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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철가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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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사학과를 졸업하고, 우연한 계기로 수학을 직업으로 삼게되면서, 보다 다양한 관점의 역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편견의 역사 시리즈, 수학의 역사를 집필했습니다.</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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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0-28T06:32:44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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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견의 역사 - 세도정치 (16) - 11. 철종과 흥선대원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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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10-12T03:30:14Z</updated>
    <published>2026-10-12T03:30:14Z</published>
    <summary type="html">철종과 흥선대원군. 얼핏 보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국왕이었지만, 별다른 치적과 성과 없이 세도정치 앞에 무력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고, 또 한 사람은 국왕은 아니었지만 국왕의 생부로서 세도정치를 청산하고 강력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친 인물로 기억됩니다.  필자는 이 두 사람을 편견의 역사 인물편을 통해 다루려고 했었습니다. 집필&lt;img src= "https://img1.kakao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kakao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hmAr%2Fimage%2FSHbNHKLcLRpfJJWr4tJz1DGFC9U.png" width="500" /&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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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견의 역사 - 세도정치 (15) - 10. 효명세자의 대리청정과 헌종의 친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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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10-11T01:31:49Z</updated>
    <published>2026-10-11T01:31:49Z</published>
    <summary type="html">헌종이라는 인물의 관심도는 사실상 0에 수렴합니다. 정조의 아들이라는 프리미엄과 함께 홍경래의 난이 있던 순조 시기와 강화도령이라는 드라마틱한 그의 출신과 함께 임술농민봉기가 있었던 철종시기와는 달리 헌종의 개인사는 이렇다할 장면도 없을뿐더러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 일찍 죽은 임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에 휩쓸린 &lt;img src= "https://img1.kakao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kakao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hmAr%2Fimage%2Fb5oJXonC03QEieW498_7n5KFpUE.png" width="500" /&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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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견의 역사 - 세도정치 (14) - 10. 효명세자의 대리청정과 헌종의 친정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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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10-11T01:28:42Z</updated>
    <published>2026-10-10T02:20:15Z</published>
    <summary type="html">순조는 본인의 무력함을 느꼈습니다. 위에서 순조가 사실상 국왕의 책무를 방기했다고 표현했지만,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순조는 정치 시스템의 장악과 변화보다는 민생을 먼저 챙겼던 국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민생을 먼저 챙기고 조율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조정의 장악과 정치 시스템의 개혁이 필수적으로 우선 처리되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순조는 이 작업을 &lt;img src= "https://img1.kakao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kakao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hmAr%2Fimage%2FuU7FgYWxuNZC6H3EZKyDf5dsOSQ.png" width="500" /&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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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견의 역사 - 세도정치 (13) - 9. 경인병화와 홍경래의 난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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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10-09T06:16:29Z</updated>
    <published>2026-10-09T06:16:29Z</published>
    <summary type="html">국사 교과서에서는 홍경래의 난을 오래도록 차별받던 평안도 지역의 문제와 삼정의 문란을 원인으로 꼽으며 세도정치의 폐해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 서술에서의 원인은 서술되지만, 그 원인의 주체와 당시 시대의 제도적 모순에 대한 평가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원인이 모호하니 결론 역시 엉뚱한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우리는 홍경래의 난의 구조적 원인, 경제적 원인&lt;img src= "https://img1.kakao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kakao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hmAr%2Fimage%2FBQpqqt3X0dMgzZjICT7MJUALk5Q.png" width="500" /&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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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견의 역사 - 세도정치 (12) - 9. 병인경화와 홍경래의 난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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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10-08T04:34:22Z</updated>
    <published>2026-10-08T04:34:22Z</published>
