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신드리'를 생각하며 소망한 것

영화 <세상 참 예쁜 오드리>를 보고 떠올린 사람

by미야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드리 헵번' 하면 사람들은 흔히 세기의 연인이라 불리던 그녀의 눈부신 미모와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나 <티파니에서 아침을> 속 화려했던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오드리 헵번의 진짜 아름다움은 은막 뒤의 삶에 있다. 영화계를 은퇴한 후, 그녀는 화려한 조명 대신 아프리카의 메마른 땅을 선택했다. 주름진 얼굴에 수척해진 몸으로 굶주린 아이들을 다정하게 품에 안고 웃어주던 그녀의 모습. "손이 두 개인 이유는 하나는 자신을 돕기 위해서, 하나는 다른 이를 돕기 위해서"라던 고결한 울림은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



그 따뜻하고 고운 이름 때문이었을까. 유난히 뜨겁던 여름날,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와 켜 놓은 넷플릭스 화면에서 눈에 띄었다. 영화 <세상 참 예쁜 오드리>. 홀린 듯 클릭하게 만든 그 영화 속에서, 뜻밖에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건 가슴을 울리는 OST 두 곡이었다.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엄마의 이야기이지만, 영화는 과장된 눈물이나 인위적인 감동을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가족이 직면하는 고단함을 담담하고 현실적인 시선으로 조용히 따라간다.



영화는 입양으로 묶인 특별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 엄마 미연(김정난 분)을 정성껏 모시는 아들 기훈(박지훈 분)은 알고 보니 입양된 아들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들을 친자식 이상으로 온 마음을 다해 거둔 엄마 미연. 하지만 입양 과정에서 보여준 엄마의 그 지극한 양육 태도는, 반대로 친딸 지은(김보영 분)에게 서운함과 깊은 결핍을 남기며 집을 떠나게 만든다.



엄마 미연이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 속에서, 아들 기훈은 묵묵히 그 곁을 지킨다. 이제 네 인생을 살라는 엄마의 말에 기훈은 말한다.



"엄마가 내 엄마 하겠다고 왔을 때 좋았어. 행복했어. 여기가 내 방이라고 침대랑 바카라상 준비해 놓고, 내가 무슨 색 좋아하는지 몰라 엄마 취향대로 샀다고 말하던 엄마가 아직도 생생해. 그래서 나는 여기가 좋아. 나 포기한 거 없어. 내가 있고 싶어서 있는 거니까."


피로 엮이지 않아도 피보다 더 깊게 서로를 온전히 거두고 품어주는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엄마가 밤마다 방 불을 켜 두고 자던 이유가 "집을 나간 자식이 돌아올 때 환한 집으로 들어오라고 그랬다" 는 기훈의 말에 지은은 마음의 빗장을 푼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다



영화 후반부, 알츠하이머병을 앓던 엄마 미연은 급성 백혈병에 걸린 딸 지은에게 골수를 이식해 주기 위해 빗속을 걸어 병원으로 향한다. 점점 기억을 잃고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잊어가는 잔인한 병마 속에서, 미연은 길을 잃지 않으려 주문처럼 한 문장을 반복해서 외운다.



"내 이름은 오미연, 딸 이름은 강지..."


기억이 모두 사라지는 순간에도 자식을 살리겠다는 마음 하나로 붙잡고 있던 그 고단한 대사. "기억은 사라져도 사랑은 끝내 남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미연의 빗속 장면은 관객도 함께 그녀의 여정에 동행하며 무사히 여정의 끝에 다다르기를 기도하게 만든다.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가기 위해 예쁘게 옷을 입고 방을 나선 엄마를 보며 기훈은 오드리 헵번보다 더 예쁘다고 말한다.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는 엄마 앞에서 지은은 마침내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아픔을 가만히 꺼내 놓는다.



"엄마, 사실 나 힘들어. 내가 꿈꾸던 건데도 힘들어. 아빠까지 그렇게 보냈는데 내 선택이라 포기할 수도 없어."


소매로 딸의 눈물을 닦아주는 엄마에게 지은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으며 오열한다.



"어릴 때 나도 좀 이뻐해주지, 왜 아프고 그래. 나도 엄마한테 사랑스러운 자식이고 싶었어, 항상."


그러자 알츠하이머병으로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엄마는 무심한 듯 말한다.



