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변 과장은 100일 동안 양재천을 뛰기로 했다.

서공양_#11

by달dal

이사 날 아침이 왔다. 포장이사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옮길 짐을 박스에 싸고 나니 큰 이사 박스로 3개가 전부였다. 그리고 내 여행용 캐리어 하나. 용달차를 부를 필요도 없었다.


'비운다는 건 어쩌면 더 편리해지는 방법인지 모르겠다.'


집 앞으로 부른 조금 큰 택시에 짐을 싣고 조용히 살던 그 집을 나왔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고 나오면 그 자리에 뱀의 모양 그대로 허물이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시간 속에서 나만 쏙 빠져나왔다.


'3년 남짓 살았던 집인데, 여기에 나의 상처, 안 좋은 기억, 우울, 절망 같은 것들만 잔뜩 두고 가서 미안해. 그런데 지금은 여기에 모두 두고 가야 할 것 같아.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아. 이 집에서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그때마다 조용히 혼자 있게 해 줘서 고마웠어. 잘 있어.'


나는 물건이든 사람이든 쉽게 곁을 주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시간이 좀 걸려도 내 물건이다 혹은 내 사람이다 생각이 들면 그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지면서 그것들을 내 안의 깊고 넓은 바다에 풍덩 던져 빠지게 만들어 버린다. 아, 물론 상대가 원하면 말이다. 그리고 그 바닷속 깊은 곳은 밖에 비가 오고, 태풍이 불어도 언제나 고요할 뿐이다. 물건이나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나 깊이에 대해 어떤 것이 맞는 것인지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그런 바다 같은 습성을 가진 사람일 뿐이었다. 내가 살던 집도 차차 내 안의 바닷속으로 던지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한껏 높아진 가을 하늘 아래 나와 내 짐을 실은 택시는 열심히 달릴 뿐이었다.


그렇게 양재천이 보이는 새로운 집에 들어왔다. 대학생 시절 가끔 산바카라하던 그곳. 그때는 몰랐다. 이곳이 내가 다시 살아나는 장소가 될 줄은. 지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나름 깔끔하게 관리된 집이었다. 나는 이사 박스 3개와 캐리어를 현관 앞에 그냥 쌓아두고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10월 초 유독 뜨거웠던 여름이 물러나고, 차분해진 가을이 찾아온 그 풍경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 살짝 설레기도 했다.


높은 곳에서 한참을 그 가을을 내려보던 나는 짐 정리를 시작했다. 부엌에 전기포트, 에어프라이어, 커피머신을 두고 테이블 위에 노트북 그리고 이동형 TV 정도를 정리하니 큰 짐은 대충 정리되었다. 이사 박스 3개. 내가 준비한 건 딱 그것뿐이었다. 요가복, 운동화, 노트북, 커피머신. 새 삶을 시작하기엔 너무 간소한 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가벼웠다.


바카라상에 앉아 다이어리를 꺼냈다. 나는 매년 연말, 다음 해에 쓸 다이어리를 미리 사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혼자 오래 방치되어 색이 바랜 듯한 올해 다이어리도 작년 연말엔 꽤나 희망을 품고 샀던 기억이 났다. 앞의 몇 개월 동안 깨끗이 비워져 있는 종이를 넘기고 오늘 날짜를 찾아 아주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어색했지만 꼭 해야 할 일이었다.


오늘 양재천이 보이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왔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들을 이 종이 위에 모두 적을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들은 내가 이곳에서 달리는 100일 동안 천천히 만나고 또 보내주면 되는 것들이니까.


'이 달리기가 끝난 후는 모르겠다. 사실 지금은 알고 싶지 않다.

어차피 나는 지금 망했다. 더 망할 게 있나? 없다. 지금 내가 여기서 달리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나? 없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 이 모든 일은 널 위해 일어났다고 믿자.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이 복잡하고 다소 아픈 과정이 결국 어딘가로 널 데려다줄 거라고 믿자. 그 지점이 어디인지는 지금은 몰라도 괜찮아.


서른일곱 살, 나는 앞으로 100일 동안 양재천을 뛰기로 했다.

2025년 10월 27일 양재천이 보이는 새집에서'


나는 이 집에서 지낼 스케줄을 정했다. 요가는 아침 6시, 달리기는 저녁 6시. 요가로 하루를 열고, 달리기로 하루를 닫는다. 요가는 주 3회 월, 화, 수로 하고, 달리기는 앞으로 100일 동안 매일 하기로 마음먹었다. 요가는 주 3회로 충분했다. 하지만 달리기는 매일이어야 했다. 매일 달려야 내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25년 10월 27일에서 100일 후는 2026년 2월 3일이었다.


‘100일이라는 시간은 과연 인간을 치유할 수 있는 시간일까?’


