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갑판에서 뛰어내릴 용기

by김상범

증권사 강당에서 강연을 하던 L씨가 잠시 말을 멈춘다. 청중석에는 은퇴를 앞둔 직원 백여 명이 앉아 있다. 그는 준비한 원고를 익숙하게 이어가고 있었지만, 갑자기 스스로에게 낯선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이 자리가 좋아서 계속 서 있는 걸까? 아니면 떠날 용기가 없어서 머물고 있는 걸까?


강연을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온 뒤에도 그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난 3년 동안 그는 재무와 은퇴 설계 강연으로 웬만한 온라인 게임인 연봉에 가까운 수입을 올렸다. 은행 지점장 출신이라는 이력, 안정된 화법, 검증된 강의 자료는 어디에서나 무난하게 통했다.


문제는 바로 그 무난함이었다. 강연을 마칠 때마다 무언가 비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강의는 익숙했고 청중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지만, 대기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좀처럼 뜨거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다시 물었다.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아니면 한때 잘했던 일을 반복하고 있을 뿐인가?’


L씨는 시중은행에서 28년을 일하고 지점장을 끝으로 퇴직했다. 이후 재무 강연과 은퇴 설계 자문을 시작했고, 몇몇 기업의 사외 자문 역할도 맡았다. 20장에서 말한 자기 고용을 누구보다 빠르게 실천한 사람이었다. 여러 수익 센터를 만들었고, 회사 밖에서도 자신의 경험에 값을 매기는 데 성공했다.


겉으로 보면 이상적인 후반전이었다. 그러나 3년쯤 지나자, 미세한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젊은 강사들은 새로운 데이터와 세련된 시각 자료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기업 자문 자리에도 다른 전문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입은 아직 크게 줄지 않았지만, 예약 문의 사이의 간격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숫자가 말하기 전에 감각이 먼저 알아챘다. 지금의 방식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느 날 L씨는 오래전에 읽었던 경영서를 다시 펼쳤다. 바카라에는 1988년 북해의 파이퍼 알파 해양 시추시설 화재 사고에서 살아남은 노동자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었다. 거대한 화재가 번지는 상황에서 그는 캄캄하고 차가운 바다로 뛰어내렸다. 남아 있으면 죽음이 거의 확실했고, 뛰어내리면 희박하게나마 살 가능성이 있었다.

조직변화 컨설턴트 대릴 코너(Daryl Conner)는 『Managing at the Speed of Change』에서 이 이야기를 변화의 은유로 활용했다. 사람은 지금 있는 곳이 위험하다는 것을 머리로 아는 것만으로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발밑에서 열기가 올라오고, 머물 때의 위험이 이동할 때의 위험보다 커져야 비로소 변화를 선택한다.

그는 이 상태를 불타는 갑판이라고 불렀다. L씨는 그 대목에서 바카라장을 넘기지 못했다. 뜸해지는 강연 문의, 더 빠르게 변하는 콘텐츠, 하나둘 줄어드는 자문 기회가 떠올랐다. 아직 불길이 눈앞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갑판은 이미 천천히 타고 있었다.


문제는 그곳이 여전히 편안하다는 데 있었다. 큰 준비 없이도 강연을 진행할 수 있었고, 일정한 수입도 유지됐다. 지금 당장 떠나야 할 만큼 위급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변화는 언제든 다음 달로 미룰 수 있었다.

그에게는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어온 일이 하나 있었다. 형편이 어려운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금융교육이었다. 은행에서 일할 때부터 금융사기와 잘못된 대출로 어려움을 겪는 노인들을 자주 보았다. 언젠가는 그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수익이 크지 않다는 이유로 늘 뒤로 미뤘다.


강연을 마친 그날 밤, L씨는 처음으로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다. “기업 강연을 조금 줄이고, 그 시간에 어르신들 금융교육을 해보고 싶어.” 아내가 물었다. “수입이 줄 텐데 괜찮겠어?” 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일은 분명했지만, 그 일을 위해 지금 가진 것을 얼마나 내려놓아야 할지는 아직 계산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고민한 끝에 그는 강연을 전부 그만두지 않기로 했다. 대신 월 일정을 3분의 1만 줄였다. 기업 강연을 하던 나흘을 비워 동네 복지관과 함께 금융사기 예방 강좌를 시작했다.


갑판에서 한 번에 몸을 던지는 대신, 먼저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다. 첫 강좌에는 열두 명이 왔다.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을 뻔한 이야기, 자녀의 부탁으로 보증을 섰다가 빚을 떠안은 이야기, 무심코 누른 문자 링크 때문에 통장을 잃을 뻔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L씨는 오랜만에 청중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부터 잘된 것은 아니었다. 기업 강연장의 화면과 마이크에 익숙한 그에게 복지관의 낡은 스피커와 작은 칠판은 낯설었다. 어르신들은 그가 준비한 그래프와 전문 용어를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첫 강좌를 마친 뒤 그는 자료의 절반을 버렸다. 숫자는 이야기로 바꾸고, 그래프는 실제 사기로 피해를 본 사례로 바꾸었다. 복잡한 투자 이론보다 통장을 지키는 기본 원칙을 먼저 설명했다. 그러자 질문이 달라졌고, 표정도 달라졌다. 28년 동안 쌓은 지식 중 가장 화려한 지식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지식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절실한 자산이었다.