    <summary type="html">순조가 즉위한 이후 정순왕후 김씨가 대왕대비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진행합니다. 정순왕후 김씨의 가문인 경주 김씨가문은 비록 정조를 지지했지만, 정조 즉위 과정에서 김귀주를 비롯한 가문의 일부가 피해를 입은 상태였습니다.  일부 유튜브들은 이 정순왕후를 조선을 망친 원흉 중 한사람으로 꼽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정조와의 불화로 꼽습니다. 이를 대표적으로 나타&lt;img src= "https://img1.kakao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kakao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hmAr%2Fimage%2FwdFwBmgrN5Ca0yOjH9AjZQUqYZY.png" width="500" /&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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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견의 역사 - 세도정치 (11) - 8. 세도정치는 어떻게 작동했는가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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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또한 비변사의 변질도 다시 한번 짚어봐야 합니다. 비변사는 인사와 군사, 재정, 민생과 관련된 핵심 사안을 함께 논의하는 최고 회의체였습니다. 이 말은 앞선 챕터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소수의 세력이 비변사 당상과 주요 판서직을 장악하면 대부분의 국가 기관의 국정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정조까지는 국왕이 직접 통제하고 운영을 할 수 있었습&lt;img src= "https://img1.kakao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kakao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hmAr%2Fimage%2FOTgfiK7UufQnGiiQPZPYU79vd6A.png" width="500" /&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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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견의 역사 - 세도정치 (10) - 8. 세도정치는 어떻게 작동했는가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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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10-06T02:53:47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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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이제 우리는 세도정치로 인한 정치적 모순과 구조적 한계를 살펴보기 전에 세도정치는 어떤 과정으로 작동했는지를 살펴봐야만 합니다. 그전에 우리가 한 가지 알아두고 시작해야 하는 것은 세도정치는 법전에 규정된 관직이나 공식적인 통치제도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국왕의 결재권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작동했습니다. 달라진 것은 결재 이전에 어떤 정보와 인사 후보가&lt;img src= "https://img1.kakao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kakao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hmAr%2Fimage%2FAWYH6YyZYSKHbdUDWW7PR9kPez0.png" width="500" /&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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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견의 역사 - 세도정치 (9) - 7. 왜 김조순이었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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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10-05T03:44:48Z</updated>
    <published>2026-10-05T03:44:48Z</published>
    <summary type="html">우리는 흔히 김조순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촉발한 주범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사 교과서에서도 김조순을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 김씨의 아버지, 즉 왕의 장인이라는 직함을 내세워 안동 김씨 일가의 요직 독점과 더불어 영정조시기의 탕평책이 무너뜨리게 된 계기라고 서술합니다.  그런데 이는 당시의 정치 상황을 배제하고 있는 사실 그대로만을 서술하면서 발&lt;img src= "https://img1.kakao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kakao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hmAr%2Fimage%2Fr1M4kWuTZk8O8eOS_FsVnbNVZeI.png" width="500" /&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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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견의 역사 - 세도정치 (8) - 6. 정조의 탕평책과 한계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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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10-02T02:48:52Z</updated>
    <published>2026-10-02T02:48:52Z</published>
    <summary type="html">정조의 탕평은 영조의 탕평과는 정 반대였습니다. 영조의 탕평이 온건파를 주로 등용하는 완론 탕평이었다면, 정조의 탕평은 영조보다 더 급진적이었습니다. 정조는 직접적으로 준론 탕평, 즉 자신이 세운 의리에 동의하는 준론계 인물들을 당색과 무관하게 등용하는 정책이었습니다.  영조는 경종 독살이라는 평생의 업보를 해소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강경파들을 조정에서 치웠&lt;img src= "https://img1.kakao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kakao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hmAr%2Fimage%2FMwJHotmp1Ib9_ubMfGybUT_SyRE.png" width="500" /&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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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견의 역사 - 세도정치 (7) - 6. 정조의 탕평책과 한계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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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10-01T03:26:27Z</updated>
    <published>2026-10-01T03:26:27Z</published>
