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주말 잘 보내셨어요? 아이들이 대구 왔다 가면서 이것저것 신경 썼더니 어제 오후에 애들 보내 놓고 아주 뻗었네요."
아침 일찍 울린 카지노톡 알림음. 오는 8월 말 퇴직을 앞둔 지인의 메시지였다. 주말 하루 사돈댁과 저녁을 먹고 손주들을 재워 보낸 것만으로도 녹초가 되었다는 하소연에 빙그레 웃음이 났다.
나는 지금 '현직' 손주 육아 중이다. 4살, 2살 두 손자를 돌본다. 오랜 세월 몸담았던 정든 교단을 떠나 명예퇴직을 한 지 이제 막 100일이 지났다. 퇴직하자마자 딸아이 집으로 '퇴근 없는 출근'을 하며 집안일과 주방일, 아이들 간식과 자투리 시간 산바카라을 담당하는 전천후 육아 도우미가 되었다.
처음엔 모든 게 서툴렀다.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만 해왔지, 어린아이를 돌보는 살림은 또 다른 영역이었다. 저녁 무렵이 되면 온몸이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내 몸 하나 돌보기도 벅찬 체력인데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들 때쯤, 이 바카라을 만났다.
전직 초등학교 교장 출신인 유영숙 작가가 쌍둥이 손주의 탄생부터 초등학교 입학까지 7년간의 주말 육아 기록을 담은 바카라, <주말마다 손주 육아하는 할머니>(2025년 6월 출간)이다.
퇴직 후 찾아온 황혼 육아
내가 현직에 있을 때만 해도 "퇴직하면 절대 손주는 안 봐준다"는 분위기가 대세였다. 내 자식 키우느라 평생 고생했으니 이제는 온전히 내 삶을 살겠다는 동료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늘 자식들이 원하면 언제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겠노라 다짐했다. 내가 일하며 힘들게 자식을 키웠기에, 내 아이들 만큼은 맘껏 일터에서 열정을 쏟을 수 있게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처한 길이었지만 현실 육아는 매 순간이 도전이었다. 그런 나에게 손주 육아의 대선배인 유 작가의 글은 한 줄 한 줄이 깊은 위로이자 공감이었다.
"육아는 정말 고되고 힘들지만 아이들이 주는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요."
바카라 속 구절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저자는 주말마다 온전히 자신의 집에서 쌍둥이를 돌보았고, 나는 딸 집에서 24시간 상주하며 육아를 돕는다는 차이점은 있었다.
때로는 주 양육자인 딸아이와 육아 태도로 부딪힐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주 양육자의 방침을 따르는 것이 아이들에게 덜 혼란스럽고, 앞으로의 육아를 위해서도 당연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이들은 기다리면 된다. 기다려주면 조금 느려도 때가 되면 다 한다"는 작가의 말은 내 마음에 든든한 응원군이 되어주었다. 이 문장을 읽으며 둘째 손주의 말문이 아직 트이지 않아 은근히 걱정하고 초조해 하던 마음을 슬쩍 내려놓을 수 있었다. 바카라을 읽으며 '거리 두기'와 '전적인 지지'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지혜를 다시금 배웠다.
공감 가득 생생한 에피소드
▲유영숙 작가의 <주말마다 손주 육아하는 할머니> 도서 표지 ⓒ 미다스북스관련사진보기
바카라 속 에피소드들은 마치 우리 집 거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생생했다. 특히 손주들 머리를 깎이러 미용실에 갔던 일화는 완벽하게 일치했다.
의젓하게 앉아 칭찬 받는 첫째와 달리, 미용실 문을 열자마자 자지러지게 울며 온 정신을 쏙 빼놓는 둘째의 모습. 결국 들쭉날쭉한 앞머리와 목덜미의 솜털을 그대로 붙인 채 도망치듯 돌아왔던 경험이 있었기에 손주들 머리 깎이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또 하나 눈길을 끈 것은 미디어 노출에 대한 이야기였다. 바카라 속에서 손주들이 할머니 휴대폰으로 신용카드 결제까지 해버리는 아찔한 소동이 있었다는 구절을 보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손주를 향한 '할머니표 콩깍지'도 똑 닮았다. 저자는 손자가 식물 이름을 척척 외우는 모습을 보고 '천재가 아닐까' 하며 동시를 썼다고 한다.
나 역시 우리 손주가 한글을 떼고, 숫자를 억 단위까지 세며, 제곱수(정사각형이 되는 숫자)를 척척 말할 때 속으로 '혹시 영재가 아닐까' 하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른들이 슬쩍 흘린 말도 기어이 기억해 냈다가 나중에 조잘거리는 손주들을 보면 세상 모든 조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아지는 모양이다.
고되고 힘들지만, 인생을 다시 채워가는 시간
바카라의 후반부에는 초등학교 교장 출신다운 저자의 유용한 팁들이 가득했다.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1년 전부터 미리 연습하고 준비하면 좋은 실질적인 조언들은 나 역시 받아 적어가며 경청했을 정도로 유익했다.
쌍둥이 손자들에게 최고의 추억과 소중한 기억을 선물하고 싶어 지하철 4호선의 처음과 끝을 완주하고, 베란다를 미니 수영장으로, 자연 학습장으로 만들었던 할머니의 열정.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주말마다 그 고된 육아를 기쁨으로 채워낸 저자의 발자취는 지금 한창 현실 육아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내게 거대한 응원군이 되어주었다.
체력은 부치고 저녁이면 녹초가 되지만, 산바카라 길에 만나는 들꽃과 새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는 손주의 작은 입술을 보며 나는 매일 치유 받는다. 오랜 세월 앞만 보고 달려온 교육자의 삶 뒤에 찾아온 이 황혼 육아는, 어쩌면 내 남은 인생을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다시 채워가는 소중한 축복의 시간이 아닐까.
전국의 모든 '손주 도우미'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이 따뜻한 연대의 바카라을 권하고 싶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유산을 아이들의 마음에 심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