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김경윤 127 (2026. 7.9.)
지난 3장에서 우리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선언을 통해 무한한 자유와 그에 따르는 무거운 바카라임을 부여받았습니다. 내 삶의 주인은 오직 나 자신이라는 사실은 해방감을 주지만, 동시에 한없는 막막함과 두려움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나를 대신해줄 신도, 따라가면 될 운명도 없다는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요? 실존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조건들을 파고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엄습하는 ‘불안’, 우리가 처한 ‘피투성’의 조건, 그리고 우리가 언젠가 마주할 ‘죽음’이라는 지평선입니다. 이 개념들은 언뜻 부정적이고 염세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실존주의는 바로 이 어둠 속에서 가장 빛나는 삶의 의미를 찾아냅니다.
1. 선택의 무게 앞에서 느끼는 ‘불안(Angst)’
우리는 보통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말을 혼용하지만, 실존주의 철학, 특히 키에르케고르와 하이데거는 이 둘을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두려움(fear)에는 명확한 대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뱀을, 시험에 떨어지는 것을, 혹은 높은 곳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불안(Anxiety, 독일어 Angst)은 그 대상이 막연하거나, 아예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발밑이 꺼지는 듯한 현기증, 세상 전체가 낯설게 느껴지는 섬뜩함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정체 모를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키에르케고르는 이를 “자유의 현기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불안은 바로 우리 자신의 무한한 자유와 가능성 앞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내일의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이 될 수도, 악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무(nothingness)’의 심연을 마주할 때, 우리는 불안을 느낍니다. 사르트르는 이 불안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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