    <summary type="html">새롭게 즉위한 정조는 선왕이자 할아버지던 영조에게 두 가지를 물려받습니다. 하나는 노론 일색의 조정과 무력화된 견제 기구입니다. 명군이라 불리던 영조가 물려준 정치적 유산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초라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조선 후기의 정치적 한계이기도 했지만, 또 그만큼 영조라는 국왕이 얼마나 뛰어났고 국왕이 가지는 힘이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했습니&lt;img src= "https://img1.kakao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kakao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hmAr%2Fimage%2FwE8_aUqtETIA1cm7p-f1t_wb-qI.png" width="500" /&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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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견의 역사 - 세도정치 (6) - 5. 영조의 탕평책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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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9-30T07:20:02Z</updated>
    <published>2026-09-30T07:20:02Z</published>
    <summary type="html">결국 이 경신처분과 신유대훈 이후 벌어진 나주 괘서 사건은 조정을 주도하던 노론 온건파인 완노가 정치적 영향력을 거의 잃은 소론 온건파 완소를 흡수해 탕평당을 조직하는 식으로 영조 후반기의 정국을 주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조의 후기 탕평책인 유재시용입니다.  그 결과 명맥만을 유지하던 남인과 강경 소론은 물론, 영조에 협조적이던 온건 소론마저도 타격을 입&lt;img src= "https://img1.kakao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kakao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hmAr%2Fimage%2FM7CLHB5tPo2EU8MFdPfZCBZ6G9I.png" width="500" /&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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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견의 역사 - 세도정치 (5) - 5. 영조의 탕평책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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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9-29T06:00:01Z</updated>
    <published>2026-09-29T06:00:01Z</published>
    <summary type="html">영조와 정조 시기에 대해서 국사 교과서에는 두 가지를 매우 강조하며 가르칩니다. 첫 번째는 영정조 시기를 조선의 중흥기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붕당정치의 폐해를 막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한 것으로 쓰여있습니다. 그 외 균역법 및 『속대전』 편찬과 같은 굵직한 치세를 남긴 임금으로 영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국사 교과&lt;img src= "https://img1.kakao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kakao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hmAr%2Fimage%2FtmtOXA80RJsy_IpRrP9F90rXEBA.png" width="500" /&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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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견의 역사 - 세도정치 (4) - 4. 경종의 신임옥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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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9-28T01:19:21Z</updated>
    <published>2026-09-28T01:19:21Z</published>
    <summary type="html">경종은 숙종과 영조에 가려서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는 임금 중 한명입니다. 먼저 우리는 경종의 출생부터 하나씩 짚어봐야 합니다.  조선왕실은 효종대에서부터 손이 매우 귀했습니다. 효종은 정비였던 인선왕후 장씨와의 관계에서 7명의 자손을 생산했지만, 아들은 오직 현종 한사람 뿐이었습니다. 또 3명의 후궁에게서 오직 한명의 옹주만을 보았을 뿐입니다. 현종 역시도&lt;img src= "https://img1.kakao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kakao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hmAr%2Fimage%2F8TTXW8N2txVB0b_NkNm8hzrktlw.png" width="500" /&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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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견의 역사 - 세도정치 (3) - 3. 환국과 붕당의 변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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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9-25T03:09:21Z</updated>
    <published>2026-09-25T03:09:21Z</published>
    <summary type="html">비변사의 확대는 조선의 정치체제를 곧바로 무너뜨리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여러 관청에 나뉘어 있던 정책&amp;middot;인사&amp;middot;군사&amp;middot;재정의 핵심 기능이 비변사 한곳에 집중되었습니다. 훗날 소수 세력이 그 기구만 장악해도 국정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적 취약성을 만들었습니다. 국사 교과서에서 비변사가 왕권을 약화시켰다고 했던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고, 이 점이 세도&lt;img src= "https://img1.kakao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kakao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hmAr%2Fimage%2F-NpZB15iEQqvM643xU3qALL3ycE.png" width="500" /&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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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견의 역사 - 세도정치 (2) - 2. 조선의 견제 정책</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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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9-23T01:30:05Z</updated>
    <published>2026-09-23T01:30:05Z</published>
