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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도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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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1995~2025 노벨문학상을 다시 읽습니다. 문학이 인간의 상처&amp;middot;기억&amp;middot;침묵을 어떻게 마주해왔는지, 한 명의 독자로서 천천히 따라가 봅니다.</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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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17T13:00:02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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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강 이후의 노벨문학상(19, 시즌 2) - 에필로그. 책이 놓일 자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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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8-10T22:00:07Z</updated>
    <published>2026-08-10T22:00:07Z</published>
    <summary type="html">열여덟 편을 닫은 뒤에야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하나 남았다. 12화에서 나는 한국의 출판 시장과 동네 서점 이야기를 일부러 비켜 갔다. 작가와 문장을 따라가는 본문의 결이 달라질 것 같아 후기의 자리로 미뤄두었다. 여기가 그 자리다.  두 장면에서 시작하려 한다.  첫 번째 장면은 2024년 10월 10일 이후의 서점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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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강 이후의 노벨문학상(18, 시즌 2) - 18화. 아직 부르지 못한 이름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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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8-07T22:00:05Z</updated>
    <published>2026-08-07T22:00:05Z</published>
    <summary type="html">마지막 원고를 앞두고, 회차마다 등장한 수상자들의 이름을 표에 표시해 보았다. 서른한 칸 가운데 세 칸이 비어 있었다. 다리오 포, 가오싱젠, 르 클레지오.  그 표를 보고 나서야 '이름을 부른다'는 말과 '작가를 읽었다'는 말 사이의 거리가 선명해졌다. 어떤 작가는 한 편의 중심에 놓고도 다 읽지 못했고, 어떤 작가는 선정 사유 한 문장만 붙든 채 오래</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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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강 이후의 노벨문학상(17, 시즌 2) - 17화. 문장과 사람을 떼어놓을 수 있을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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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8-03T22:00:12Z</updated>
    <published>2026-08-03T22:00:12Z</published>
    <summary type="html">지난 글은 말하지 않기와 잊기를 지나, 더 불편한 질문 앞에서 끝났다. 작가가 침묵한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한 말과 행동이 자신이 쓴 문장과 충돌할 때, 우리는 그 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문장과 사람을 떼어놓아야 할까, 아니면 끝까지 한데 묶어 판단해야 할까.  이번에 나란히 놓을 두 작가는 논란이 벌어진 순서부터 정반대다. 한 사람은 이미 모든 논</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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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강 이후의 노벨문학상(16, 시즌 2) - 16화. 말하지 않기와 잊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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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31T22:00:01Z</updated>
    <published>2026-07-31T22:00:01Z</published>
    <summary type="html">지난 글 끝에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경계에서 본 것들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것과 잊고 싶은 것은 문학에서 어떻게 만나는가.  이번 짝은 욘 포세와 가즈오 이시구로다. 6화에서 포세의 침묵을, 7화에서 이시구로의 불확실한 기억을 따로 봤다. 이번엔 나란히 놓는다. 한 사람은 '말하지 않기'를, 다른 한 사람은 '잊기'를 파고든 작가다.  포세는 2023년</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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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강 이후의 노벨문학상(15, 시즌 2) - 15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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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27T22:00:02Z</updated>
    <published>2026-07-27T22:00:02Z</published>
    <summary type="html">지난 글 끝에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무너진 세계에서 떠나,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게 된 사람은 그 자리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9화에서 나는 구르나와 파묵을 나란히 봤다. 이번엔 그 짝에 한 사람을 더 세워, '경계에 선 자의 눈'이라는 자리를 더 깊이 들여다보려 한다.   구르나는 2021년, &amp;quot;문화와 대륙 사이의 만에 놓인 난민의 운명과 식민</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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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강 이후의 노벨문학상(14, 시즌 2) - 14화. 무너지는 세계에서, 혼자인가 함께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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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24T22:00:03Z</updated>
    <published>2026-07-24T22:00:03Z</published>
