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디자인하지 않아도 된다

D-35 │ 슬롯적 가치 디자인까지 35일

by컬러코드

새로 만든 광장에 갔습니다.

멋진 조형물이 있고,

벤치도 있고,

바닥에는 예쁜 패턴이 있으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공간도 있습니다.

어디에 앉고,

어디에서 사진을 찍고,

어디로 걸어야 하는지가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분명 잘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상하게 이런 공간보다

별것 없는 넓은 잔디밭에 사람들이 더 오래 머뭅니다.

아이들은 뛰고,

누군가는 돗자리를 펴고,

어떤 사람은 공을 던지며,

누군가는 그냥 누워 하늘을 봅니다.

특별한 시설은 많지 않은데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공간을 사용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디자인을 흔히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빈 공간이 있으면 채우고,

벽이 있으면 꾸미고,

공간이 생기면 기능을 정합니다.

여기에 무엇을 놓을지,

사람들이 무엇을 하게 할지,

어떻게 사용하게 할지를 계획합니다.

그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는 것도 디자인일 수 있습니다.


공원의 넓은 잔디밭을 생각해 봅니다.

사용법이 적혀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는 이것을 하세요’라는 안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사용법을 만듭니다.

아이는 운동장으로 사용하고,

가족은 소풍 장소로 사용하며,

청년들은 친구들과 앉아 이야기를 나눕니다.

같은 공간인데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장소가 됩니다.

비어 있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행동들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이 너무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어떨까요?

앉는 곳,

걷는 곳,

노는 곳,

사진 찍는 곳까지 모두 정해져 있다면

사용자는 공간을 이용할 수는 있지만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석할 여지는 줄어듭니다.

잘 디자인된 공간인데도

왠지 오래 머물고 싶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디자인의 여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백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공간이 아닙니다.

사람이 들어와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남겨 둔 공간입니다.


이 원리는 제품에도 있습니다.

컵은 물만 마시는 도구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연필을 꽂고,

누군가는 작은 화분으로 사용합니다.

상자는 물건을 담는 용도로 만들어졌지만

아이에게는 자동차가 되기도 하고 집이 되기도 합니다.

디자이너가 예상하지 않았던 사용법을

사람이 스스로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런 순간이 저는 재미있습니다.

디자인이 완성된 뒤에도

사용자가 디자인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디자이너가 100% 완성해서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빈자리를 남겨 두고

나머지를 사용하는 사람이 완성하는 것입니다.


공공디자인에서는 이 관점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시민을 위해 공간을 만든다고 하면서

때로는 시민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까지 너무 많이 결정합니다.

하지만 실제 삶은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침과 저녁이 다르고,

평일과 주말이 다르며,

어린이와 청년, 어르신이 공간을 사용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그렇다면 모든 행동을 미리 정하는 것보다

다양한 사람이 자신의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연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 더 오래 살아남는 디자인일 수 있습니다.


서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택지가 너무 많고,

설명이 너무 많고,

반드시 정해진 순서대로 움직여야 하는 서비스는

친절해 보이지만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좋은 서비스는 필요한 것을 제공하면서도

사용자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을 남겨 둡니다.

좋은 디자인은 모든 것을 대신 결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문득 사람 사이의 관계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를 돕고 싶을 때

우리는 자꾸 답을 주려고 합니다.

“이렇게 해.”

“이게 더 좋아.”

“내가 해봐서 알아.”

좋은 마음에서 시작된 말이지만

때로 상대에게 필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조금의 여백일지도 모릅니다.


디자인도 모든 문제에 답을 적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는 질문만 남겨도 됩니다.

사람이 선택하고,

해석하고,

바꾸고,

자신의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디자인을 덜 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를 더 믿는 디자인입니다.


우리는 완성도를 높인다는 이유로 자꾸 무엇인가를 더합니다.

시설을 하나 더 놓고,

안내문을 하나 더 붙이고,

기능을 하나 더 추가합니다.

하지만 디자인이 성숙할수록

다른 질문도 필요합니다.

“무엇을 더할까?”가 아니라
“무엇을 남겨 둘까?”


좋은 디자인에는 때로

디자이너의 흔적보다

사람들의 흔적이 더 많이 남습니다.

아이들이 뛰어다닌 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옮겨 놓은 의자,

시민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사용법.

그것은 디자인이 실패한 흔적이 아니라

어쩌면 디자인이 살아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좋은 디자인을 볼 때

무엇이 있는지만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무엇을 비워 두었는지,
그리고 그 빈자리를 사람들이 어떻게 채우고 있는지
도 함께 보려고 합니다.

디자인의 슬롯적 가치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데서만 생기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스스로 디자인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돌려주는 것.

그것 역시 중요한 변화입니다.



오늘의 깨달음

좋은 디자인은 모든 것을 완성해서 건네주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방식으로 완성할 수 있는 여백을 남겨 둡니다.



오늘의 사유

오늘 자주 사용하는 공간 하나를 바라보세요.

원래 계획된 용도와 다르게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곳이 있나요?

그 행동을 ‘잘못된 사용’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한번 질문해 보세요.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사용하고 있을까?”

그 안에 다음 디자인의 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함께 사유해 볼 질문

우리는 사람을 위한 디자인을 한다면서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까지 너무 많이 결정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해석하고 바꿀 수 있는 여백을 우리는 얼마나 남겨 두고 있나요?



English Summary

We Don't Have to Design Everything

Good design does not always fill every space or determine every behavior.

Sometimes leaving room for people to choose, interpret, adapt, and create their own ways of using something produces a richer experience.

An open space is not necessarily unfinished.

It may be an invitation for people to complete the design themselves.



Keywords

Open-Ended Design
Flexible Space
User Participation
Adaptability
Public Design
Co-Creation
Social Value 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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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는 질문에서 시작되고, 디자인은 변화에서 완성된다.

디자인은 무엇을 만들었는가보다 무엇을 변화시켰는가로 평가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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