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시(詩)

《배진성 시인의 소설시》이어도공화국 꿈삶글노래

by이어도공화국

《배진성 시인의 소설시》

이어도공화국 꿈삶글노래




36. 시(詩)


젊은 시절, 나는 시(詩)를

절에서 하는 말씀으로 읽었다

그리하여 나는

절을 찾아다니며 길을 찾았다


나이 들어, 나는 시(詩)에서

말씀으로 짓는 사원을 본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말씀 처마 끝의 풍경으로 산다








1. 연어의 종착역


고향집 바로 앞에

연어의 종착역 표지석이 있다

나는 연어가 되어

참으로 먼 길을 거슬러 돌아왔다

나도 이제 너를 만나

붉은 알을 낳아야만 한다



2.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


참으로 오랜만에 들길을 간다

두엄자리 곁에 세워진 아버지의

낡은 지게를 지고 저물녘을 간다

참깨 베러 가신 어머니의 산밭으로

늦은 마중을 간다 오랜만에

바람을 비껴 여름 한쪽 끝으로

산길을 오른다

노을이 차마 곱게 익는다


일찍부터 외항선을 탄 만수

뱃사람이 된 만수네가 새로 장만한

논을 바라보며 들길을 간다

일곱 번씩이나 떨어지고도 다시

행정고시공부를 시작했다는 현길이,

이미 기울어 버린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팔아넘긴 논배미를 지나

쓸쓸하게 걸어간다 새를 쫓는 깡통소리와

반짝이는 반짝이의 마음들이 노을 속으로

새를 날려보내며 또 내일을 염려하는 가슴을

가다듬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허수아비는

쓰러지지 않고 동그랗게 질린 비닐 얼굴들이

하늘까지 닿으려는 마음으로 솟아오르곤 했다


콩밭으로 바람이 기어들어가고 밤은

들쥐처럼 숨어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어머니와 산길을 내려온다 가끔

고개 치켜드는 벼포기 사이로 추억들이

발소리를 숨죽이며 기어나왔다 나는 참깨를 지고

어머니는 토란대를 이고 오셨다 가슴조인

달빛이 풀어지고 우리는 하염없이 걸어 내려온다


― 어머니, 저 이제 시인이 되었어요

― 그래, 시인이 뭣허는 것이다냐

― 예, 지금까지 제가 되고 싶었던 것이예요

밤낮을 밤으로만 지내면서 말이예요

― 그러냐, 그럼 이제 취직이 됐단 말이냐

― 아니예요 어머니 그런 것이 아니예요

― 그럼, 시인이 뭣하는 것인디 그러냐

오랜만에 니가 웃기까지 하고 말이여

― 예, 앞으로

우리들의 고향을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노래? 그럼 인쟈 테레비에도 나온다냐

― 아니예요 어머니, 그런 게 아니예요

― 그라믄, 시인 한 달 월급이 월마나 된다냐

먹고 살 만한 직업이다냐

요즘 시상에는 돈이 최고드라

봐라, 만수는 돈 있승께 다들 걱정허는

장개도 쉽게 간다드라

돈 많은 이쁜 색씨가 낼 모레 온다드라

― 어머니, 하지만 저는 그렇지를 못해요

앞으로 어머니를 팔지도 몰라요

앞으로 고향을 팔아먹을지도 몰라요

시인은 가난한 직업이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요

마음을 갈고 닦아 영혼을 맑게 하는 일이예요

그래서 저는 더욱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우리들의 이야기가 들판 가득 출렁일 때 달빛은 우리가 걸어온 들길을 따라오고 있었다 어머니, 저는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머니와 고향을 위하여 우리들의 생활을 팔아먹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땅의 눈물 같은 시 한편으로 살고 싶습니다



3. 늦게 쓰는 일기


1966년 참꽃 불타는 2월 29일 새벽 두 시

그믐달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의 눈썹이

떨어지고 닭도 울지 않았다 개 한 마리가

어둠 속에서 컴컴한 어둠을 향해

컹컹 짖었다 그리고 나는 울지 않았다

울음 없는 아이로 태어나 누워만 있었다

송아지 울음소리가 걸어 나오는 물소리

가느다랗게 들리고 핑경 같은 별들이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잠들지 못하는 그 사이로

보이지 않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나는

별무덤을 파헤치고 다시 태어났다

그 자리에 나의 탯줄과 함께 누워있는 어머니

무덤가 어린 쑥 잎에도 향기가 오르고

나는 어머니가 누운 만큼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별똥별이 떨어지고 숲이 있는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 지상에

세상은 있었고 내가 태어나면서 같이 태어난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그러한 아침으로

때 아닌 비가 내리고 담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4. 연(鳶)