    <summary type="html">지난 글 끝에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한 사람의 몸이 겪은 극한이 문장이 된다면, 세계 전체가 무너질 때 인간은 혼자인가 함께인가.  이 질문 앞에 정반대로 선 두 작가가 있다. 8화에서 잠깐 나란히 봤던 라슬로 크라스나호르카이와 주제 사라마구다. 이번엔 더 깊이 들어가 본다.  크라스나호르카이는 2025년, &amp;quot;묵시록적 공포 한가운데에서 예술의 힘을 재확인</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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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강 이후의 노벨문학상(13, 시즌 2) - 13화. 같은 상처, 정반대의 문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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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20T22:00:03Z</updated>
    <published>2026-07-20T22:00:03Z</published>
    <summary type="html">지난 시즌을 닫으며 나는 작가들을 둘씩 마주 세워 보고 싶다고 했다. 한 명씩 스치듯 지나온 이들을, 이번엔 나란히 놓고 천천히 읽어보려 한다. 그렇게 읽다 보면 한 가지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위대한 작가들은 종종 정반대의 방법으로 같은 자리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문체도, 기질도, 다루는 소재도 다른데, 끝내 같은 진실 앞에 선다.  첫 짝은 한강과 아니</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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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강 이후의 노벨문학상(12, 시즌 1) - 12화. 이 연재가 책이 된다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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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17T22:00:03Z</updated>
    <published>2026-07-17T22:00:03Z</published>
    <summary type="html">지난 글 끝에서 나는 이상한 고백을 했다. 제도를 의심하고 선택의 불완전함을 다 알면서도, 여전히 이 작가들을 읽고 싶어진다고. 그럼에도 왜 읽는가. 이 마지막 글은 그 질문에 답해보려 한다. 정답을 내미는 방식이 아니라, 지난 열한 편이 결국 무슨 이야기였는지를 되짚는 방식으로.  돌아보면 이 연재는 한강의 수상에서 출발했다. 처음 던진 질문은 단순했다.</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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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강 이후의 노벨문학상(11, 시즌 1) - 11화. 노벨문학상은 공정한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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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13T22:00:06Z</updated>
    <published>2026-07-13T22:00:06Z</published>
    <summary type="html">지난 글 끝에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번역이 세계문학을 만든다면, 누가 번역될지 정하는 건 누구인가. 그리고 그 가장 높은 자리에 노벨문학상이 있다면 &amp;mdash; 그 상의 판단은 공정했는가.  이번 글은 조금 날을 세우려 한다. 지금까지 나는 선정 사유를 정성껏 읽어왔지만, 그렇다고 이 상을 떠받들 생각은 없었다. 좋은 독자는 의심할 줄도 알아야 한다.  노벨문학상</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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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강 이후의 노벨문학상(10, 시즌 1) - 10화. 우리가 읽는 건 누구의 문장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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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10T22:00:07Z</updated>
    <published>2026-07-10T22:00:07Z</published>
    <summary type="html">지난 글은 이런 질문으로 끝났다. 주변부의 언어가 세계가 되려면 반드시 번역을 통과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읽은 건 작가인가, 번역가인가.  이번 글에는 중심에 둘 작가가 없다. 대신 한 가지 '과정'을 주인공으로 세우려 한다. 번역.  이야기는 한강에서 시작하는 게 좋겠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받았을 때, 상은 작가 한 사</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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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강 이후의 노벨문학상(9, 시즌 1) - 9화.&amp;nbsp;난민의 언어가 세계가 될 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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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06T22:00:12Z</updated>
    <published>2026-07-06T22:00:12Z</published>
    <summary type="html">지난 글은 이런 질문으로 끝났다. 알렉시예비치는 러시아어로, 포세는 노르웨이의 작은 표기법으로, 크라스나호르카이는 헝가리어로 썼다. 세계 문학의 중심이라는 영어권 바깥, 때로는 아주 작은 나라에서 쓴 문장들이 어떻게 전 세계 독자에게 가닿았을까. 어느 변두리의 상처가, 어떻게 모두의 이야기가 되는가.  이 질문을 거의 평생의 주제로 삼은 작가가 압둘라자크</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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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강 이후의 노벨문학상(8, 시즌 1) - 8화. 세계가 무너질 때 문장은 무엇을 하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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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04T11:48:44Z</updated>
    <published>2026-07-03T22:00:03Z</published>
    <summary type="html">지난 글은 이렇게 끝났다. 개인의 기억조차 무너질 수 있다면, 세계 전체가 무너지는 것처럼 보일 때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위로도, 희망찬 결말도 주지 않는 문학이 있다. 그런 문장에도 쓸모가 있을까.  이 질문 앞에 가장 타협 없이 선 작가가 라슬로 크라스나호르카이다.  크라스나호르카이는 2025년, 가장 최근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헝가리 작가이</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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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강 이후의 노벨문학상(7, 시즌 1) - 7화.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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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04T11:48:31Z</updated>
    <published>2026-06-29T22:00:06Z</published>
