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나 긴 이야기
질문에 대한 두 가지의 측면을 생각해 봤다. 질문을 하는 것이 상대를 화나게 하는 경우가 있고, 질문을 했는데 상대가 화를 내서 질문을 하는 사람 역시 화가 나는 경우 말이다. 이 두 가지의 상태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몇 년 전 병원에 가서 안 좋은 경험을 한 이후로 의료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갖게 되었고, 가치의 불균형에 대해 이해와 공감을 하는 부분이 있었다. 분야는 다르지만 안 보이는 지적 가치와 경험, 그리고 통찰에 대한 보상이 적거나, 숫자로 된 보상이 적어도 그다지 불만족스럽지 않았던 상황, 혹은 그와 반대로 보상은 적절한 듯하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불쾌함으로 아예 이를 회피하게 되는 상황, 가치에 대한 보상을 가치를 제공하는 자가 아니라 현실감 없는 제도에 의해 통제받는 상황에 대해서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가치에 대한 보상의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나도 내가 일을 하면서 접하는 상대의 질문과 태도에 대해서 어쩌면 비슷한 이유로 불편하고 불쾌한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불쾌함은 이전의 불편했던 경험의 축적으로 인한 일종의 과잉 방어반응인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가능한 어떤 것의 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을 때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상황을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이래도 저래도 늘 나만 이해하고 공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스스로는 제때에 상대에게 불쾌감의 표현도 하지 못하고 나 자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내가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상대가 불필요한 방어 반응이 유발되지 않도록 상대의 기분과 상황까지 최대한 다 고려하며 시뮬레이션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노력과 진심까지도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들과 똑같이 무차별적인 선상에서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 때에는 좀 억울한 면이 있다. '당신이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 존중과 예의심을 갖춰 질문을 하는 건데, 왜 과잉 불친절로 나를 대하는 건가요?'라는 호소를 하고 싶은 경우 말이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늘 '어련히 알아서 할까'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는데, 나는 그때 '어련히'라는 말의 의미를 몰랐을 뿐 아니라, 뭔가 핀잔을 줄 일이 있을 때 그 말을 자주 했기에 그 단어를 듣기 싫어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단어는 당시 '어른이'로 들려서 내가 싫어하는 '어른'이라는 단어와 결부되어 더 싫은 어감으로 들리기도 했다. 요즘 그 단어가 종종 떠올려진다. '어련히 알아서 할까'라는 생각 말이다.
나도 질문하는 자의 입장에 있어보기도 하기에, 그런 질문들이 꼭 상대를 신뢰하지 않아서라든가, 무례하려는 의도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몇 번의 부정적인 경험을 한 이후에는 마치 트라우마처럼 상대의 질문에 대해 방어적 태세를 취하며 불편해지는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나의 전문성이나 경험, 통찰에 대해 신뢰하지 않거나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 태도,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아는지에 대한 무지함에서 어떤 질문이나 발언을 해서 나의 기분이 불쾌해지는 상황은 앞으로도 종종 맞닥뜨려질 것이다. 상대의 질문을 가급적 부정적으로 느끼지 않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지만, 사람을 한 번에 판단할 수도 없고, 예상치 않았지만 그런 상황에 어쩌다 놓여있게 되는 것을 모두 회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유무형의 가치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가격이라는 숫자로 제시하는 것을 매우 어려워한다. 돈얘기를 꺼내는 게 천박한 일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나도 자본주의에서 돈은 가치의 교환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인식쯤은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상대가 '얼마냐'라고 물어보는 질문에 편히 대답을 하지 못한다. 미리 가격을 산정하고 메모를 하는 등의 노력을 하지만, 여전히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쳤어도 불편함을 다 떨쳐내지는 못한다.
