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은 왜 여성의 판타지가 되었는가?

남자들의 사랑을 사랑하는 여자들

by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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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이 매주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을 내어 5천 원에서 1만 원가량을 결제합니다. 무엇을 사느냐 묻는다면, 남자 둘이 사랑하는 이야기를 산다고 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본인의 성적 지향은 이성애자입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굳이 자신과 무관한 두 남자의 키스 장면에 카드를 긁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BL (Boy's Love): 남성 간의 사랑을 다루는 장르를 뜻합니다.

GL (Girl's Love): 여성 간의 사랑을 다루는 장르를 뜻하며, 흔히 '백합(百合)'이라고도 불립니다.


처음에는 중학교 1학년 무렵이였습니다. 친구가 단톡방에 던져준 소설 한 편을 우연히 클릭한 것이 시작이었다고. 그 이후로 애니메이션 동인지를 거쳐 웹소설로, 다시 웹툰으로 자연스럽게 넘어왔습니다. 25세가 된 지금까지 그녀는 매주 BL을 봅니다. 그리고 그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연구진이 BL 웹툰 독자 500명을 모집하던 도중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전체 독자의 77.8퍼센트가 이성애자 여성이었습니다. 게이가 아니라 여성, 그것도 이성애자 여성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지에 실린 이 연구 결과는 오늘날 한국 BL 시장의 실제 풍경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통계 중 하나입니다.


이쯤 되면 질문 하나가 떠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본인이 사랑할 일도, 사랑받을 일도 없는 두 남자의 사랑을 왜 그녀들은 그토록 열심히 보고 있는 것일까요? 서점에 가면 BL섹션이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단순한 취향의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이 현상이 너무 거대하고, 너무 일관되며, 너무 뚜렷합니다.


덕들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쪽 동네의 풍경은 더 이상 음지가 아닙니다. 2022년 왓챠에서 BL 웹드라마 〈시맨틱 에러〉가 시청 순위 1위를 기록했습니다. 누가 보았느냐 하면, 이성애자 여성들이 보았습니다. BL은 더 이상 비공개 동인 커뮤니티에서 몰래 유통되는 비밀스러운 콘텐츠가 아닙니다. 정식 출판되고, 실사화되고, OTT 플랫폼에서 검색 1위를 찍습니다. 살아생전 BL 소설이 드라마화되는 것을 볼 줄 몰랐다는 한 팬의 댓글은 이 변화의 속도를 정확히 증언합니다.


흥미로운 통계가 하나 더 있습니다. 영국 레스터 대학교의 연구자 루시 네빌은 275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포르노 시청 패턴을 조사했습니다. 결과를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응답자의 82퍼센트가 다른 장르보다 게이 남성 포르노를 선호한다고 답했습니다. Pornhub의 자체 통계 또한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게이 포르노를 69퍼센트 더 자주 시청합니다. 픽션이든 실사든, 한국이든 영국이든, 결과는 비슷합니다. 여성은 남자들끼리의 사랑에 끌립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게이 영화나 BL 웹툰을 보는 여성을 두고 흔히 동성애에 호의적인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시선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대단히 게으른 해석입니다. 호의의 문제가 아닙니다. 매혹의 문제입니다. 누군가의 인권을 지지하는 일과, 그들의 사랑을 자신의 욕망의 무대로 빌려오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매혹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는 우리가 매일 무심코 소비하는 평범한 이성애 로맨스의 구조부터 다시 들여다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BL이 매혹적인 진짜 이유는 BL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BL 바깥,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성애 서사의 풍경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한 번도 카메라가 되어본 적이 없습니다


영화 이론가 로라 멀비는 1975년에 한 가지 개념을 정립했습니다. 남성적 시선, 영어로는 male gaze라고 부르는 개념입니다. 영화의 카메라는 누구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가? 멀비의 답은 단호했습니다. 거의 언제나 남성의 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성의 신체가 화면에 등장할 때 카메라는 그 신체를 천천히 훑습니다. 다리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입술로. 카메라는 욕망의 시선을 가지고 있고, 그 시선은 거의 예외 없이 남성의 것입니다. 여성 관객은 이 시선에 동조하거나, 자신을 화면 속 여성과 동일시하거나, 둘 중 하나를 강요받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녀는 시선의 주체가 아닙니다. 시선의 객체이거나, 시선을 빌려 쓰는 사람일 뿐입니다.