"너 착해. 나 아이스크림 사줬어. 착해, 엄청 착해."


자식의 서운함도, 죄바카라감도 그저 "착하다" 한마디로 품어주는 엄마의 무조건적인 사랑. 그 먹먹한 품 안에서 비로소 흐르던 OST, 김서현의 <미안해>는 이 땅의 모든 딸들이 가슴으로 부르는 슬픈 고백이 된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모질게 굴던 그 순간의 나를 바라보던 너 웃어주던 너 / 끝까지 난 몰랐어 이제야 그걸 알아서 / 모든 걸 잃은 사람처럼 헤매고 널 불러본다 / 미안해 정말 미안해"


노랫말을 들으며 지난날 엄한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늘 만만한 엄마에게 화풀이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목이 메었다. 참기만 하던 엄마에게 쏘아붙였던 가시 돋친 말들. 세월이 흘러 내 딸아이의 투정을 받으며 비로소 '그때의 내가 엄마를 참 아프게 했구나' 깨닫는다. 내가 "엄마, 미안해..." 하고 고백할 때면, 엄마는 한사코 손사래를 친다.



엄마의 다정함을 닮은 '홍드리'로 살아가길 소망하며



나는 비로소 서로 다른 삶을 살았던 세 명의 '오드리'를 온전히 포개어 보게 된다. 첫째는 서두에 떠올렸던 세기의 연인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다. 그녀는 빼어난 미모로 세계의 사랑을 받았고, 은퇴 후에는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따뜻하게 품어 안으며 평생을 봉사로 헌신했다.



둘째는 영화 속 엄마 오드리(미연)다. 피가 섞이지 않은 입양 아들을 친자식보다 더 정성껏 거두어 키워내고, 자신을 오해하던 친딸을 위해 흐려지는 기억 속에서도 골수를 내어주며 자식을 살리려 사투를 벌인 엄마다.



그리고 셋째는 요양원에 누워 계신 나의 엄마 '두곡댁', '신드리'다. 평생 밭고랑에 엎드려 억척 같이 푸성귀를 키워 오남매를 건사하던 우리 엄마. 제 살림도 팍팍하던 시절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포기 하려던 내 동무의 입학금을 선뜻 내어주던 다정한 품을 지닌 엄마다. 몇 해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양원에 누워서야 엄마는 비로소 일을 내려놓았고, 햇볕을 쐬지 않으니 역설적이게도 엄마의 피부는 비로소 뽀얘지고 손은 보들보들해졌다.



오드리 헵번이 원래의 빼어난 미모로 세기의 사랑을 받았고, 영화 <세상 참 예쁜 오드리> 속 오드리가 딸이 예쁘게 입혀준 옷을 입고 환하게 웃었다면, 우리 엄마 '신드리'는 요양원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뽀얀 제 살결을 찾아 예뻐졌다.



영화 속 오드리가 딸을 살려내고, 오드리 헵번이 남의 아이들을 구했다면, 우리 엄마 '신드리'는 오남매를 키워내어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로 세상에 뿌리내리게 해주었다. 한 번도 제 이름으로 맘껏 살아보지 못했지만, 세상을 향해 가장 위대한 결실과 베풂을 내어준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나의 '신드리'다.



영화의 여운을 더욱 길게 남기는 또 하나의 OST, 전하연의 <내 이름>. 노래 가사처럼 세월이 흘러 이름이라는 꽃이 시들어가고 지나온 날들이 꿈처럼 느껴질 때가 온다.



"이름 꽃이던 내 이름 어느새 붉게 시들어가고… 세월아 아프다 하지 말아라, 내 이름 꿈 같은 행복 살고 떠난다."


대구의 타오르는 무더위 속. 영화 속 오드리,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의 '신드리' 우리 엄마를 떠올리며 지쳐있던 마음이 따뜻하게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세상이 말하는 화려함은 세월 앞에 빛이 바래지만, 자식을 위해 그리고 타인을 위해 평생 자신을 태워 불을 밝히던 엄마의 마음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다.



창밖 대왕참나무는 뜨거운 햇볕을 막아 그늘을 만들고 있는 시간, 내 마음은 한없이 평온했다. 나 역시 내 엄마의 그 깊은 다정함을 닮아, 내 아이들에게 '세상 참 예쁜 홍드리' 의 따뜻한 품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해 보는 여름날이다.


https://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325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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