반년 뒤 몇몇 복지관에서 강좌를 정규 프로그램으로 운영하고 싶다는 제안이 왔다. 많지는 않았지만 강사료도 바카라정됐다. 기업 강연을 줄였으므로 전체 수입은 이전보다 감소했다. 통장에 들어오는 숫자를 볼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L씨는 말했다. “숫자는 줄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은 더 든든해졌습니다.”

이 변화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가 안정된 수입을 모두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불타는 갑판의 교훈은 무모하게 뛰어내리라는 뜻이 아니다. 지금의 자리가 변하고 있다는 신호를 부정하지 말고, 아직 선택할 수 있을 때 이동을 시작하라는 뜻에 가깝다. L씨는 강연의 3분의 1을 줄였다. 그 작은 여백이 새로운 역할이 들어올 자리가 되었다.


7장에서 다룬 돈 자산은 이런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생계를 지킬 최소한의 기반이 있었기에, 그는 하고 싶은 일을 시험해 볼 수 있었다. 모든 수입을 포기했다면 불안 때문에 다시 예전 방식으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면, 익숙한 갑판 위에서 서서히 기회를 잃었을 것이다. 변화에는 용기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안전하게 시도할 구조도 필요하다.


35장에서 우리는 나눔이 다른 사람에게 자산을 건네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눔은 마음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존 일정의 일부를 내려놓지 않으면 나눌 시간도, 에너지도 생기지 않는다.

L씨에게 내려놓음은 한 달의 강연 나흘이었다. 삶 전체를 뒤집은 것이 아니라, 일정의 일부를 다시 배치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작은 이동이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사람들은 변화를 생각할 때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시작하지 못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환은 전부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지금 가진 것의 일부를 줄이고, 그 자리에 오래 미뤄온 일을 작게 들여놓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9장에서 다룬 역할 상실은 조직이 직함을 거두어 갈 때 찾아왔다. 이번 장의 두려움은 반대다. 아직 직함과 소득이 남아 있는데, 스스로 그것을 줄여야 한다는 데서 온다. 등 떠밀려 일어난 변화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 선택하는 변화는 언제든 미룰 수 있다. 그래서 더 어렵다.


불타는 갑판의 진짜 위험은 불길이 거세다는 데 있지 않다. 아직 견딜 만하다는 이유로, 움직여야 할 시기를 놓치기 쉽다는 데 있다. 신호는 대부분 조용히 먼저 온다. 예약이 줄고, 고객의 관심이 달라지고, 자신의 마음이 예전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발밑이 뜨거워질 때까지 기다리면 선택지는 줄어든다. 변화의 신호가 작을 때 움직이면, 방향과 속도를 스스로 정할 수 있다.


L씨는 요즘 젊은 강사들의 세련된 화법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무대에 서 있다. 금융사기를 걱정하는 어르신 앞에서, 은행원 시절 배운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천천히 설명한다. 강당은 화려하지 않다. 수입도 예전만큼 크지 않다. 그러나 그곳에는 그가 오랫동안 찾지 못했던 온기가 있다. 돌이켜보면 갑판이 타고 있다는 신호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달라진 것은 환경이 아니었다. 그 신호를 더 이상 모른 척하지 않기로 한 태도였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자리는 정말 안전한가? 아니면 익숙하다는 이유로, 서서히 저물어가는 자리를 붙잡고 있는가?

39장에서는 이 바카라의 마지막 질문으로 나아간다. 익숙한 갑판을 내려온 사람이 자신의 경험과 자산을 무엇으로 남길 것인지, 아름다운 마무리의 풍경을 함께 살펴본다.

용기는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이 아니다. 아직 선택할 수 있을 때, 삶의 일부를 원하는 방향으로 먼저 옮겨놓는 일이다.


SELF COACHING

경험은 저절로 자산이 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의미를 발견하고, 행동으로 옮길 때 비로소 자산이 된다. 잠시 바카라을 덮고, 아래 질문을 통해 나만의 경험을 미래의 기회로 연결해 보자.


① 돌아보기—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정말 안전한가? 익숙해서 안전하다고 믿고 있는가?

② 깨닫기— 이미 나타나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는 변화의 신호는 무엇인가?

③ 발견하기— 오래 미뤄 왔지만 여전히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무엇인가?

④ 선택하기— 현재의 시간과 소득 가운데 어느 정도를 옮기면 그 일을 시작할 수 있는가?

⑤ 실행하기— 이번 주, 일정의 작은 조각 하나를 비워 오래 미뤄온 일을 실제로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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