예전에 어떤 심리상담자가 이와 비슷한 고민에 대해 다른 상담자를 통해 상담을 받았다는 일화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그 심리상담자는 돈 얘기를 대신해 주는 대리인을 구하라는 조언을 받고 그 문제를 해결했다고 했다. 사람들이 내게도 그런 매니저가 있어야 한다고 조언을 하곤 한다. 요즘은 Ai에게 그 역할을 대신 물어보기도 했는데, 당연히 Ai가 정리해 준 답변은 논리적으로는 명료한 듯 보였으나, 역시나 이번에도 나의 가치를 Ai가 검색을 통해 객관화시켜 준 숫자만큼 상대에게 제시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의 가치를 폄하하거나 자신감이 없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상대적으로 낮게 제시한 숫자에 대해 이후 내 기분이 불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가치는 돈으로 산정이 된다고 흔히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게 매겨진 보상의 가치가 꼭 나의 가치를 그대로 대변한다고 말하기에는 뭔가 심상찮은 부분이 있다고 느낀다. 내가 숫자를 낮추면 세상은 대부분 결국 딱 그 숫자만큼 나를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성향을 접했던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역시나 다음번 똑같은 상황이 와도 내가 편히 가격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나는 나의 상황을 가능한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려고도 노력했다. 내가 피겨 스케이팅을 배우러 다녔을 때, 대중에게 알려질 만큼의 인지도와 경력이 있는 강사가 강습료에 대해 내게 언급할 때 그가 직접 돈얘기를 꺼낸다고 해서 그게 뭔가 격이 없어 보였다던가, 그가 대단히 겸손하고 조심스러운 자세로 숫자에 대해 언급한다던가, 그의 당당함이라는 것에 해를 끼치는 어떤 느낌을 주는 것처럼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 강사처럼 나도 나에 대한 가치를 미리 정하고, 누군가 내게 가격을 물어올 때 그대로 숫자를 말하면 몇 초도 걸리지 않을,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일이었다. 심지어는 나도 내 분야에서는 나름의 성취와 훨씬 더 많은 경력과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상하게 그게 나의 일인 경우에는 잘 안 되었다.
나는 누군가 내게 가격을 요구하면 대개의 경우 이를 매우 존중하고 한 치의 흥정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상대의 가치가 그만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고, 심지어는 대부분의 경우 내가 돈이 많거나 적거나에 상관없이 상대의 가치보다 오히려 적어 보여서 대단히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들게 된다. 결론적으로 상대에게 줄 때에도 흔쾌히 주고, 내 가치를 퍼줄 때에도 흔쾌히 주는데, 이상하게 내가 타인에게 서비스나 돈을 받아야 할 일이 있을 때에는 나만 겸손하고 작아지는 경우를 경험한다. 내가 상대라면 그만큼의 가치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나의 가치를 산정할 때만, 세상 위축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바보 같은 나에게 계속 화가 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뿐인가? 심지어는 타인을 나처럼 대입해서 실컷 대접해 주고는 제대로 그에 대한 서비스를 제공받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간사하게도 잘해 줄수록 나를 호구로 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쓰지도 못할 사진파일을 제공한다든가, 무용실 거울을 엉뚱하게 붙여 놓는다던가, 오히려 남들에게 다 제공하는 서비스도 내게는 주지 않던가 말이다.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건, 내 태도가 마치 돈을 주고도 '을'이 된 것 같은 상황이 많았다는 것이었다. 나를 위해 서비스를 신청하고 비용을 지불했으면서 상대가 나를 위해 서비스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들을 마치 대접하는 듯한 마음과 태도가 되어 내 노고만 쌓여가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상대를 대접하면 상대도 그 마음을 알아주고 더 좋은 결과를 내어줄 즐 알았는데, 대부분은 더 무례해져만 갔다. 남보다 더한 비용을 지불하고 대접은커녕 그 비용이 약속하는 서비스보다 늘 손해를 보는 격이었다. 이게 피해의식에서 나온 나만의 생각처럼 들리는가? 누군가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굳이 아니라고 설득하고 싶지는 않지만, 실제로 그랬다.
냉철한 사실을 짚어보자면, 이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겐 더 적은 금액으로도 더 나은 태도와 서비스를 제공해서 어쨌든 망하지 않고 영업을 영위하는 사람들이었기에, 분명 내가 이런 상황을 만드는데 원인을 제공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역시나 그게 뭔지 잘 몰랐을 뿐 아니라, 짐작은 하지만 납득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납득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매번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왜 늘 스스로를 이런 상황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걸까 스스로를 바카라망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이유로 사람들을 상대하기보다 차라리 내가 그 모든 것들을 혼자 하는 방식을 택했다. 실제로 일도 내가 더 빨리 잘했으며, 시간이 모자랄 뿐, 그 일들을 하는 과정조차 내겐 재미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또 타인에 대한 바카라망이 계속되었다. 왜 자신의 일을 즐기지 못하는가? 왜 제대로 된 가치를 지불했는데 알아서 해 주지 못하고 불성실한가? 왜 타인은 나와 같지 않는가? 그게 잘못된 질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나는 나를 설득시키고 납득하기 위해 수많은 질문들과 사례들을 내게 퍼부었다: 어떤 곳은 꼭 가격이 낮다고 상대를 낮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야. 소위 꼭 저렴하거나 아주 높은 가격에 무엇을 제공하지 않는 가성비가 있으면서도 여전히 존중받는 곳과 사람들도 있어. 반대로 가격이 높다고 상대의 가치가 꼭 그와 마찬가지로 평가되는 것도 아니야. 여러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고 대답을 찾으려 했고, 그중 여러 가능성 있는 대답을 스스로 찾았다고 생각했으나, 그것들이 모두 오답이었음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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