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상 중 찾아오는 주말 오후, 손주들이 새근새근 낮잠에 든 시간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고요한 쉼의 시간이다. 주말 오전 시간 동네 한바퀴를 돌면서 식물과도 인사를 나누고 새들과도 인사를 하며 산바카라을 하고, 편의점에서 시원한 우유도 한잔씩 마시며 간식 타임도 즐긴 후 맞이하는 이 고요한 틈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달콤하다.
이 소중한 시간에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넷플릭스를 켰다. 얼마 전 전남편과 현남편의 기막힌 공조를 다룬 신작 코미디 <남편들>을 무척 흥미롭게 보았기에, 같은 메가폰을 잡았던 박규태 감독의 전작 영화 <육사오>(2022)를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되었다.
고경표, 이이경, 음문석 등 개성 넘치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이 영화의 제목 '육사오'는 '1부터 45까지의 숫자 중 6개를 맞추는 복권(로또)'을 뜻하는 북한식 은어이다. 영화는 이 로또 한 장을 둘러싸고 남북 군인들이 벌이는 유쾌한 쟁탈전을 담고 있다.
이야기는 남한의 박천우 병장(고경표 분)이 우연히 주운 로또 한 장이 1등 57억 원에 당첨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야속한 바람은 당첨 복권을 DMZ(비무장지대)를 넘어 북으로 날려버린다. 밤마다 복권을 찾아 목숨을 걸고 DMZ를 드나들던 천우는 결국 이를 주운 북한의 리용호 하사(이이경 분)와 대면하게 되고, 영화는 '공동로또구역 JSA'에서 남북한 군사들이 상봉하는 설정으로 이어진다. 57억이라는 거액의 당첨금을 안전하게 수령하고 나누기 위해 남북 군인들은 머리를 맞대고 '합의서'까지 작성하며 급기야 서로의 병사를 한 명씩 맞교환하는 대담한 작전을 펼친다.
코믹한 영화이지만, 영화 속 인물들이 57억 원의 당첨금에 거는 소박한 꿈들은 가슴 한구석을 짠하게 만든다. 자기 농장을 가져 젖소들에게 '산휴 휴가'를 주고 싶다는 천우, 딸의 피아노와 어머니의 요양병원비가 필요한 남한의 강은표 대위(음문석 분), 고생하는 부모님과 가수가 꿈인 동생을 돕고 싶은 북한의 리용호 하사, 그리고 부모님께 스위스제 틀니를 해드리고 싶다는 방철진 상병(김민호 분)까지. 남과 북이라는 거대한 이념의 장벽 아래에서도, 그들이 바라는 행복의 모양은 결국 가족과 평범한 일상을 향해 있었다. 철바카라을 사이에 두고 총을 겨눈 채 서로를 비난하던 이들이 돈이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매개체를 통해 도리어 서로의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과정이 퍽 역설적이면서도 따뜻했다.
설정이나 서사가 아주 참신한 편은 아니었고, 멧돼지 CG나 군 고증 등 옥에 티도 눈에 띄지만, 이 영화는 주말 한나절을 "허허허" 웃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상황이 주는 순수한 슬랩스틱과 재치 있는 대사로만 승부하는 솜씨가 돋보였다. 특히 영화를 보는 내내 유독 마음을 붙잡았던 몇 가지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었다.
동물과 인간의 존엄을 생각하게 한 '젖소의 산휴 휴가'
첫 번째는 박천우 병장이 꿈꾸는 농장 이야기였다. 그는 젖소의 휴식기를 보장하는 농장을 운영하고 싶다고 말한다.
우리가 무심코 마시는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 젖소는 끊임없이 출산을 반복해야만 젖이 분비된다. 소의 건강과 다음 출산을 위해 반드시 휴식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 코미디 영화를 통해 새삼스럽게 배우게 되었다. 왜 채식을 하는 이들이 동물 착취와 학대에 반대하며 일반 우유를 거부하는지 그 이유가 대번에 이해가 갔다. 새끼를 낳자마자 어미에게서 떼어놓여 울부짖는 어미 소와, 정작 어미 젖을 먹지 못하고 고기용이나 또 다른 젖소로 길러지는 송아지들의 삶. 코미디 영화의 짧은 대사가 던진 뜻밖의 메시지는 인간 중심의 이기적인 소비를 돌아보게 했다.