멀리 날아가 버리고 싶었다 보리논에서

솟아오르곤 했다 하늘을 들이받으며 뻑뻑하게

거슬러 올랐다 구름의 층계를 밟아

걸어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 길 위에

비스듬히 떠오르는 집을 짓기 시작했다 더 높이

이마에 별을 달고 떠 있는 방패연이

부러웠다 꼬리를 잘라 버린 마음으로

떳떳한 어깨는 떵떵거리고 있었다

나는 꼬리 끝까지

온몸으로 흔들리는 그리움으로

기어오르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단단하게 끈을 감았다 거센 바람이

내 몸에 몰아쳤다 얼레가 정신없이 헛돌아

풀렸고 끈을 묶은 아버지 허리가

부서져 내렸다 너무 먼 곳에서 다시 내려다보았다

비틀거리다 넘어지는 겨울 허수아비가

꿈속으로 보였다 연실을 타고 올라온 소식

침 발라 붙인 편지가 아버지 목숨처럼 떨어졌다

나는 끈을 따라 내려가 음복 같은 바람에

취한 몸으로 땅에 깊이 엎드려야만 했다

끝내 나는 그렇게 겨울 밖으로 날아가지 못했다



5. 팽이


헛발 딛는 내가 넘어지려 할 때마다

곁에서 어머니는

옷고름 풀어 만든 팽이채로

아픈 허리를 감아 주셨다

어머니가 지쳐 쓰러진 만큼

나는 바로 설 수 있었고

발아래 흐르는 강물 소리에

늘 젖어있는 몸이었다

그러한 겨울은 따뜻하였고

겨울 밖에서도 오오래, 오오래

무지개를 감아 들이며

제자리서기로 돌고 싶었다



6. 등이 환하다


오랜만에 빈 고향집에 돌아왔다

빈터에 꽃을 심다가 허리를 폈다

깨벅쟁이 친구 어머니가

감나무 아래 샘터에서

목욕을 하고 계신다

어머니와 친구는 오래전 흙이 되어

등목을 할 수 없다

나의 등과 친구 어머니 등에

손이 닿지 않는다

가만히 다시 내려다보니

내가 심은 꽃들이

등을 내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뼈만 남은 저 감나무

말벗이라도 되어야겠다



7. 정우야 잘 있느냐


초등학교 졸업한 날 밤에

네 집에서 졸업 파티 하던

그날 밤을 잊을 수 없다

의정부로 전학 갔던 친구에게 고백하던

그날 밤 너의 모습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밤 함께 울던

네 집 앞 정자나무도

징검다리 아래

여울물소리도 잊을 수 없다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던 나는

환갑 기념으로

한라생태숲에서 받아온

감나무와 산딸나무를 심으면서

너를 생각한다

너무 빨리 먼 길 가버린 너를 생각한다


너는 모든 면에서 참으로 빨랐지

달리기를 잘했고 축구를 참 잘했지

그렇게 모든 것들이 빨랐던 너는

무엇이 그렇게 급해서

저승까지도 빨리 가고 말았느냐


나도 너처럼 빨리 달리고 싶어서

달밤에 홀로 운동장을 달렸단다

하지만 나는 너무 숨이 차서

달리지 못했단다

그렇게 나는 선천성 심장병을 알았단다

나와 함께 달리던 별과 달도 울었단다

나는 아무에게도 그 말을 하지 못했단다


이곳은 지금 한창

벚꽃과 유채꽃이 환하다

너 사는 서천꽃밭에는 어떤 꽃 피었느냐

고사리도 고사리장마에 잘 크고 있구나


너를 생각하며 오늘 심은 감나무에

감이 열리기 전에 너를 만나러 가야겠다

너는 어쩌면 그곳에서도 친구들을 불러

재미있게 놀고 있을 것만 같구나


제주도 사람들은 꼭 제사상에 고사리를 올린단다

제사 음식을 고사리 멜빵으로 짊어지고 올라가서

산동네 이웃들과 나누어 먹으라는 뜻이란다

나도 올해는 고사리 꺾으러 가야겠다

고사리 멜빵에 내 마음 짊어지고 너에게 가야겠다


위리안치에 갇혀 살다 보니

너를 배웅도 하지 못했구나

이제라도 너의 유택을 찾아가야만 하겠다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하여

미리 알아두어야만 하겠다

여기서 못다 한 우리들의 우정

거기서 다시 꽃을 피우자, 정우야



8. 나의 꿈 하나


나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나는 아름다운 산을 하나 가꾸고 싶다 그 산에 나무를 심고 나무를 가꾸며, 나무처럼 살고 싶다 그 숲 속에 조촐한 집을 하나 짓고 싶다 삶에 지친 영혼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고 싶다 그 쉼터에는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가끔 찾아오면 좋겠다 절망이 너무 깊어서, 스스로 죽고 싶은 사람들이, 아주 가끔 찾아오면 좋겠다 아무런 부담 없이, 누구라도,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그러면 나는 그들과 함께,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들의 억울함이 풀릴 때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세상에 대하여, 너무나 분노한 사람들과, 한 때의 실수 때문에,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그들과 함께, 그들의 나무를 심어주고 싶다 산에 나무를 함께 심으면서, 그들의 아픈 가슴에도, 또 다른 희망의 나무를 심고, 사랑의 씨앗을 뿌려주고 싶다


자연의 큰 거울 앞에서, 희망을 되찾은 그들이,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나는, 그들과 내가 함께 심었던, 그들의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안부 편지와 함께 가끔 보내주고 싶다 세상으로 돌아간 그들은, 언제라도, 자신의 자라나는 나무를, 보기 위하여 올 수 있으면 좋겠다 직접 올 수 없더라도, 늘 가슴속에서 함께 자라나는, 자신의 나무 때문에, 더욱 힘을 얻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리하여 우리가 끝끝내, 함께 가야 할 길, 겨울이 깊을수록, 더 잘 보이는 길, 실패한 사람을, 함께 이끌어주고, 넘어진 사람을, 함께 일으켜 세워주고, 억울한 사람의 억울함을, 우리들이 함께 풀어주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으면, 나는 정말 좋겠다



9. 심우도


심우도(尋牛圖) 속으로 걸어간다 나의 흰 소는 보이지 않고 검은 소들이 있다


소들이 소나무 아래 모여 있다 멍에도 코뚜레도 없다 숲에서 뜯어먹은 풀을 되새김질 하며 서로의 눈빛을 본다 서로의 등을 핥아주는 소도 있고 죽비처럼 꼬리로 엉덩이를 치는 소도 있다 새로 발견한 풀밭을 알려주는지 귓속말을 속삭이는 소도 있고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는 소도 있다


나도 소를 길렀다 나는 늘 길을 들이려고 했다 내가 기르는 소는 코뚜레를 하였고 멍에를 하고 쟁기질을 해야 했다 갱본에서 쉬는 동안에도 말뚝에 박혀 있어야 했다 나의 소는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보지 못했다


나는 흰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 생각만 하였다 소와 함께 놀아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소를 업어 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소들이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소는 걸어가면서도 텅텅텅 똥을 잘 싼다 풀을 먹고 자란 소들이 풀에게 밥을 준다 나도 소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를 보다가 소들이 들어간 숲으로 따라 들어간다


숲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찢는다 소나무가 없어져야 땅값이 오른다며 소나무를 죽이고 있다 그해 겨울의 숲처럼 숲은 온통 소나무 무덤이 된다


숲에 소나무가 없다 소들이 함께 모여서 쉴 곳이 없다 가시덤불 속에서 가시에 찔리며 소들이 서 있다


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렵게 새로 돋아나는 소나무 새싹에 콧김을 불어넣는다


나는 심우도(尋牛圖) 밖으로 나와 심우도(心牛圖)를 그린다



10. 사과꽃망울


득음을 위한 독공이 한창이다


사과나무속에서

고려청자 굽는 소리 들린다

조선백자 깨뜨리는 소리 들린다

수없이 많은 사금파리들이 쌓인다


사과나무속에서

사과를 미리 빚어보고 구워보고 깎아본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벚꽃

성질 급한 봄꽃들이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도

사과나무는

진득하니 사과나무속에서 사과만을 만들고 있다


울컥, 울혈을 토해내고 있다



11. 징검다리


하나

길이었다 덜 자란 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어머니는 방물을 파셨고 새벽 샛강의

