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스스로를 합리적인 존재라 믿으며 살아간다. 의식의 명징함 속에서 이성을 따르고, 공정하게 판단하며, 주체적으로 삶을 영위한다고 과신한다. 그러나 진지한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그 이성적 생각을 만들어내는 마음과 뇌라는 동일한 공장에서 연출되는 다른 두 생산품인 꿈과 즉흥적 생각의 품질을 분석해 보자. 꿈은 통제 불가능한 혼란과 무질서 그 자체이며, 즉흥적 생각은 뿌리 깊은 본능과 습관을 따라다닌다. 같은 마음이라는 뿌리에서 나오는데, 오직 이성만 별도의 정교한 공정 라인에서 깨끗하게 제조된다고 믿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뇌과학은 이미 이성의 한계를 밝혀내고 있다. 이성의 공장인 좌뇌는 정당하지 않은 본능적 행동에 그럴듯한 스토리를 붙이는 변명 제조기에 불과하며, 우리가 합리적 결단을 내렸다고 느끼기 수초 전에 뇌의 무의식적 영역은 이미 결정을 끝마쳤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예를 들어 타인의 무단횡단에는 몰상식하다며 이성적 비난을 퍼붓지만, 자신이 급할 때는 상황상 어쩔 수 없다며 이성적인 합리화를 한다. 이전의 결정과 정반대의 결정을 내려놓고도 이성은 양쪽 모두를 열렬히 옹호한다. 감정이 잠재의식의 지배를 받는 즉흥적 선택이라면, 이성은 자기 정당화에 혈안이 된 카멜레온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리고 그 인간의 생각은 모두 고장 난 것인가? 불행히도 그렇게 보인다. 우리는 완전히 고장 난 존재들이다. 그리고 고장 난 개인들이 모여 만든 집단적 결합체인 슬롯 역시 우리가 매일 목격하는 것처럼 불신과 차별, 무한한 분열로 가득 차 있다. 에리히 프롬이 경고했듯이, 이 고장 난 기계로서의 인간은 존재(Being)의 감각을 잊은 채, 세상을 조종하고 소유하며 자기 정당화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소유(Having)의 양식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그렇다면 고장 난 이성의 공동체인 슬롯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바로 약속된 환상이라는 거미줄의 힘이다. 이토록 고장 난 판단력을 가진 개체들이 모였음에도 슬롯가 당장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는 이유는 오히려 역설적이다. 슬롯가 구성원들의 완벽한 합리성 위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된 합리화와 제도라는 타성 위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상호 이익을 위한 규칙의 기계화가 생겨났다. 법과 제도는 각 개인의 불안정한 이성을 믿지 않는다. 대신 "서로를 침해하지 않는 편이 장기적으로 이득"이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셈법을 시스템으로 고착화했다. 또한 슬롯에는 환상의 동조가 작동한다. 우리는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슬롯에 살고 있다는 집단적 착각(Collective Illusion)을 서로 연기함으로써 슬롯적 무질서가 가져올 극심한 공포를 회피한다. 즉, 슬롯는 건강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고장 난 기계들이 서로의 고장을 감추기 위해 짜놓은 약속된 거미줄 덕분에 가까스로 굴러가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고장 난 기계에서 존재로 돌아가는 해답을 찾아본다. 자기 합리화의 굴레와 소유욕이라는 메커니즘에 갇힌 고장 난 인간 기계는 어떻게 해야 진정한 존재로 돌아가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우선 이성의 완벽함이라는 신화를 파기해야 한다. 이는 겸손과 자각을 통해 가능하다. 가장 먼저 할 일은 나의 이성이 완벽하지 않으며, 내가 내린 정당해 보이는 수많은 결정들이 사실은 좌뇌의 변명이자 자기 합리화였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의 오류 가능성을 철저히 자각할 때, 타인을 향한 거만한 비난은 멈추고 자신을 향한 정직한 통찰이 시작된다.
또한 자신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메타인지와 관조의 필요성이다. 우리는 뇌에서 떠오르는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즉흥적 생각과 꿈이 나도 모르게 솟구치듯이, 이성적 생각 역시 뇌의 자동화된 반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수용해야 한다. 떠오르는 생각을 나라고 믿지 말고, "아, 내 뇌가 또 그럴듯한 변명을 만들어내고 있구나"라고 한 걸음 물러서서 관조하는 메타인지를 해야 한다.
그런 각성 위에서 에리히 프롬이 말한 소유적 지성에서 존재적 감각으로의 전환이 시작된다. 소유의 양식이란 세상을 평가하고, 결론 내리고, 이기기 위해 논리를 수단화하며, 타인과 물질을 집착하여 통제하려 하는 태도이다. 이에 반해 존재의 양식이란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현상을 합리화나 판단 없이 그대로 감각하는 것이다. 꽃을 보고 이것은 무슨 종이며 얼마의 가치가 있는가를 계산하는 것은 소유의 뇌다. 반대로 그저 꽃의 색과 향기, 그 순간의 존재감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이 존재의 양식이다. 자기 합리화의 되새김질을 멈추고, 지금 이 순간의 생명력과 연결될 때 비로소 뇌의 고장 난 스위치가 꺼진다.
이런 삶의 태도는 자기 정당화를 넘어서서 연민과 타자성의 회복으로 인도한다. 나 역시 고장 난 존재이고, 상대방 역시 고장 난 이성으로 방어막을 치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에 대한 진정한 연민이 싹튼다. 서로의 고장 남을 인정하는 것, 나의 카멜레온 같은 이성을 내려놓고 타인의 아픔에 조건 없이 응답하는 관계성 속에서 소유로 메말라 가던 인간은 존재의 충만함을 회복하게 된다.
우리의 이성은 도덕적이지도 않고 위대한 지휘자가 아니라, 이미 내려진 결정 뒤에서 깃발을 흔드는 열렬한 합리화의 하수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참담한 진실을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기계적인 삶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다. 나의 이성이 고장 났음을 인정하는 정직함, 생각의 속임수를 알아차리는 깨어있음, 그리고 세상을 소유하고 규정하려는 탐욕을 내려놓고 순간의 존재에 몰입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길 끝에서 우리는 비로소 합리적인 척하는 생물학적 기계에서 벗어나, 충만하게 숨 쉬는 존재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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