이성애 로맨스의 구조도 다르지 않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발견하고,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가고, 남자가 여자를 욕망합니다. 여자는 발견되고, 다가와짐을 당하고, 욕망의 대상이 됩니다. 능동과 수동의 자리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습니다. 한 시대 전체의 멜로 드라마와 로맨스 영화가 이 도식 위에서 작동해왔습니다.


그런데 BL을 펼쳐보면 풍경이 달라집니다. 거기에는 여자가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객체로서의 여자가 없습니다. 두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욕망하고, 서로를 만집니다. 그렇다면 카메라는 누구의 시선입니까. 그 시선은 처음으로 비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여성 독자가 들어갑니다.


이성애 로맨스에서 여성은 늘 찍히는 쪽이었습니다. BL은 그녀에게 처음으로 카메라를 쥐여줍니다. 이 단순한 자리바꿈이 만들어내는 해방감은 생각보다 깊고 또한 즉각적입니다. 어떤 여성 독자들은 이 해방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자신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 채 다만 끌릴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끌림의 정체는 사실 단순합니다.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시선의 주인이 되어보는 경험. 그것이 BL이 주는 첫 번째 해방입니다.


두 남자라는 평평한 운동장


또 하나의 구조적 차이가 있습니다. 이성애 로맨스 안에는 우리 슬롯 전체의 젠더 권력 구조가 압축되어 들어와 있습니다. 누가 먼저 고백하는가? 누가 데이트 비용을 내는가? 누가 결혼 후 경력을 포기하는가? 누가 가사 노동을 부담하는가? 누가 임신하고 출산하고 양육의 일차적 바카라임을 지는가?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안에 가부장제의 모든 압력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습니다. 그 그림자는 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BL은 이 구조를 일거에 무력화합니다. 두 사람이 모두 남성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BL 안에도 공과 수, 즉 능동과 수동의 역할 분담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분담은 슬롯 구조에 의해 외부에서 강요된 것이 아니라 캐릭터 개개인의 개별적 성향으로 그려집니다. 키 큰 공이 키 작은 수를 보호하는 장면은 등장하지만, 그것은 키 큰 자가 키 작은 자를 보호하는 일일 뿐 남성이 여성을 보호한다는 거대한 슬롯적 서사의 압력으로부터는 자유롭습니다. 여성 독자는 이 차이를 본능적으로 감지합니다.


고려대 연구진은 한 가지 흥미로운 분석을 덧붙입니다. BL의 주된 생산자가 여성, 그것도 동성애자가 아닌 여성이기 때문에 BL 안에서 묘사되는 동성애적 관계가 사실상 이성애적 관계의 변주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즉 BL 속의 두 남자는 실제 게이의 삶이 아니라 여성이 꿈꾸는 이상적인 관계성을 입은 마네킹에 가깝다는 분석입니다.


이 지적은 BL의 핵심을 정확히 짚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BL에서 보는 것은 게이의 현실이 아닙니다. 그녀들이 보는 것은 가부장적 이성애의 무거운 압력에서 비로소 풀려난 사랑의 풍경입니다. 두 남자라는 형식은 그 해방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BL은 동성애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부장제 바깥의 사랑이 어떤 모습일 수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픽션이라는 이름의 안전 가옥


세 번째 이유로 넘어갑니다. 한국 슬롯에서 여성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여전히 위험합니다. 노골적으로 욕망을 말하는 여성은 헤프다는 평가를 받고, 자신의 쾌락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여성은 이기적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슬롯적 압력은 생각보다 끈질기며,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여성들의 일상을 작동시키는 보이지 않는 통제 장치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BL 안에서는 그 압력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페이지 위의 두 남자는 어떤 자세를 취해도, 어떤 욕망을 드러내도 여성 독자에게 직접적인 슬롯적 비용을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상의 인물입니다. 게다가 여성도 아닙니다. 즉 BL은 여성이 자신의 성적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도 여전히 슬롯적으로 안전할 수 있는 픽션의 안전 가옥인 셈입니다.


