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징가 주먹

유쾌한 착각여왕

by연글연글



뭐든 아끼다 결국 똥 만드는 선수인 내가, 유독 공을 들이는 일이 하나 있다. 바로 가족의 시간을 골라 액자에 끼우는 일이다.


살다 보니 옛 어른들 말씀이 다 맞다. “마음은 이팔청춘”이라는 말도,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도 요즘처럼 절절하게 와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 집 복도 벽에는 이케아 8구 액자 세 개가 나란히 걸려 있다. 40년 결혼생활을 통틀어 단 24장의 사진만 추려내는 작업은 거의 미스트롯 결승 심사 수준이었다. 놀라운 건, 사진보다 추억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한 장을 고르면 열 장의 시간이 줄줄이 따라 나왔다.

​겨우겨우 선별을 마친 뒤에는 부직포로 유리판을 닦고, 먼지 한 톨까지 신경 쓰며 배열을 맞췄다. 그렇게 완성된 복도의 사진들은 단순한 인테리어가 아니라 나의 ‘추억의 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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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나는 꼭 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그 순간 눈길은 사진에 꽂히고 마음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 든다. 사진 속에는 40년 동안 나만 아는 나의 노력과 시간들이 촘촘히 박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성역을 위협하는 악한 인물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게을킹’.

​외출 준비를 할 때 옷방에서 갈아입으면 될 것을, 그는 꼭 좁은 복도를 지나오며 웃옷을 벗는다. 그것도 얌전히 벗는 게 아니라 마치 킹콩이 헬리콥터를 쫓아내듯 양팔을 휘저으며 벗는다.

그리고 결국 사건은 터졌다.

“우장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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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을 뒤흔드는 날카로운 굉음에 뛰어나가 보니, 내 성이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액자는 금이 간 채 바닥에 처박혀 있었고, 액자가 떨어지며 훑고 지나간 벽지는 사정없이 긁혀있었다. 뽑힌 못은 아래 몰딩에까지 흉측한 상처를 남겼다.

참혹한 현장이었다.

순간 단전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늘 조심하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게을킹은 또 사고를 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너무 화가 나면 목소리는 오히려 낮아진다.

“왜 그렇게 팔을 휘저으면서 옷을 벗는 건데.”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남편은 실실 웃으며 장난스레 대답했다.

“팔이 너무 길어서.”
(길지도 않은 신장에 팔이 길면 오랑우탄이네.)


​그 순간이었다. 내 주먹이 남편의 코를 향해 그대로 날아가 꽂힌다. 이제 정신 좀 차리라고.




아쉽게도 이건 내 상상 속의 주먹이다. 어린 시절 만화영화 <마징가 제트>를 보며 나는 얼마나 많은 주먹을 발사했던가. 내성적이고 참기만 하던 나를 대신해 악당을 혼내주던 그 마징가 주먹은, 결혼 후에 더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다. (물론 마음속에서만.)


며칠 전 한우리 수업 준비를 하며 읽은 동화 <슝하고, 발사> 속에서 반가운 장면을 만났다. 주인공이 자기 말을 무시하고 못살게 구는 친구에게 마음속으로 ‘태권 브이 주먹’을 날리는 대목이었다.



세상에, 로봇 주먹 동지를 바카라에서 만나다니! 내가 여전히 아이들의 마음과 같은 결로 흐르고 있구나 싶어 반가웠다. 내가 아이들의 눈높이와 잘 맞았던 이유도, 나이를 먹어도 결코 마르지 않는 이 투명한 연결고리 덕분이었나 보다. 앞으로도 이 유치한 결을 잃지 않고 아이들의 가장 든든하고 유쾌한 동지가 되어주고 싶다.

오늘 수업 시간도 아마 시끌벅적하겠지. 선생님의 '마징가 주먹'과 아이들의 '태권 브이 주먹'이 서로 자기 것이 더 세다며 자랑하느라 말이다.

그렇게 착각여왕의 유쾌한 하루가 또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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