입김 자욱한 안개 속으로 떠나시곤 했다

나는 담장 밑에 펼쳐놓은 꼬막껍질에

쑥국 끓이기 놀이를 하며 자랐다

노을만 어렵게, 어렵게 감아 들이던

바람개비가 스스로의 바람결을 가늠할 수 있을 때

물오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파랑 간짓대 들고

오리 떼를 몰아내던 골목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머니 뒷모습을 지우던 안개 속으로

하얀 꽁무니가 사라지고

나도 그 속으로 따라 날아가고 싶었다


둘

할아버지 산소가 보이는 징검다리 사이로 햇살이

주검처럼 부서지며 흘러갔다 하류에서

한 몸으로 몸을 섞기 위해 취로사업 나가신

아버지가 무너진 둑에 묻히고 작업복이 천수답

허수아비에 내걸리던 날도 나는 그 저수지 둑에서

삐비꽃을 뽑아먹고 돌아오는 길

가로수 구멍 속에 몇 개의 돌을 더 던져 넣었다

어머니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줄도 몰랐다

그 해 여름 장마는 담장의 발목을 적셨고

두꺼비 같은 우리 식구들은

한밤중에 회관으로 기어 올라갔었다


셋

학교 앞 코스모스로 기다리기를 즐겼다

하학종소리 사이로 보이는 형의 검정고무신 앞은

발가락이 먼저 나와 있었고 생활보호대상자

가족 앞으로 달려오는 옥수수빵과 건빵

나는 그것이 좋았다 우리는 뿔필통 속 몽당연필로

흔, 들, 리, 며, 징, 검, 다, 리, 건, 넜, 다,

끈이 풀리는 소리로 흘러가는 여울물 소리는

우리를 다시 묶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징검다리를 잘도 건너다녔다


넷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끼고 기차놀이하던

우리들은 그 새끼줄 속에서 자유로웠다

우리들의 기차는 징검다리를 비로소 건너다녔고

오후의 서툰 기적소리 울리며

동구 밖까지 나가 놀던 소아마비 동생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찾다가 찾아보다가

어린 집배원이 된 큰 형도

동생의 소식은 가져오지 못하고 한 떼

건너가는 동네 아이들만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다섯

여울물 소리는 끈이 풀리는 소리였고

또 다시 묶이는 소리였다 방직공장에 취직했던

누이가 파란 눈의 아이를 보듬고 돌아와

빨래터에는 방망이질 소리가 잠들지 않았고

헛발 짚은 어머니는 물속에 더욱 자주 빠지셨다

……………… 배고픔과 어머니 ………………

들판에 흐드러진 달맞이꽃 사이로 그렇게 어머니는

젖은 보름달을 이고 늦게 돌아오시곤 했다



12. 이어주는 섬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 안에 섬들의 발이 있다

내 가슴 속에 섬들의 발자국이 있다


내 가슴 속에 이어도가 있다

내 가슴 속에 이어주는 섬이 있다

나는 징검다리 같은 이어도가 된다



13. 계절이 징검다리처럼


나의 계절은 가을로 깊어간다

바람이 분다 가을바람이 분다

가을바람은 자꾸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가을바람은 자꾸 나에게 바람이 돼라한다

가을바람은 자꾸 나에게 가을이 돼라한다

가을바람은 자꾸 나에게 단풍이 돼라한다

마지막 남은 목숨 사랑만 하라한다

오직 사랑으로만 타오르는 꽃이 돼라한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바람이 돼라한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단풍이 돼라한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가을이 돼라한다

겨울이 오기 전에 가을이 돼라한다

봄으로 다시 꽃 피는 가을이 돼라한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떠나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는 바람이 돼라한다

가을바람이 먼저 징검다리 건너간다

계절이 흘러가는 강물에

가을바람이 먼저 가서

겨울의 징검돌을 놓는다

봄으로 가는 징검돌을 놓고 있다



14. 월대천 징검다리


월대천 끝에 징검다리 있다

바다 입구에 징검다리 있다

한라산 물, 바다로 내려간다

바닷물 한라산 쪽으로 간다

월대천과 제주 바다의 경계,

썰물에는 은어들이 내려가고

밀물에는 실뱀장어 올라온다

썰물에는 사람들이 건너가고

밀물에는 바닷물이 건너온다

강아지는 사람과 함께 건너고

참게들은 사람들 몰래 건넌다

나는 징검다리 입구에 눕는다

팽나무 아래 거꾸리에 눕는다

나무 끝으로 올라가는 물소리

물관 속으로 올라가 눈을 뜬다

여울물소리는 봄 잎으로 피어

기지개 켜며 하늘 걷기를 하고

나의 마음은 구름을 따라간다

알작지 몽돌 보고 와불도 본다

관탈섬도 보고 추자섬도 본다

광양포구 정병욱 본가도 본다

마룻장 아래 숨겼던 원고 본다

섬진강을 따라 반월산에 간다

연어의 종착역까지 따라간다

늦게, 돌아온 왜가리 한 마리

오늘 밤에도 저녁상을 차린다



15. 월대천 참게들


월대 아래 월대천변 돌 마루에서

어린 참게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왼손잡이도 있고 오른손잡이도 있다

양손잡이도 있고 손이 없는 게도 있다

손이 없어 발로 먹는 게들도 있다

밥에는 관심도 없이, 해찰하는 게들도 있다

밥상을 박차고 나가,

친구들과 놀기에 바쁜 게들도 있다

손장난을 하고 발장난을 하는 게들도 있다

누가 빼앗아 먹을까 봐, 혼자 숨어서 먹는

놈도 있고, 겁이 많아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래 숨어서 먹는 놈도 있다

동구 밖까지 나가서 놀기에 바쁜 놈도 있고

애인이라도 만나러 가려는 듯 물거울 앞에서

오래도록 꽃단장하는 놈도 있다

그런 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무래도

물보다 땅이 더 좋은지, 갈수록 땅으로

더 많이 기어오르고 있다 머지않아

이 게들의 종족은 물의 세계에서

땅의 세계로 올라와서 살 것만 같다

아무래도 이 게들은 지금도 쉬지 않고

진화를 거듭하고 있을 것만 같다

아무래도 이 게들은 벌써 이 지상에서

자신들만의 굴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고

이미 모습을 바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들어가지 못하는 자신들만의 굴을 들락거리며

