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관주의자 이창동이 애써 찾은 희망은…<가능한 사랑>

시네마 백룸

by테토아부지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늘 불편했다. 그의 영화에서 슬롯 바깥의 약자는 세상(혹은 신) 권력에 핍박받고, 극한까지 내몰린다. 자식 잃은 슬픔을 신앙을 통해 극복하려다 실패한 ‘밀양’의 신애(전도연)나 청춘의 실낱같은 희망 한조각이 누군가에겐 불장난에 불과하단 사실을 깨닫는 ‘버닝’의 종수(유아인) 모두 그랬다.


영화 ‘가능한 사랑’은 가능한 한 희망 쪽에 서려 애쓴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결이 다르다. 비정한 세상에서 홀로 발버둥쳤던 이전 인물들과 달리 ‘가능한 사랑’은 ‘진창’에 있는 미옥(전도연)·호석(설경구) 부부가 ‘낙원’의 예지(조여정)·상우(조인성) 부부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더 나아가 사랑할 수 있을지 탐색한다. 가난함은 선으로, 부유함은 악으로 일방화되지 않는다. 각자 속한 세계가 다르고, 가진 욕망이 달라 섞이기 어려울 뿐이다. 자본과 노동이란 계급을 표상하는 네 인물은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금기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d7243c2907411c52ed6af89d719558f5ef5ebf2be2b454b7153bf62edecb8375.jpg아무리 다가서려 애써도 머나먼 간극인 너와 나. 넷플릭스 제공


호석은 해고되지 않은 ‘산 자’로서 떳떳한 일상을 바란다. 아들의 생일날, 케이크를 산 호석은 앞 손님인 남자를 집요하게 따라간다. 그 남자는 과거 회사 동료. 호석은 ‘산 자’ 가족의 행복한 모습을 지켜보며 스스로를 ‘유령’이라 여긴다. 지금의 그는 자식에게 태권도조차 못 가르치는 무기력한 아버지로 ‘불능’의 존재. 동료들을 가족으로 여겼던 호석은 아꼈던 동료들의 배신에 마음이 텅 비어버렸다.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는 그런 호석에게서 이야기를 얻길 욕망한다. 그녀는 해고 노동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의 구체적 삶을 찍고 싶다. 그러려면 그들과 친구가 돼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명품 가방을 들고 돈 많은 남편의 든든한 외조를 받는 예지는 그들과 너무 다르다. 남편 상우의 "‘그 사람들’과 너는 다른데, 메소드 연기 잘한다"는 조롱섞인 칭찬에 예지는 항변한다. "나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려는 거야."


예지는 영화감독으로서 이창동의 자기반영성이 강하게 깃든 인물. 이 감독은 영화의 모티브가 된 2009년 쌍용차 대기업 정리해고 사태를 10년 넘게 마음 속에 담아뒀다. 영화가 그들의 아픔을 소비해도 되는지에 대한 창작자로서 고민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카메라 윤리의 한계를 곳곳에 드러낸다. 미옥과 대화를 나누던 예지는 얘깃거리가 나오자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자신의 얘기를 할 땐 셔터를 끈다. 예지가 카메라를 켜고 끌 때마다 결국 이들의 대화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상기된다. 호석이 숲에서 절규하는 장면은 고통스러운 순간이지만, 그래서 카메라로 포착해야 하는 순간이 된다.


88ffffa7fdf3c172cefd689331e89e56a5160c2d10f8c593a21760c4c1ac31bc.jpg키 차이 봐라. 넷플릭스 제공


부유한 자산가인 상우는 ‘전능’한 인물이다. 아내에게 다정하고 주변에 친절하며 ‘차원이 다른’ 세계를 열 정도로 능력까지 갖춘 그는 미옥의 말마따나 ‘스티브 잡스’같은 존재다. 그러나 그의 친절함은 묘한 위압감을 준다. 미옥의 무릎에 묻은 모래를 털어줄 때 커다란 그의 실루엣이나 술에 취한 호석이 욕실에 소변을 보자 따라 소변을 보며 비웃는 듯한 모습이 대표적이다.


미옥은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좋아 보이는 예지의 옷이 얼마냐고 스스럼 없이 묻는 아줌마이자, 첫사랑 추억이 여전히 생생한 소녀다. 미옥은 예지를 통해 접한 상류층의 삶을 동경한다. 돈은 그녀가 바라는 절대 자유를 가능케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 전도연은 선망과 거리감, 욕망과 천진함이 절묘하게 섞인 미옥의 시선을 탁월하게 펼쳐낸다. 애창곡 ‘사랑밖엔 난 몰라’처럼 어쩌면 모두를 품을 수 있는 생의 에너지로 가득 찬 인물이다.


2d55fd0c2b82ba242584a801d5088f018eb6871047bab7bf349807f3651b922d.jpg개인적으론 밀양 오버랩 장면. 이겨낼 에너지가 있어서, 접을 줄 아는 유연함이 있어서, 남편이 있어서 다행이야 미옥아. 넷플릭스 제공


네 사람이 상우의 별장에 여름 휴가를 함께 보내면서 내재됐던 각자의 욕망은 표출되고 파국으로 향한다. 호석이 응어리진 분노를 토해내며 호흡 곤란을 겪는 순간을 찍던 예지는 희열과 죄의식을 동시에 느낀다. 미옥과 상우의 갈등은 더 격렬하다. 환대의 실체를 목도한 미옥은 상우의 내밀한 세계에 도전하고, 상우는 자신에게 감히 저항한 미옥을 탐하며 포식자의 민낯을 드러낸다.


험난한 여정을 뒤로 하고 미옥·호석 부부는 집으로 돌아와 술잔을 기울인다. 호석이 손수 만든 앞마당 대리석 평상에서. 과거 부부는 호석이 동료들과 함께 하려고 만든 평상에 차마 앉을 수 없었지만, 이제는 가능해졌다. 보름달이 이들을 감싸안듯 비춘다.


‘가능한 사랑’은 현실을 잘 아는 비관주의자가 애써 찾아낸 희망의 실마리다. 서로의 존재가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상대방이 있어 사랑할 수 있다는 희망. 이들의 삶이 예지·상우 부부에 의해 부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감독의 휴머니즘적 의지가 강하게 읽힌다. 다만 타자의 삶을 선망하던 미옥이 끝내 그들과 섞일 수 없음을 알고 돌아왔다는 점에선 현실 순응에 그친다는 인상도 준다. 어쩌면 ‘가능한 사랑’은 이 감독이 죄의식에 너무 오래 쥐고 있던 편지다. 그러나 순간순간 마음이 저릿해지고, 보고난 뒤 세상이 조금은 달리 보이는 거장의 진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