제 곧 다가올 가을을 맞이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이 아닐까. 팍팍한 일상 속에서도 시인과 같은 여유와 낭만으로 삶에 자그마한 '틈'을 내어주는 것. 그 작은 여백이야말로 지친 우리 삶을 부드럽게 돌려주는 윤활유이자, 조급하고 불안해지는 마음에 퐁퐁 솟아나는 샘물 같은 충만함일 것이다.



스마트폰 화면을 닫는 나는, 해가 지면 날마다 나무에게로, 강에게로, 산에게로 달려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시인과 함께 한나절 잘 놀다 온 기분이다. 뜨거웠던 계절을 견뎌낸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어느 가을날 갑자기 시가 쓰여지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온통 시가 되는 환한 날'이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저 멀리서 오고 있는 가을을 지그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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