한국 BL 소설의 섹슈얼리티를 다룬 한 학술 논문은 이 지점을 정확히 포착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BL은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에 대해 말하고 표현하는 공간으로 기능해왔다. 단순한 한 문장이지만 함의는 깊습니다. 욕망을 가지지 못해서가 아니라 욕망을 말할 자리가 없어서, 한국의 여성들은 남자들끼리의 사랑이라는 우회로를 발명했다는 것입니다. 우회로는 본래의 길이 막혔을 때 만들어집니다. BL의 인기는 본래의 길, 즉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직접 말할 수 있는 공적 통로가 한국 슬롯에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의 거대한 증거입니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현상도 아닙니다. 네빌의 연구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발견이 하나 있습니다. 조사에 응한 여성의 55퍼센트가 게이 포르노를 볼 때 자신을 남성으로 상상한다고 답한 것입니다. 이 수치는 앞서 살펴본 두 가지 이유를 단번에 압축합니다. 여성들은 카메라를 쥐고 싶었고, 젠더 권력 바깥의 자리에 앉아보고 싶었습니다. 게이 포르노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허락하는 거의 유일한 장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소품이 됩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BL이라는 장르가 여성에게 부여한 해방의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BL의 주된 생산자도 여성, 주된 소비자도 여성. 그렇다면 BL이 그토록 열심히 묘사하는 실제 게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정확히 말하자면 실제 게이는 BL 안에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BL 속의 게이는 여성의 욕망을 위해 정성껏 조형된 캐릭터에 가깝습니다. 외모는 잘생기고, 매너는 다정하며, 감정은 섬세하고, 슬롯적 박해는 적당한 비극의 양념으로만 등장합니다. 이는 마치 잘 차려진 한정식과 같습니다.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그것이 실제 누군가의 식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BL장르에는 "게이 친구 판타지(GBF, Gay Best Friend Fantasy)"가 등장합니다. 이건 서구에서도 오래된 비판입니다. 이성애자 여성이 꿈꾸는 이상적인 게이 남자친구의 스테레오타입이 있습니다.


"패션 감각 있고, 감수성 풍부하고, 여자처럼 속 얘기 나눌 수 있으며, 연애 경쟁자가 되지 않는 남자"


이 판타지 속의 게이는 실제 사람이 아니라 기능입니다. 여성의 필요를 채워주는 역할을 하되, 자기 자신의 복잡한 삶, 차별, 고통은 배경으로 밀려납니다. BL도 마찬가지입니다. BL 속 게이 캐릭터들은 여성 독자의 욕망과 감정을 투영하는 그릇으로 기능할 뿐, 실제 게이 커뮤니티가 경험하는 현실 — 군형법, 온라인 게임 내 아웃팅, 가족 갈등 — 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지점에서 불편한 질문 하나가 등장합니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 영화에서 게이인 흥수는 무척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다정하고, 섬세하고, 여주인공 재희의 곁을 한결같이 지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면 한 가지 사실이 눈에 걸립니다. 흥수의 이야기는 결국 재희가 성장하는 배경으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흥수가 겪는 커밍아웃의 두려움, 가족에게 말하지 못하는 고통, 슬롯의 시선 — 이 모든 것이 흥수 자신의 이야기로 깊이 파고들지 않고, 재희가 더 넓은 사람이 되는 데 필요한 재료로 소비됩니다. 흥수는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을 빛내는 소품에 가깝습니다.


BL도 다르지 않습니다. BL 속 두 남자는 잘생기고 다정하며 감정이 풍부합니다. 그러나 실제 한국의 게이들이 겪는 현실 — 군형법, 온라인 게임에서의 아웃팅, 가족의 외면 — 은 BL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야기에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자가 원하는 것은 현실의 게이가 아니라, 여성의 판타지를 채워주는 게이이기 때문입니다. 이 판타지 속의 게이는 사람이 아니라 기능입니다.


