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9 │ 슬롯적 가치 디자인까지 49일
서류 한 장을 발급받기 위해 반나절을 비워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관공서가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 찾아가고, 번호표를 뽑고, 차례를 기다린 뒤 필요한 서류를 받아 다시 돌아왔습니다.
정작 서류를 발급받는 데 걸린 시간은 몇 분이었지만, 그 몇 분을 위해 우리는 훨씬 많은 것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이동하는 시간,
기다리는 시간,
주차할 곳을 찾는 시간,
때로는 온라인 게임에서 잠시 자리를 비우거나 휴가를 내야 하는 시간까지.
우리는 그것을 오랫동안 행정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일이 달라졌습니다.
집에서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고,
휴대전화로 민원을 신청하며,
처리 과정을 확인하고,
결과를 온라인으로 받아볼 수 있는 공공서비스가 늘어났습니다.
달라진 것은 단순히 종이가 화면으로 옮겨간 것이 아닙니다.
행정을 이용하기 위해 시민이 지불해야 했던 보이지 않는 비용이 줄어든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비용이라고 하면 돈을 먼저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민이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에는 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도 비용이고,
이동도 비용이며,
복잡한 절차를 이해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도 비용입니다.
같은 정보를 여러 번 작성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 전화번호를 찾아 헤매는 수고도,
누군가에게는 분명한 비용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비용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관공서까지 20분을 이동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간단한 외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를 돌보는 사람에게는 외출 준비부터 달라집니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에게는 이동 자체가 큰 부담이 될 수 있고,
평일에 자리를 비우기 어려운 온라인 게임인에게는 업무 일정을 조정해야 하는 일이 됩니다.
같은 행정서비스를 이용하지만,
사람마다 지불해야 하는 삶의 비용은 다릅니다.
그래서 좋은 행정은 단순히 절차가 정확한지를 넘어 질문해야 합니다.
"시민은 이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행정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꿉니다.
몇 단계의 절차가 필요한지보다,
그 과정에서 시민이 몇 번 이동해야 하는지,
같은 정보를 몇 번 입력해야 하는지,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를 살펴보게 합니다.
행정의 절차가 아니라 시민의 경험을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비스디자인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입니다.
새로운 서비스를 하나 더 만드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서비스에서 불필요한 과정을 발견하는 것.
시민이 반복해서 해야 하는 일을 줄이고,
여러 곳을 찾아다니던 일을 한곳에서 해결할 수 있게 하며,
어려운 절차를 처음 이용하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바꾸는 것.
디자인은 무언가를 더하는 일만큼이나,
불필요한 것을 덜어 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서비스를 온라인으로 옮긴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디지털 기기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있고,
인증 과정이 어려운 사람도 있으며,
누군가의 설명을 직접 들었을 때 더 안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공공서비스는 하나의 편리한 방법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온라인이 편한 사람에게는 온라인을,
직접 설명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대면 서비스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충분한 지원을 제공해야 합니다.
효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택할 수 있는 환경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무엇을 더 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먼저 이야기합니다.
더 빠르게 처리할 수 있고,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으며,
더 편리하게 연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슬롯적 가치를 생각하는 디자인이라면 질문이 조금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사람은 무엇을 돌려받았는가?"
누군가는 한 시간을 돌려받았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휴가를 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아이를 데리고 먼 곳까지 이동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또 누군가는 복잡한 절차 앞에서 느끼던 막막함을 조금 덜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행정서비스가 시민에게 돌려주는 것은 단순한 편리함이 아닙니다.
시간이고,
선택권이며,
때로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여유입니다.
좋은 디자인의 성과를 새로운 시설이나 기술의 숫자로만 평가한다면 이런 변화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질문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만들었는가보다,
무엇을 줄였는가.
얼마나 빨라졌는가보다,
누구의 부담이 줄어들었는가.
그리고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했는가보다,
시민에게 무엇을 돌려주었는가.
이 질문을 시작할 때 디자인의 슬롯적 가치는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오늘의 깨달음]
좋은 디자인은 새로운 것을 계속 더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불필요하게 지불하던 삶의 비용을 줄이고, 그만큼의 삶을 다시 돌려주는 일입니다.
[오늘의 사유]
오늘 하루를 돌아보세요.
무언가를 이용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이동하거나, 반복하거나, 기다리거나, 애써야 했던 순간은 없었나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 과정은 정말 필요한 것이었을까요?
[함께 사유해 볼 질문]
우리가 만드는 행정과 서비스는 시민에게 무엇을 제공하고 있는지만 살펴보고 있나요?
아니면 그것을 이용하기 위해 시민이 무엇을 지불하고 있는지까지 바라보고 있나요?
English Summary
Design Can Give Citizens Their Time Back
The hidden cost of public services is not limited to money.
Citizens also pay with their time, travel, effort, repetition, and sometimes even opportunities in their daily lives.
Human-centered public service design asks not only what a service provides, but also what burdens it removes.
Perhaps one of the most meaningful measures of good design is this:
What did citizens get back?
Keywords
Public Service Design
Administrative Design
Citizen Experience
Invisible Cost
Digital Public Service
Human-Centered 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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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는 질문에서 시작되고, 디자인은 변화에서 완성된다.
디자인은 무엇을 만들었는가보다 무엇을 변화시켰는가로 평가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