나와 술래잡기를 하려는 듯

자꾸만 나에게 함께 놀이를 하자고 한다

그러면서도 아직은 겁이 많아서 경계심이 많아서

자신보다 약한 놈에게 망을 보라고 시켜두고

살짝살짝 곁눈질을 하며 식사를 하는 놈들도 있다

게들도 진화를 하면서 계급이 생기고

차별이 생기고 있다

오늘도 월대 아래, 월대천변 돌 마루에서

어린 게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식사를 하면서 봄처럼 하품을 하고 있다



16. 다시 월대천 징검다리


월대천변 징검다리 앞에

하늘 걷기 있다

사람이 없을 때는

팽나무 그림자가 걷고

달빛과 햇빛이 내려와

하늘을 걸어간다

징검돌 사이로 흘러가는

여울물소리도

자주 올라와서

구름을 따라 하늘 걷는다

나도 자주 이곳에서

하늘을 걸어서 간다

팽나무 아래 거꾸리에

안겨서 본 하늘을

하늘 걷기를 타고 올라가

함께 하늘을 걷는다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월대천을 따라

내도 앞바다와

외도 앞바다까지 흐른다

여울물소리에 젖어서

바다의 물결이 된 나는

관탈섬을 지나

추자도를 지나 건너간다

하동포구를 지나

연어의 종착역으로 간다

나의 하늘 걷기는

자주 반월산까지 간다

월대천 징검다리는

삼기천으로 이어지고

삼기천은 다시

월대천으로 돌아온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삼기천에서 월대천으로 온다

몇 개의 징검돌을 밟고

세월의 강을 건너 여기까지 온다

삼기천의 징검다리와

월대천의 징검다리가 보인다

장마 때마다 떠내려간 징검돌

태풍 때에도 끄떡없는 징검돌

미끄럽고 둥그스럼한 자연석

우람하고 네모반듯한 인조석

연어의 종착역에서 기다리고

바다의 입구에서 맞이해주는

삼기천의 징검다리 징검돌과

월대천의 징검다리 징검돌들

오늘도 나는 이렇게

징검다리의 징검돌이 되어서

월대천에서 삼기천으로 간다

삼기천에서 월대천으로 온다

징검다리 아래 여울물소리에

몸과 마음 함께 젖어서, 운다



17. 월대와 징검다리


외도 앞바다와 내도 앞바다가

월대천 징검다리를 거슬러 올라온다

너무 싱겁게 먹는 참게들에게

맛있는 바다 한 상 잘 차려준다

바다를 떠나온 게들도

하루에 두 끼는

잘 차려진 바다 한 상 받는다

월대천의 문 노크를 한다

외도동 앞바다와 내도동 앞바다가

월대천 안으로 문 열고 들어온다

바다 한 상 거하게 차려져 들어온다

앞 바다는 뒷걸음질 치고

뒤 바다가 길을 알려준다

잔칫날 큰 상이

방문을 겨우 통과하듯

월대천 징검다리를 어렵게

어렵게 통과해서 들어온다

몇 번을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를 반복한다

반찬그릇 몇 개 방바닥에

떨어뜨리고 겨우 통과한다

월대천 징검다리에서

길목을 지키던 왜가리 한 마리

방바닥에 떨어진 반찬그릇에서

작은 생선 몇 마리 주워 먹는다

아, 저렇게 잘 차려진 바다 한 상

도대체 누구를 위한 진수성찬일까

도대체 누구를 위한 산해진미일까

하늘을 올려다보니

둥근 보름달이 떠 있다

저 둥근 대보름달은

누가 날려 올린 연일까

방패연도 아니고

가오리연도 아닌

반짝반짝 빛나는

기름칠이 잘 되어

얼굴까지 다 보일 것만 같은

둥근 솥뚜껑을 어떻게 하늘까지

날려 보낼 수 있었을까

어떤 간절한 기도가 저렇게

하늘에서 빛나게 했을까

장독대에 올려둔

어머니의 정안수 때문일까

아침마다 새로 올려놓던

하늘수박과 조왕물 때문일까

아, 나는 이제야 겨우 알았네

달이 밤마다 월대천으로

내려와 식사를 하는구나

잘 차려진 한라산 한 상과

잘 차려진 바다 한 상을 함께 받아서

진수성찬과 산해진미를

밤새도록 노래하며 먹는구나

세상에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날마다 바다를 부르는 이유가 있구나

날마다 산등 쓰다듬는 이유가 있구나

옛날의 선비들은 이미 다 알고

시(詩)도 지어 올리고

노래도 불러주고 하였는데

요즘 시인들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보름달과 함께 식사하는 월대천

이 자리에 모여들지 않는다

오늘은 나 홀로

잘 차려진 바다 한 상 앞에서

나의 출사표 「징검다리」 읊는다

징검다리 읽으며 다시 생각한다

날개도 없이 하늘에 사는 거미는 행복할까

월대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젖은 보름달

혼자 사는 물속의 저 달은 얼마나 행복할까

달집을 태우는 정월 대보름

삼기천의 징검돌을 생각하며 춤을 춘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언제쯤 끝이 날까

물과 돌의 블루스

천과 바다의 블루스

달빛과 물빛의 블루스

그리고 너와 나의 탱고와 블루스



18. 이어도와 오기기아


이어도에는 이어도 시인이 살고

오기기아 섬에는 칼립소가 산다


이어도로 가는 길에

이어도 사나 노랫소리 들려오고

오기기아 가는 길에

세이렌의 노랫소리 들려온다


나는 이어도에서 꿈을 꾸었고

오디세우스는 오기기아에서

고향을 생각하며 꿈을 꾸었다


오디세우스는 이타카에서

더 먼 서쪽으로 떠나갔고

나도 이제 다시 길을 떠난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만 할까

나의 칼립소는 어디에 숨었을까

고향에서는 누가 나를 기다릴까


오늘도 바다에서 노랫소리 들린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세이렌, 꿈처럼 나를 부르고 있다


이어도 시인은 이제 여의도로 가야할까

연어의 고향을 지나 북간도를 지나

이타카로 가야할까 크레타로 가야할까



19. 창백한 푸른 점, 138억 년의 은하에서


큰 징검다리 하나 건너

세상 밖의 서가(書架)에 서서

코스모스를 본다


지구의 둘레를 재던

에라토스테네스의 작은 막대기 하나,

그 끝에서 시작된 시선은

138억 년의 빛을 따라 멀리도 흘러간다


어둠의 바다, 보이지 않는 정적 속에

홀로 부유하는 한 뼘의 티끌

저토록 먼 곳에서 바라본 우리의 집은

수줍고도 창백한 푸른 점


우리가 흘린 수많은 눈물과 피,

우리가 삼킨 아픔과 짧은 사랑의 순간들이

찰나의 빛으로 스쳐 지나간다


아득한 시공간 속

우리가 잠시 머물다 가는 이 자리,

우주가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아름다운 눈동자 되어

오늘도 나는

저 빛나는 먼지를 가만히 다독인다


우리는 모두 별에서 온 아이들,

은하의 징검다리를 건너

다시 별의 노래로 돌아가는

먼지 같은 영혼들


우리는 모두가

별들의 숨결로 와서

별들의 숨결로 돌아간다

잠시 서로의 눈빛을 어루만지는

그 순간의 간격



20. 별과 태양


태양도 별이고, 별도 태양이다

스스로 빛을 내는 빛의 덩어리

가까워서 태양이고, 멀어서 별이다


당신에게 나는 별일까 태양일까

당신의 밤을 밝히는 작은 빛일까

당신의 하루를 여는 큰 태양일까


별은 언제쯤 나에게 다가올까

태양은 언제쯤 내 곁을 떠날까

수많은 별들 사이에서

별과 태양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붉은 태양과 푸른 지구, 별과 달과 사람,