초가을에 온갖 불안과 불안정함으로 시작한 나의 레이스가 추운 겨울을 거쳐 봄의 새싹이 꿈틀거릴 때쯤 끝난다는 생각을 하니, 그때쯤이면 나도 예전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그 기대 반, 두려움 반의 감정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달리기 1일째]

가벼운 운동복과 원래 가지고 있던 운동화를 신고 나갔다. 러닝화를 준비할까도 싶었지만, 있던 물건도 버리던 나에게 새로운 신발을 주문할 여력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 나에겐 달리기 할 힘 딱 그 정도만 남아 있었나 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심장이 두근거렸다. 설렘이 아니었다. 불안이었다. 정말 내가 달릴 수 있을까? 몇 걸음 못 가 포기하고 돌아오는 건 아닐까? 로비를 지나 건물 밖으로 나서자 10월 말 저녁 6시의 공기가 조금 차갑게 얼굴을 스쳤다. 해는 이미 기울어 가고 있었고, 하늘이 옅은 남색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양재천까지는 걸어서 3분 거리. 천천히 걸으며 몸을 풀었다. 아니, 사실 망설이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 양재천 산바카라로에 발을 딛는 순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강 위로 부는 바람이 차가웠다. 가을 냄새가 났다. 낙엽과 흙과 물의 냄새.


'자, 이제 뛰어보자.'


첫 발을 떼는 순간, 몸이 굳어있다는 걸 느꼈다. 오랫동안 방 안에만 웅크리고 있었던 탓일까. 다리가 뻣뻣했고 어색했다. 그래도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천천히 속도를 올렸다. 처음엔 걷는 것과 다를 바 없었지만, 점점 발이 땅을 차는 리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채 200미터도 못 갔을까. 금세 숨이 찼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고, 옆구리가 찌릿했다.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던 탓인지 아니면 내가 달리기에 소질이 없는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있는 힘을 모두 끌어내어 달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억지로 삼키며 악착같이 발을 내딛고 있었다.


'잠깐, 왜 이러고 있지?'


나는 문득 정신이 들었다.


'아, 나를 몰아붙이려고 누군가에게 보이려고 어떤 성과를 내려고 하는 달리기가 아니잖아. 숨이 찰 정도로 뛸 필요 없어.'


난 이내 달리는 속도를 줄였다. 아니, 거의 빠르게 걷는 정도로 속도를 낮췄다. 그제야 숨이 돌아왔다. 심장 박동도 천천히 안정을 찾아갔다. 이 정도면 괜찮았다. 내가 숨 쉬기 적당한 속도. 지금 나의 상태에 맞는 속도와 강도를 몸으로 익히고 있었다.


숨을 고르니 비로소 들리기 시작했다. 양재천 물 흐르는 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 자전거 지나가는 소리, 누군가의 웃음소리, 강아지 짖는 소리. 아, 세상이 이렇게 소리로 가득했구나. 얼마나 오랫동안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살았던 걸까.


여유 있는 호흡을 찾으니 양재천의 풍경도 보이기 시작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저녁 조깅을 하는 사람들, 강아지를 산바카라시키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모두 제 속도로 제 길을 가고 있었다. 나보다 빠른 사람도 있었고, 나보다 느린 사람도 있었다. 그게 다였다. 누구도 나를 보지 않았고, 나도 누구를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아, 이거구나.'


이것들이 다시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세상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딱딱한 운동화 밑창이 발바닥을 눌렀지만 괜찮았다. 다리가 뻐근했지만 괜찮았다. 숨이 거칠었지만 괜찮았다. 나는 지금 달리고 있었다. 아니, 빠르게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지금 멈춰 있지 않았다.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리가 무거워질 때쯤 다시 집 앞으로 돌아왔다. 손목의 스마트워치를 확인했다.

ü 거리: 2.8km/ 속도: 8:10' / 평균심박수: 151

내가 양재천을 처음 달리던 날의 기록이었다. 저 숫자를 아직도 기억하는 것 보면 그날의 기억이 나에게 꽤나 강렬하긴 했나 보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온몸이 뻐근했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 좋은 피로였다. 그날 잠들기 전 나는 생각했다.


'그래, 앞으로 딱 100번 매일 여기를 뛰어보자.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자.'


그때는 몰랐다. 2.8km가 3km가 되고, 5km가 되고, 결국 40km까지 뛰게 될 줄은.





"양재천을 처음 달리던 날, 그때 내가 신었던 운동화가 밑창이 얇고 바닥이 딱딱했더라고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달리기엔 최악의 신발이었던 거죠. 그래도 그날 기분이 어찌나 좋던지 지금도 생생해요.


혹시 달려 본 적 있어요? 아니면 달리고 싶었던 적은요?


막상 달리려고 하니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많을 수도 있고, 딱딱한 운동화밖에 없을 수도 있고, 몇 걸음 못 떼고 헥헥거리면서 멈출 것 같기도 한가요?


웃긴 이야기 하나 해드릴게요. 내가 양재천 처음 달리던 그날 사실 뛴 거 아니에요. 속도로만 보면 빠르게 걸었어요. 그런데 저는 제가 그날 엄청 뛰었다고 생각했다니까요. 이렇게 쉬워요. 내 마음을 속이기 가요. 내 마음을 속여 어떤 긍정으로 가고 싶을 때는 온몸의 세포와 근육 그리고 신경이 다 함께 한편이 돼요.


정말 우습죠?


걷고 달렸다면서 뿌듯해한 그때의 제 모습이요.

그런데, 그날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지금 당신을 만날 수가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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