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일어나 걷기와 글쓰기

bywinterfyellb

최근 나의 글쓰기에 어딘가 한계를 느끼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내가 생각하기에 롤모델로 삼을 만한 산문가와 시인을 각각 읽기로 했다. 하나는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고, 다른 하나는 김수영의 시집, <거대한 뿌리> 였다. 읽다보니 그 중에서 내게 유달리 인상깊게 다가오는 작품과 글이 있어 내가 배운 작법을 공유할 겸 그에 대한 단상도 적어볼까 한다.


먼저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무기징역수로 감옥에서 가족들에게 보내신 편지들을 엮은 바카라이다. 이 바카라에는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이론이 들어있는 것만이 아니라(물론 그 안의 의미의 깊이는 인문학적이겠지만). 감옥에서 겪거나 배우셨던 구체적인 사례나 경험이 녹아들어있다. 나의 글은 언제나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느낌이 강했는데, 이번을 계기로 그러한 점을 고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와 이어지는 지점은 그분의 글은 일상 속의 사소한 소재로 글을 쓰시더라도 그 안에 큰 메세지를 담고 계셨다는 점이다. 거창한 프레임의 이야기만 하면 독자들에게 다가가기에는 접근성이 협소해진다. 그러나 사람들이 쉽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내용으로도 심오한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전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이상적인 글이라고 생각한다. 박학한 무지를 범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김수영 시인의 시집 <거대한 뿌리>와 같은 경우에는 참여시인의 상징이었던 김수영 시인의 자유로운 철학이 담겨있다. 하지만 그러한 시대적인 배경 이외에도 김수영 시인의 작품들은 몇 가지 중요한 형식적인 가르침을 내게 제공해주었다.


첫째는 그 동안 나는 자연물만을 주로 작품의 소재로 하였는데, 김수영 시인은 다양한 사건,현상,인공물 등 다양한 소재를 활용하였다. 둘째, 김수영 시인의 작품들은 아무래도 나보다 경험이 많으셔서 그런지 메타포의 정교함이 나의 습작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시의 상징을 조금 더 개발할 필요가 있겠다. 마지막으로 비유는 설명이라기보다 체험에 의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나는 시를 주로 묘사하듯이 쓰는 경향이 강했는데 그러다보니 묘사한 부분이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으면 부연설명을 해주는 방식으로 시가 사변적이게 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김수영 시인의 작품들은 은유적인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많은 묘사를 하지 않은 채 독자들의 상상과 체험을 자극해 스스로 그 의미를 파악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작품들 가운데에는 나의 어떤 시와 유사한 주제를 가진 것들이 존재한다. 하나는 신영복 선생님의 글 중 하나인 <나는 걷고 싶다>(1988..01.30)과 <풀>이라는 김수영 시인의 작품 중 마지막 연이다. 일단 그 둘을 인용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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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비로 다 내렸기 떄문인지 눈이 인색한 겨울이었습니다. 눈이 내리면 눈 뒤 끝의 매서운 추위는 죄다 우리가 입어야 하는데도 눈 한번 찐하게 안 오나,젊은 친구들 기다려쌓더니 얼마 전 사흘 내리 눈 내리는 날 기어이 운동장 구석에 눈 사람 하나 세웠습니다. 옥뜰에 있는 눈사람, 연탄 조각으로 가슴에 박은 글귀가 섬뜩합니다.


“나는 걷고 싶다.”


있으면서도 걷지 못하는 우리들의 다리를 깨닫게 하는 그 글귀는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 이마를 때립니다.”


<나는 걷고 싶다>(1988.01.30) 中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빝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 中


이 먼저 첫 번째 작품은 자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걷는다는 행위를 자연스럽게 여기지만 실로 걷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자 자유의 수단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될 것이다. 어떤 아이가 태어나기를 걷지 못하게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자. 그 아이는 걷지 못하는 관계로 늘 바닥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상태로 세상을 인지할 것이고, 만일 그외의 시야를 확보하게 된다해도 그때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다가 여러 복잡한 절차와 도구가 필요하다.


이동이 자유롭다는 것은 그만큼 인식의 확대와 행위의 자율성을 원활하게 확보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리 없는 눈사람이 걷고 싶어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다리가 있는데도 걷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러 가지로 해석해볼 수 있지만 어쩌면 자유를 처음부터 가지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가진 자유를 빼앗긴 것이 아닌지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 눈사람이 아닌 죄수들은 감옥에 들어오기 전에는 자유를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걷는다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삶의 추진체와 같은 것인데(마치 자유처럼), 이를 행할 수가 없으니 답답했을 것이다.


두 번째 김수영의 시 <풀>은 바람에 시달리는 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날씨가 안 좋아서 바람이 매섭게 분다. 풀은 그 억압적인 손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풀은 그럼에도 버티려고 애를 쓴다. 거의 바닥에 주저앉다시피 해도 자신을 억압하는 바람보다도 늦게 쓰러지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은 마지막 행이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역경과 억압은 풀을 더욱 더 강해가 만들 뿐이라는 반전이 강렬하다. 무력한 것처럼 보이는 풀, 하찮아 보이는 풀도 역경을 이겨낼 수 있고 또 그렇게 이겨낸 후에는 강인해진 모습으로 재탄생한다는 것은 인간 승리의 희망을 보여준다.


이제 마지막으로 나의 습작시 <걸음마>를 읽어보자


“나는 일어서고 싶다.

나는 일어서고 싶다.

나는 일어서고 싶다.

다리 다친 사람은

혼자 설 수 없으니

같이 일어서자.

아픈 게 죄이냐

슬픈 게 죄이냐

무력한 게 죄이냐

어릴 적 어머니가 당신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지금 걸을 수 있었겠는가?”


이 시는 삶의 무게와 상처로 인해 결국 꺾이거나 넘어진 사람에게 같이 역경을 극복해보자고 제안한다. 다리 다친 사람은 신영복 선생님의 산문에 나온 죄수들처럼 자유를 빼앗긴 상태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고립되어 있어 손을 잡아줄 사람이 없어 일어설 수가 없다. 즉 만일 협력하여 같이 스스로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도 치유되고 그의 역경도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릴 적 걸음마를 가르쳐주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다른 사람에게 서로 손을 내미는 것을 주저하지 말자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일어서려는 와중에도 바람은 분다. 풀처럼 무력한 우리를 억압하고 박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유일하게 이 싸움에서 지지 않는 방법은 그저 버티는 것이다. 다만 능동적으로 버티는 것이다. 바람보다 더 오래 더 끈질기게 쓰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다리가 단단한 뿌리가 되어 땅에 깊게 박힐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더 이상 쓰러지지 않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같이 도우며 인내하는 것. 이것이 최종적으로 나의 모든 습작들이, 앞으로의 나의 글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이다. 이를 향해 가는 길은 쉽지 않을 것이며 나는 아직 한참 부족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방향성이 나에게는 중요한 나침반이 된다. 이것이 내 글의 본질이 되어 나를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나와 나의 글이 모두가 지지할 수 있는 거목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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