우리는 모두 서로의 궤도를 돌며

멀어졌다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진다


태양은 별이고 별은 태양이다

스스로 빛을 내는 빛의 덩어리

가까우면 태양이고 멀면 별이다



21. 우주 달력에 쓰는 이어도


우주 달력 한 장을 펼치면

138억 년의 시간이

12개월 안에 접혀 있다


1월의 어둠에서 별이 태어나고

9월의 어느 날, 지구라는

창백한 푸른 점 하나가 생겨났다


그리고 마지막 날

12월 31일 밤이 되어서야

사피엔스가 나타났다


우주의 시계로 보면, 인간의 역사는, 자정 직전의 한순간, 그 짧은 순간에 우리는 불을 발견하고, 언어를 만들고, 신을 만들고, 국가를 만들고, 돈을 만들고, 서로 모르는 사람들과도 하나의 이야기를 믿으며 거대한 문명을 세웠다 유발 하라리는 묻는다 인간이 밀과 쌀을 길들인 것인가 밀과 쌀이 인간을 길들인 것인가


우리는 밭을 일구었지만 밭은 우리의 시간을 일구었고 곡식은 우리의 발목에 정착이라는 이름의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사피엔스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는 돌도 창도 아니었다 함께 믿을 수 있는 허구였다


신도, 국가도, 돈도, 민족도, 국경도, 어쩌면 문학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믿을 때,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나의 이어도 또한 하나의 이야기일까 나는 나의 이어도와 이어도공화국을 쓰기 시작한다



22. 한 아이


한 아이를 알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아픈 몸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 한 아이의 비밀을 알고 있다 한 아이의 아픔을 알고 있다 그는 나밖에 몰랐다 나 또한 그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는 어쩌면 나인지도 모른다 그는 서럽도록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들풀 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오직 그와 나밖에 몰랐다 그의 삶은 우리나라 현대사와도 같았다 그는 죽도록 사랑하는 일과 그리하여 매일 밤 유서를 쓰는 일 외에는 아무런 일도 할 줄 몰랐다 다른 일을 해보려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바람에 쓰러질 때마다 유서를 쓰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살아 있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그는 편지와 유서를 썼다 하지만 그는 또한 가야 할 길이라면 어디든지 가보고 싶었다 뛰어가고 싶었다 날아가고 싶었다 그러다가 그는 또 다시 아무도 모르게 쓰러졌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의 곁에 있었다 그가 쓴 유서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병을 가족들에게 들킬까 두려워 어느 날 문득 가출을 결심했다 그와 나는 함께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꿈길까지라도, 저승길까지라도……, 최대한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그리고 수 없이 많이 달아났다 우리들은 오늘도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러다가 우리는 또 다시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 헤매고 있다 우리들은 그렇게 살벌한 평화 속에서 60년 넘게 함께 살아왔다 아직도 그의 투병생활은 끝나지 않았다 그가 잠든 사이에 나는 그의 투병일지 혹은 유서들을 훔쳐내는데 성공했다 참으로 숨죽이는 순간이다 조심스럽게, 이 비밀들을, 속삭이고 싶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오늘도 유언처럼 발설하고 있다 이제 막 새로 태어난 길이, 빈 마음으로 새로운 길을 걸어가고 있다



23. 연어의 종착역에서


나의 고향집 바로 앞에는

연어의 종착역 표지석이 있고


조태일 시인의 고향집 앞에는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이 있네


나는 이제 겨우 돌아와

붉은 알을 낳으려 하고


조태일 시인은 먼저 돌아가

하늘에서 식칼을 갈고 있네


나는 서천꽃밭에서 대나무 가꾸고

조태일 시인은 국토에 시를 가꾸네


오늘도 곡성, 강은 연어를 품고

은하수는 숫돌물로 흐르고 있네



* 조태일 시인 27주기 추모시 (걸개 시화)



24. 종남마을에서


당오름 아래, 종남마을에서

나는 문득 종남이 생각이 난다

봉천수(奉天水)처럼 살았던 친구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할까


하얀 종소리 떨어뜨리며 번지는 향기,

사람들은 그것이 때죽나무라 하였다

떼로 죽어간 이름들이 맺혀 핀 꽃이라

지금도 집안에는 함부로 들이지 않는,

마당가에 심으면 통곡이 자란다는,

종나무를 따라서 내 마음은 벌써

그 억울한 이름의 뿌리를 따라서

볼레오름 종남궤로 올라가고 있다


불타버린 집터마다 팽개쳐진 통시,

주인 잃은 돗통시에는

굶주림에 꺼이꺼이 울던 검은 돼지 소리만

눈물처럼 고여 대나무를 키우고 있다


살기 위해 굴속으로 기어들던 발자국마다

주린 돼지의 울음이 겹쳐 들리고

부서진 항아리 틈으로

죽창처럼 솟아난 대나무만 무성하다


때죽나무는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 거친 곶자왈에 뿌리박아

해마다 잊지 않고 피어나는 서러운 꽃

해마다 지상으로 종소리 하얗게 쏟아내는 꽃


종남궤의 어두운 통곡의 벽을 넘어

빈 통시를 채우던 슬픈 짐승의 울음까지

이제는 제주의 흙 속에 깊이 묻어두고,

우리는 다시 삼월의 바람으로

그 아픈 이름들을 하나씩 지켜내고 있는데,


종남아, 지금 어디에 피어 있느냐

돼지우리 위에서 설사똥을 싸던 친구야

놀란 돼지에게 설사똥 돌려받던 종남아

너는 지금 어디에서 종꽃을 흔들고 있느냐



* 잃어버린 마을에서 부르는 평화의 노래

- 종남밧에 부는 기억의 바람(2026.8.30/와산리 종남마을)