주체적이고 당당한 여성 캐릭터의 매력
두 번째는 대남방송을 담당하는 북한의 리연희 소위(박세완 분)가 보여준 당찬 매력이다. 그녀는 선물 공세로 자신을 성희롱하려는 상사에게 망설임 없이 '쌍기싸대기'를 날리며 단숨에 제압해 버린다. 군대라는 지극히 수직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조직 안에서, 그것도 북한이라는 폐쇄적인 슬롯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불의에 굴하지 않는 모습이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또한, 오빠가 박천우와의 관계를 따지며 멱살을 잡을 때도 "당사자가 가만히 있는데 왜 난리냐"라며 자신의 주체성을 단호하게 강조한다. 누군가의 누이나 보호 대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부조리한 상황에 침묵하지 않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스스로 지켜내는 당당하고 독립적인 여성의 모습은 극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기발한 웃음을 자아낸 남북 신분 맞교환 소동극
더불어 영화의 중반부, 신분을 바꾸어 남한 군부대에 투입된 북한의 리용호 하사가 벌이는 에피소드는 숨이 넘어갈 만큼 배를 잡게 만들었다. 지뢰 안전핀을 밟은 동료를 구하려다 졸지에 '참군인'으로 오해받은 그는 대대장 앞에서 뜻밖의 독일어 테스트를 받게 된다.
독일어라곤 옛 영화 <특전 U보트>에서 본 대사밖에 없던 그가 "연료를 허벌나게 낭비하고 있군!", "저 망할 놈의 달!" 같은 엉뚱한 대사를 비장하게 내뱉고, 이를 눈치챈 강은표 대위가 "조국을 지킬 기회는 오직 한 번뿐입니다"라며 눈물겨운 감동 스토리로 둔갑시켜 통역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판타지 같은 설정이지만,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영리하게 비튼 감독의 연출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독차지' 대신 '나눔'을 택한 해피엔딩
마지막으로 영화의 결말이다. 남북의 병사들은 우여곡절 끝에 획득한 당첨금을 두고 뜻하지 않은 위기를 맞이한다. 박천우가 가지고 있던 빨간 스카프에서 새끼 멧돼지의 냄새를 맡은 어미 멧돼지가 공동급수구역에 나타나 돈 가방을 통째로 들고 도망쳐 버린 것이다. 눈앞에서 57억이 날아가는 허망한 순간이었다.
모두가 절망하려던 순간, 서울에서 어렵게 돈을 찾아오는 과정에서 변태로 오인받는 수모까지 겪었던 김만철 상병(곽동연 분)이 자신의 몸 구석구석 숨겨두었던 40만 달러의 돈다발을 주저 없이 꺼내어 놓는다. 가방에 다 담지 못해 온몸에 닥치는 대로 집어넣었던 돈이었다.
보통의 영화라면 누군가 돈을 일부 빼돌려 몰래 자기만 가지려다가 파국을 맞이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만철은 미련 없이 그 돈을 모두 내어 놓았고, 남북의 군인들은 그것을 공평하게 나누어 가지며 훈훈한 작별을 고한다. 탐욕 대신 신뢰를, 독차지 대신 나눔을 택한 이 해피엔딩이야말로 분단의 아픔을 지닌 우리가 꿈꾸는 가장 평화적인 해결 방식이 아닐까 싶었다. 비록 애초에 꿈꾸던 거액은 아니었을지라도, 서로를 믿고 나눈 소박한 당첨금이야말로 그들의 삶을 진짜 1등으로 만들어줄 귀한 씨앗이 될 것이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통일이 되면 만날 수 있을까?" (박천우) "통일이 뭐 별거가,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게 그거이 통일이디." (리용호)
티격태격 정을 쌓아온 남북 병사들이 헤어지며 나누던 대사가 긴 여운으로 남는다. 거창한 정치적 구호나 이념의 대립 대신, 그저 사람과 사람이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것 자체가 평화의 시작임을 영화는 말한다. 맑은 웃음과 뜻밖의 따스함을 채워 넣은 영화 <육사오>는 주말의 피로를 날려주기에 충분했다.
어느덧 낮잠에서 깨어나 거실로 꼬물거리며 나오는 손주들을 품에 안으며, 영화 속 대사처럼 그저 '보고 싶을 때 언제든 서로를 볼 수 있는' 그런 당연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우리 아이들에게 찾아오기를 조용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