    <summary type="html">조선은 전제군주국입니다. 임금의 말이 그 다른 무엇보다도 앞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아무런 제한 없이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냐고 한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조선의 정치에서 최종 결정권은 국왕에게 있었지만, 이 결정을 하기까지는 수많은 논의와 건의, 그리고 토론과 견제가 있었습니다.  대신의 심의와 삼사의 비판, 유생과 지방 사족의 공론, 붕당의 경쟁을 &lt;img src= "https://img1.kakao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kakao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hmAr%2Fimage%2FlnqDhybGhcZbBGWhU2LF2nrxiWU.png" width="500" /&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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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견의 역사 - 세도정치 (1) - 1. 들어가며 &amp;ndash; 세도정치란 무엇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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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9-21T11:29:07Z</updated>
    <published>2026-09-21T11:26:29Z</published>
    <summary type="html">세도정치(世道政治)와 세도정치(勢道政治). 같은 소리로 읽히는 두 한자는 정치의 이상과 몰락을 함께 보여줍니다.  본래 세도(世道)는 태평성대 그 자체를 뜻하는 말은 아닙니다. 유교적 정치질서 속에서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어야 할 도리와 공적인 책임을 의미했습니다. 정조가 어린 순조의 앞날을 김조순에게 맡기며 기대했던 것 역시 국왕을 보필하고 올바른 정치질서&lt;img src= "https://img1.kakao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kakao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hmAr%2Fimage%2FulRJYfUQ2T0dSLBSv_u6_1CChl0.png" width="500" /&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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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견의 역사 - 예송 (完) - 에필로그 - 예송을 통해 살펴본 조선 정치에 대한 인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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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9-20T02:52:50Z</updated>
    <published>2026-09-20T02:52:33Z</published>
    <summary type="html">그렇다면 누구의 책임인가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서술을 두고 숙종이라는 임금 한 사람의 잘못으로 정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결론 내리는 것이 정확하지 않다고 봅니다. 현종에게 붕당에 의해 무력하게 끌려다녔다는 임금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심어졌듯, 숙종에게도 피를 부르는 정치 개편을 했다는 것에 대한 온전한 책임을 뒤집어&lt;img src= "https://img1.kakao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kakao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hmAr%2Fimage%2Flf3YYoxqWUJwZy87l1qvMrsdMmU.png" width="500" /&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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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견의 역사 - 예송 (18)&amp;nbsp; - 13. 숙종과 환국정치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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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9-19T02:56:38Z</updated>
    <published>2026-09-19T02:56:38Z</published>
    <summary type="html">예론이 죽음이 되기까지  즉위 이듬해인 1675년, 남인 곽세건 등이 기해예송 당시 효종을 중자로 규정한 책임이 송시열에게 있다고 상소했습니다. 송시열의 예론은 학문적 견해가 아니라 효종과 현종의 정통성을 낮춘 잘못으로 규정되었고, 산림의 거두는 덕원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어 남인이 조정을 채웠습니다. 허적이 영의정이 되었고, 갑인예송까지 벼슬하지 않았던&lt;img src= "https://img1.kakao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kakao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hmAr%2Fimage%2FzCgfOk8s2YR8V_tGuSQ7XlTE1mE.png" width="500" /&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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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견의 역사 - 예송 (17) - 13. 숙종과 환국정치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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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9-18T01:29:19Z</updated>
    <published>2026-09-18T00:29:24Z</published>
    <summary type="html">숙종은 현종의 외아들이자 명성왕후 김씨가 낳은 적자였습니다. 현종은 후궁을 맞이하지 않았던 유일한 임금이었고, 따라서 그의 왕위계승권을 위협할 형제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숙종은 1667년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현종이 승하하자 조선의 19대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현종이 승하한 1674년 8월, 왕위에 오른 숙종의 나이는 열넷이었습니다. 어린&lt;img src= "https://img1.kakao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kakao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hmAr%2Fimage%2FUGNBnI7jUkxg90G65bmbTv79Etk.png" width="500" /&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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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편견의 역사 - 예송 (16) - 12. 갑인환국과 현종의 재평가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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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9-16T01:06:59Z</updated>
    <published>2026-09-16T01:06:59Z</published>
    <summary type="html">기해년의 현종과 갑인년의 현종  그렇다면 기해예송에서 판정을 유예한 현종과 갑인예송에서 직접 판정을 내린 현종 가운데 어느 쪽이 진정한 현종의 모습이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둘 다 현종의 모습이었습니다.  1659년 효종이 승하했을 때 현종은 아직 정식 즉위 절차도 마치지 않은 왕세자였습니다. 부왕의 국상을 치르면서 왕위를 이어야 했고, 소현세자의 아들&lt;img src= "https://img1.kakaocdn.net/thumb/R1280x0/?fname=http%3A%2F%2Ft1.kakao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hmAr%2Fimage%2FPlJuUk689UnojfgZS989T9UGtU4.png" width="500" /&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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