25. 다랑쉬


다랑쉬에는 다랑쉬마을이 들어있다

오름은 움푹해진 백록담도 품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평생 달과 함께 살았다

집들이 모두 불타고 굴속으로 들어갈 때에도

달과 함께 가재쑥부쟁이와 시호꽃을 피웠다


사람들이 다랑쉬굴 안에서 연기가 된 뒤에도

달은 잊지 않고 찾아와 섬잔대와 송장꽃을 피웠다


무쇠솥과 항아리와 놋수저와 신발만 남기고

열 한 명이 들려나와 바다로 떠난 이후에는

더 이상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어둠 속에는 아홉 살 아이가 울고 있는데

벗겨진 신발 찾으러 들어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잠겨버린 어둠은 열리지 않는다


달이 찾아와 소리쳐 불러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곁에 있는 용눈이오름 아끈다랑쉬오름 높은오름

돛오름 둔지오름이 힘을 합쳐도 문을 열 수가 없다


남아있는 늙은 팽나무가 그저 바라볼 뿐

무너진 돌담도 집터도 우물터도 안으로 눈물 흘릴 뿐


달을 따라서 달의 고향으로 온 나도 그저

서로의 얼굴만 바라다 볼 뿐



* 다랑쉬 예술제 참여 작품



26. 폭낭과 야유나무


당산나무가 나를 업어 키웠다


제주도 폭낭들은 오늘도

허리가 휘어지도록

바람을 업어 키우고 있다


북촌리 폭낭은 그날을 잊을 수 없다

1949년 1월 17일

그날 보았던 일들이 지워지지 않는다


당산나무에 임산부를 매달고

대검으로 찌르는 것을 보았다

총탄에 쓰러진 시체 더미 속에서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아이

피의 가슴을 빨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피가 솟아나는 순간

천둥소리가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그 미친(美親) 바람은 바다까지 건너갔다

야유나무를 한 번 휘감고

퐁니를 거처 퐁넛으로 달아났다

제주도 폭낭처럼 베트남의

그 퐁니 마을 야유나무도 똑똑히 보았다

총소리를 보았고 천둥소리의 뼈를 보았다

1968년 2월 12일 아침

야유나무는 야유나무 학살을 모두 다 보았다


탐라국 폭낭들이 보았고

참파왕국 야유나무가 보았다

그리고 또 다른

당산나무들이 오늘도 똑똑히 보고 있다


당산나무는 어미가 되고 싶다

당산나무는 다만 어미가 되고 싶다

당산나무는 이제 다시 어미가 되고 싶다

웃는 아이들을 업어서

웃는 아이로 키울 수 있는 어미가 되고 싶다



* 베트남 전쟁 아카이브 시집 수록



27. 별들의 삶과 죽음


칼 세이건은 애플파이 하나에서

무한대(無限大)와 무한소(無限小)를 본다


수소의 노래를 듣고, 별들의 일생을 본다

아득한 밤하늘, 가스와 먼지의 요람 속에서

거대한 어둠이 자신의 무게로 끌어당기며

첫 숨을 내쉬는 아기별이 태어난다고 하는데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수소의 가슴에 불이 붙고

핵융합의 거친 찬가가 울려 퍼지면

별은 억겁의 세월 동안

빛이라는 이름으로 우주를 태운다는데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영원한 불꽃은 없는 법

속살을 다 태워버린 어느 푸른 별은

거대하게 부풀어 올라 붉은 노을을 그리고,

끝내 자신의 껍질마저 우주로 내던진다는데

나는 아직도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산다


어떤 것은 서서히 식어가는 백색왜성으로,

어떤 것은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검은 구멍으로,

또 어떤 것은 우주를 흔드는 초신성 폭발로

마지막으로 화려한 장엄을 고한다는데

나는 언제쯤 장엄하게 나를 폭발시킬 수 있을까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

별의 흩어진 재가 스쳐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별이, 행성이, 우리가 싹튼다는데

나는 언제 어디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우리들의 피 속에 흐르는 철분도,

우리들의 몸을 이루는 탄소와 산소도

모두가 아득한 옛날,

이름 모를 별의 심장에서 태어났다는데

어찌하여 나의 심장은 불량품이 되었을까


우리들은 모두 별들의 자식이라는데,

스스로를 알기 위해 다시 별을 바라보는

우주의 아주 작은 조각이라는데

어찌하여 나는 나도 제대로 볼 수 없을까


칼 세이건은 애플파이 하나에서

별들의 삶과 죽음을 볼 수 있었다는데

나는 어찌하여 나의 삶과 죽음도, 깜깜할까



28. 별


아득한 성운의 품속, 먼지와 가스가

서로를 끌어안고 무너져 내릴 때

작은 불씨 하나, 심장을 켠다

중력은 흩어진 것들을 불러 모으고

시간은 그 곁에 앉아 기다린다

별은 스스로 빛나는 법을 배운다

몸속에서 수소를 헬륨으로 바꾸며

어둠에게 빛을 나누어 준다

빛은 별의 말이고, 열은 별의 숨결

핵융합은 별이 살아 있다는 증거

영원히 타는 불꽃은 없다

마지막 연료가 줄어들면 빛은 흔들리고

시간은 얼굴에 주름을 새긴다

조용히 늙어, 작고 뜨거운 잔해가 되고

어떤 별은 거대한 몸을 흔들며

마지막 인사를 보낸다

별은 죽으면서 더 많은 것을 남긴다

철이 태어나고, 탄소가 흩어지고,

산소와 규소가 먼 길을 떠난다

별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음 생을 위한 거대한 씨앗 뿌리기

저 수많은 별빛 가운데에는

이미 사라진 별도 있을 것이다

죽은 별의 마지막 숨결이 어둠을 건너

우리의 눈동자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한 사람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묻는다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우주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오래전 죽은 별의 빛 하나가

그의 눈동자에 닿는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된다

별의 죽음은 우주의 침묵이 아니라

다음 생명을 부르는 가장 오래된 노래

별은 오늘도 자장가를 부르고 있다



29. 노인성이 유숙하는 섬


서귀포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이다


서귀포혁신도시에서 중문관광단지까지

이어도 길을 걷다가 태평양으로 간다

설문대할망의 막내아들을 만나러 간다

남극노인성이 유숙하는 이어도로 간다


바다에서 해(海)를 본다 물이 아프다

인간들의 욕망이 낳은 쓰레기들의 섬

썩지도 않는 플라스틱 욕망들의 얼굴,


바다 해(海) 글자를 더 자세히 본다

어머니가 보인다 어머니가 아프다

아픈 어머니에게 방사능 오염수까지 먹인다

태평양의 수평선이 트로이목마를 끌고 온다

북극곰의 신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바다와 하늘이 함께 뜨거워지고 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막내아들이