    <summary type="html">지난 글 끝에서 나는 이런 질문에 닿았다. 우리가 침묵에 가라앉혀 둔 기억들은 정말 그대로 남아 있을까. 아니면 우리가 기억이라 믿는 것 자체가 이미 고쳐 쓰인 것은 아닐까.  이 불안을 가장 조용하게, 가장 끈질기게 파고든 작가가 가즈오 이시구로다.  이시구로는 201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일본에서 태어나 어릴 때 영국으로 건너간 영국 작가다(이 출신</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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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강 이후의 노벨문학상(6, 시즌 1) - 6화. 말할 수 없는 것을 쓰는 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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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04T11:48:13Z</updated>
    <published>2026-06-26T22:00:07Z</published>
    <summary type="html">지난 글은 이런 질문으로 끝났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증언이라면, 말할 수 없는 것은 어떻게 쓰는가. 입을 열어도 끝내 빠져나가는 것, 문장으로 옮기는 순간 사라지는 것 &amp;mdash; 그런 것 앞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평생의 작업으로 삼은 사람이 욘 포세다.  포세는 202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노르웨이 작가다. 선정 사유가 이 회차의 질문과</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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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강 이후의 노벨문학상(5, 시즌 1) - 5화. 증언은 어떻게 문학이 되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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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04T11:47:58Z</updated>
    <published>2026-06-22T22:00:12Z</published>
    <summary type="html">지난 글 끝에서 나는 이런 질문을 남겼다. 한 사람의 몸이 역사를 증언할 수 있다면, 수백 명의 목소리를 한꺼번에 담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리고 만약 어떤 작가가 자기 목소리를 거의 지워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증언만 남긴다면 &amp;mdash; 그것도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정면으로 받은 사람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다.  알렉시예비치는 2015년에</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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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강 이후의 노벨문학상(4, 시즌 1) - 4화. 몸은 역사의 마지막 기록지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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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04T11:47:40Z</updated>
    <published>2026-06-19T22:00:06Z</published>
    <summary type="html">지난 글 끝에서 나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기억은 머릿속에만 있는가, 아니면 몸에 먼저 새겨지는가. 사실 이건 내가 에르노를 읽으며 막연히 느낀 것이기도 했다. 에르노가 다룬 수치심은 머리로 떠올린 개념이 아니라, 얼굴이 붉어지고 시선을 피하게 되는 몸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폭력은 어떨까. 국가가, 사회가, 가족이 누군가에게 가한 폭력은 어디에 가장 먼저</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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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강 이후의 노벨문학상(3, 시즌 1) - 3화. 기억은 끝나지 않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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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04T11:47:25Z</updated>
    <published>2026-06-15T22:00:20Z</published>
    <summary type="html">지난 두 글에서 나는 노벨문학상의 선정 사유를 한 문장씩 뜯어봤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궁금해진 게 있다. 지난 30년의 그 문장들을 한자리에 늘어놓으면, 어떤 단어가 가장 자주 보일까.  직접 다 세어본 건 아니지만, 자료를 훑는 동안 자꾸 같은 단어들이 눈에 밟혔다. 기억, 역사, 트라우마, 증언. 한강의 '역사적 트라우마', 모디아노의 '기억의 예</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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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강 이후의 노벨문학상(2, 시즌 1) - 2화. 노벨문학상은 작가가 아니라 질문을 고른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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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04T11:47:06Z</updated>
    <published>2026-06-13T02:01:46Z</published>
    <summary type="html">노벨문학상 수상자를 검색하면 늘 같은 게 눈에 띈다. 작가 이름 옆에 한 문장이 붙어 있다는 것이다. 한강에게는 &amp;quot;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amp;quot; 셰이머스 히니에게는 &amp;quot;일상의 기적과 살아있는 과거를 찬양하는, 서정적 아름다움과 윤리적 깊이.&amp;quot;  나는 그동안 이 문장들을 그냥 칭찬 문구로 읽었다. 상을 줄 때 으레</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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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강 이후의 노벨문학상(1, 시즌 1) - 1화. 한강 이후, 우리는 왜 노벨문학상을 다시 읽어야 하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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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7-04T11:46:36Z</updated>
    <published>2026-06-08T22:38:59Z</published>
    <summary type="html">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 든 감정은 기쁨이었다. 그다음에 찾아온 감정은 조금 이상했다.  &amp;quot;드디어 한국 작가가 받았다&amp;quot;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거의 동시에, &amp;quot;나는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얼마나 읽어봤지?&amp;quot; 하는 부끄러움이 따라왔다. 이름은 많이 들어봤다. 사라마구, 쿳시, 이시구로, 에르노, 포세. 하지만 이름을 아는 것</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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