여성이 BL을 통해 얻는 해방감은 분명히 실재합니다. 그러나 그 해방감의 일부가 실제 게이의 삶을 소품화하는 비용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 또한 외면할 수 없습니다. 여성이 카메라를 쥐는 그 순간, 그녀가 찍고 있는 두 남자는 누구의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까? 자신의 삶입니까? 아니면 여성이 꿈꾸는 사랑의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입니까? 이 질문은 BL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죄바카라감을 안기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콘텐츠를 사랑할 때, 그 사랑의 대가가 누구에게 청구되고 있는지를 한 번쯤 들여다보자는 제안입니다.


해방은 종종 다른 누군가의 자리를 잠시 빌려서 이루어지곤 합니다. 그것이 모든 해방의 죄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 빌림의 사실을 기억하지 않은 채 해방을 자축하는 일은 또 다른 종류의 무례가 될 수 있습니다.


판타지라는 이름의 도피


사람이 무엇을 꿈꾸는지를 보면, 그가 무엇을 갖지 못했는지가 보인다. 이 문장은 BL이라는 장르 전체에 대한 가장 정확한 진단이기도 합니다.


여성들이 BL에서 찾는 것을 다시 정리해봅니다. 시선의 주체가 되는 자리. 젠더 권력에서 자유로운 평등한 관계. 슬롯적 비용 없이 자신의 욕망을 펼칠 수 있는 안전한 공간. 자신의 쾌락이 중심에 놓이는 서사. 이 네 가지를 모두 아울러서 한 단어로 줄이자면 자유입니다.


문제는 이 자유의 목록을 거꾸로 뒤집어 읽었을 때 드러나는 풍경입니다. 한국의 이성애자 여성은 시선의 객체이며, 젠더 권력의 약자이며,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데 슬롯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며, 자신의 쾌락이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서사 안에 살고 있습니다. BL이 여성에게 주는 자유는, 여성이 현실에서 누리지 못하는 그 자유입니다. 판타지의 모양은 결핍의 모양과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그렇기에 BL의 폭발적인 인기를 단순한 취향의 유행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한국 슬롯 이성애 서사의 빈자리에 대한 거대한 집단적 항의이자, 그 빈자리를 우회로로 메우려는 절박한 발명입니다. 누군가는 그 우회로를 찾아 매주 1만 원을 결제하고 있는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중학교 1학년 때 단톡방에서 우연히 받은 소설 한 편으로 자신의 세계관 전체가 바뀌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오늘도 보십니까?


숫자로 보면 이 현상의 규모가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국내 대표 전자바카라 플랫폼 리디는 BL을 포함한 여성향 콘텐츠를 앞세워 2021년 매출 2,000억원대에 진입했습니다. 네이버시리즈에서 서비스 중인 BL 웹툰은 현재 1만 535개로, 전체 웹툰의 20.5퍼센트를 차지합니다. 웹툰 다섯 편 중 하나가 BL입니다. 국내를 넘어 일본의 대표 여성향 콘텐츠 플랫폼 '렌타'의 연간 매출은 2,000억에서 3,000억원 수준으로 추산됩니다. BL은 더 이상 소수의 취향이 아닙니다. 하나의 산업입니다.


GL, 즉 여성 간의 사랑을 다룬 콘텐츠 시장은 아직 별도의 수치가 집계되지 않을 만큼 신생 단계입니다. 2025년 웨이브가 국내 최초 GL 예능 '너의 연애'를 공개한 것이 GL의 지상파 진입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읽힙니다. BL이 음지에서 시작해 2,000억원 산업이 되기까지 약 20년이 걸렸다면, GL은 그보다 빠른 속도로 시장을 열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두 시장의 격차는 단순한 인기의 차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여성 독자들이 BL에 먼저 안착한 뒤, 이제 GL이라는 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지형도입니다.


당신이 BL을 본다면, 혹은 보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보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다면, 그녀가 거기서 무엇을 찾고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세요. 그녀는 단순히 잘생긴 두 남자를 구경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자신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시선의 자리에 앉아보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평등한 사랑의 풍경을 페이지 위에서 겨우 만져보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한 번도 슬롯적 비용 없이 펼쳐보지 못한 욕망을 비로소 안전하게 풀어놓고 있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꿈꾸는지를 보면, 무엇이 결핍인지가 정확하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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