뜨거운 어머니 이마에 물수건을 올린다

유숙하던 노인성도 곁에서 돕는다

서천꽃밭 꽃감관도 불사화를 가져온다


용궁으로 가는 올레에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노랫소리 들려온다

하늘에는 서천꽃밭이 있고

땅에는 마고성이 있고

바다에는 이어도가 있다


어머니를 살리려고 노인성과

꽃감관도 떠나지 못한다


서귀포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이다

서귀포시 해(海) 1번지

서귀포시 태평양로 1길

노인성이 유숙하는 섬에 연꽃 한 송이 문을 연다



30. 마지막 순례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다 왼쪽 가슴이 아팠다 남몰래 가슴을 안고 쓰러지는 들풀이었다 내려다보는 별들의 눈빛도 함께 붉어졌다 어머니는 보름달을 이고 징검다리 건너오셨고 아버지는 평생 구들장만 짊어지셨다 달맞이꽃을 따라 가출을 하였다 선천성 심장병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나의 비밀은 첫 시집이 나오고서야 들통이 났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비후성 심근증, 심장병과 25년 만에 첫 이별을 하였으나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바다는 나를 이어도까지 실어다 주었다 30년 넘게 섬에서 이어도가 되어 홀로 깊이 살았다 나는 이제 겨우 돌아왔다 섬에서 꿈꾼 것들을 풀어놓는다 꿈속의 삶을 이 지상으로 옮겨놓는다 나에게는 꿈도 삶이고 삶도 꿈이다 <꿈삶글>은 하나다 꿈과 삶과 글이 하나로 만난다 이제는 <꿈삶글노래>가 하나 되었다 꿈과 삶과 글과 노래가 하나로 만난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했던 윤동주 시인과 함께 마지막 순례를 떠난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마지막 순례를 떠난다 꿈과 삶과 글을 노래하며 순례한다 바람이 분다 마지막 순례를 시작한다



31. 하늘에서 본다


떠나는 사람은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

무덤으로 마침표를 찍은

시 한 편을 읽는다


나는 내 아들에게

내일을 배우 듯

아들 뻘인 동주에게

어제를 배운다

나는 아버지가 되고

동주는 아들이 된다


이어도에서 하늘로 간다

서천꽃밭으로 간다

버드나무 아래 우물에서,

동자들이 물을 길어와

꽃밭에 물을 주고 있다

숨결도 함께 주고 있다


서천꽃밭에서

꽃과 꽃씨를 챙겨

삼색 물을 건넌다

서천꽃밭을 나와

하늘에서 본다


소도였던 자리에

솟대가 세워져 있고,

마고할미가 살던 곳에

노고단이 있고,

단군이 내려왔던 곳에

참성단이 있다

방사탑과 거욱대 위에

새와 돌이 있다


백두산도 보이고

지리산도 보이고

무등산도 보인다

한라산 백록담도 보이고

영실도 보인다

마라도와 가파도와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보인다


한반도 남쪽에는 수직으로

솟아오른 높은 건물들과

붉은 십자가들이 보인다

한반도 북쪽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동상이

미사일처럼 세워져 있다


윤동주 시인이 방학 때마다

타고 갔던,

고향 가는 철로가

기적소리처럼 펼쳐져 있다

강처중의 고향도 보이고

문익환의 고향도 보인다


하늘에서 다시 본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 중간쯤,

바다 위에 공이 하나 떠 있다

손을 뻗친 손바닥 자국들이

비치볼에 가득 찍혀 있다


높은 하늘에서 본다

미국과 소련이 질러대던

럭비공 하나 떠 있다

축구공 하나 떠 있다

군홧발로 함부로 차던

족구공 하나 떠 있다


더 높은 하늘에서 본다

미국이 상대선수를 바꾼다

미국과 중국이 야구를 한다

미국과 중국이 탁구를 한다

빠따로 수없이 얻어맞은,

상처투성이 야구공 하나 있다

찌그러진 탁구공 하나 떠 있다


하늘에서 다시 본다

알이 하나 있다

알이 움직이고 있다

알에서 깨어나고 있다

가장 소중한 꽃 한 송이 피어난다



32. 끝의 시작


인천에서 붉은여우를 만났네

붉은 노을 아래서

붉은여우를 만났네

붉은 노을에 물려

바다에 버려진 지친 영혼아

월미도 앞바다

차가운 물결에 몸을 싣고

한없이 깊은 꿈속을 흘러,

흘러, 흘러서 흘러갔네

눈을 떠보니

그곳은 신비의 섬 이어도


해양과학기지도 아니고

수중 암초도 아닌

단테가 노래하던

천국과 지옥의 문

그곳에서 나는 보았네,

시간의 경계를 넘어

성인과 철학자,

시인들이 건네는 미소를


이어도에서 나는

사람들을 만났네

그리운 어머니와 아버지,

고향의 얼굴들

제주에서 북간도까지,

남에서 북까지

모든 눈물이 마르고

모든 벽이 허물어지는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

이어도에서 만났네


부처님도 만나고

예수님도 만나고

공자님도 만났네

단테도 만나고

아프로디테도 만나고

베아트리체도 만났네


정방폭포 위령공간 소문이

바람에 실려와

잠들었던 영혼들이

술렁이며 깨어나네

서복의 불로초공원,

그 향기를 따라서

정방폭포에서 온 이들

먼저 길을 나서네

나도 윤동주 시인과 함께

그 뒤를 따르네


연어의 종착역을 지나

백두산 너머로

북간도의 시린 바람 안고

마지막 순례를

아주 멀고 아픈 길일지라도

멈추지 않으리

나의 시가 마침표를 찍는 그날까지


이어도에서 나는 사람들을 만났네

그리운 어머니와 아버지,

고향의 얼굴들

제주에서 북간도까지,

남에서 북까지

모든 눈물이 마르고

모든 벽이 허물어지는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

이어도에서 만났네


나의 반달,

나의 반월산

나의 무덤이 시가 될 때까지

끝끝내 떠나는 이 길은

눈부신 순례

이어도에서 시작된

마지막 발자국

나와 윤동주 시인이

함께 걸어가는 마지막 순례의 길



33. 연꽃 한 송이


장자(莊子)가 물 위에 앉아있다

생각하는 로댕이 바다에 앉아있다

장자의 곤(鯤)이 보였다가

장자의 대붕(大鵬)이 보인다

대붕이 날아가다 쉬고 있다

한쪽 날개를 펼치고 숨을 가다듬고 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앉아있다

지옥문 앞에서 꼼짝 하지도 않고

깊이 생각을 하고 있다

다시 보니 새가 한 마리 쉬고 있다

나비가 한 마리 쉬고 있다

나비의 꿈이 쉬고 있다

꽃 한 송이 피어나고 있다

윤동주 시인은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배진성 시인은 꽃 한 송이 피어나서

나비가 앉아 있다고 말한다

자세히 보니, 헬기 착륙장이 바다에 떠 있다

태양광 패널들이 반짝이고 있다

더 깊이 생각하니

태평양에 연꽃 한 송이 피어 있다

평화의 연꽃 한 송이 꽃피어 있다

설문대할망의 막내아들 지극정성으로

연꽃이 다시 피어나고 있다

남극노인성의 숨결과 꽃감관의 손길로

어머니가 부활하여

서서히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구름 가득한 하늘에 다시

향기롭게 젖을 물린다

남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숨결이

새처럼, 나비의 꿈처럼

격렬비열도(格列飛列島)와 독도(獨島) 사이로

조용히 흐른다

하늘에는 은하수가 흐르고

땅과 바다에는 윤슬처럼 미리내가 흐른다

내 이름은 이어도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나를 배진성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인해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강산으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성진으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나의 이름은 이어도, 이어도공화국이다



34. 마라도에서


이어도에서 마라도로 간다

바람이 되어 간다 파도가 되어 간다

연어가 되어 간다 저승에서 이승으로 간다

단테는 저승 여행을 하였고 나는 이승

여행을 한다 전생에 살았던 곳으로 간다

이어도에서 배진성으로 돌아간다

아니다

나의 현생은 이어도이지만

전생에 내가 살았던 곳의 사람들은

아직도 나를 배진성으로 알고 있다

나는 이제 그림자가 없다

아직도 그림자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의 땅으로 간다

이어도는 어쩌면 저승이 아니라

저승과 이승의 중간에 있다는

중음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에

잠시 들렀다가 마라도로 간다

마래섬으로 간다 마라섬으로 간다

마라도(馬羅島)로 간다 태풍이 자주 다니는

길을 따라서 마라도로 간다


오늘은 주름치마 입은

파도가 안내를 한다

마라도 등대가 보인다

장군바위가 나를 맞이한다

대한민국 최남단 표지석

앞에서 물질을 한다 전생의

어머니 숨비소리도 들린다

포작이었다는 할아버지

목소리도 들린다

화전을 일구려고 퉁소를 불어서

뱀들을 몰아냈다는 마라도

전생의 늙은 아버지는

오늘도 빈 퉁소를 불고 계신다

늙은 해녀들은 이제

먼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톳짜장에 넣을 톳을

할망 바당 바위에서 뜯고 있다


이어도에서는 젖꼭지만 보이던

한라산이

마라도에서는 훤히 다 보인다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면

아직도 젖이 나올 것 같은

한라산의 가슴이 통째로 다 보인다


이제 좀 안심이 된다

스르르 잠이 올 것만 같다

꿈처럼 살았던 이어도의 생활

마라도에서 뒤돌아보니

이어도가 아스라이 멀어지고 있다

서복님과 부처님과 예수님 이야기를

윤동주 시인과 함께 귓속말로 한다


다시 한번 돌아보니

가파도와 송악산과

산방산과 한라산이

푸른 하늘로 올라가는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다

항공모함처럼 생긴 마라도가

기적을 울리며 움직일 것만 같다


푸른 기적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마라도에서는 가끔 고구마 굽는

냄새도 솔솔 피어오른다

이 작은 마라도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내가 전생에 살았던 지상으로

다시 돌아오니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나는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남쪽에 사는 시인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숨을 쉴 수 있어서 기적이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어서 기적이다

노래를 부를 수 있어서 기적이다

마라도에서 돌아보니 모두가 기적이다



35. 가파도에서


서른다섯 살의 단테는 어두운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햇살이 비치는 언덕으로

올라가려 하는데, 표범, 사자, 암늑대가

길을 가로막는다 그때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언덕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다른 길,

저승 세계를 거쳐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저승으로 긴 여행을 떠난다


바람이 차다 바람이 파도의 엉덩이를 걷어찬다

파도가 높다 파도가 마라도 가슴팍을 후려친다

고구마같이 생긴 마라도에서 군고구마를 먹고 싶다

퉁소를 불던 사람이 불을 놓아버린 이후로는

아무리 퉁소를 불어도 뱀들이 몰려들지 않는다


가오리 한 마리 바다 위에 납작 엎드려 있다

나는 그 가오리 등을 타고 바다에 떠 있다

하멜이 지나갔던 길 위로 뱀이 한 마리 지나간다

모세의 지팡이 같이 생긴 뱀이 한 마리 지나간다

나는 모세가 아니므로 그 뱀을 집어 들지 못한다


단테는 서른다섯 살에 저승으로 여행을 떠났지만

나는 서른 살에 저승으로 떠났다가 예순 살에

돌아온다 저승에서 이승으로 순례를 떠난다


마라도에서 가파도로 간다 마라도 살레덕선착장에서

배를 타도 되지만,나는 이어도에 살던 진인답게

바람으로 간다 서핑보트를 타듯 파도를 타고

가파도로 간다


가파도 주변에 젊은 해녀들이 소라를 잡는다

가파도 짬뽕에 들어갈 뿔소라가 망사리 가득하다

나는 가오리 꼬리를 잡고 가파도 등에 오른다

가파도는 갈수록 젊어져서 힘도 좋고 싱그럽다


가파도에서는 청보리 밭에서 푸른 파도소리 들린다

가파도 올레길은 바람도 자전거를 타고 돈다

가파도 올레길에서 보는 송악산, 산방산, 한라산,

황홀함에 이끌려 모슬포 운진항으로 가지 않고

송악산으로 간다 산방산으로 간다 한라산으로 간다


가파도는 이제 청보리의 섬이 되었다 봄에

청보리축제를 하려면 겨울을 잘 견뎌야만 한다

봄은 겨울이 낳는다 가파도 청보리는 겨울

땅속의, 긴 기도와 찬송의 은총과 축복이다 봄은

겨울의 숨결이다 봄은 겨울이 낳은 자식이다



36. 시(詩)


젊은 시절, 나는 시(詩)를

절에서 하는 말씀으로 읽었다

그리하여 나는

절을 찾아다니며 길을 찾았다


나이 들어, 나는 시(詩)에서

말씀으로 짓는 사원을 본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말씀 처마 끝의 풍경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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