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설계자 - 1부 총론

by김동은WhtDrgon

이 글은 https://fishingproductfr.com/@whtdrgon/437 에서 6년 전에 예고했던 글에 대한 숙제와 정리의 성격입니다. 위의 글은 하나의 페이스북 포스팅에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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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라 함은 위 포스팅에 이어 적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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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닿을 길입니다. 같은 길을 걸으면 우린 같은 동지, 같은 직능인입니다.

한 발자국 먼저 걸은 사람으로서,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1부 총론

1편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관통 질문: 세계관은 스토리와 무엇이 다른가.

세계관의 정의: 가지 않은 길, 열지 않은 문

Weltanschauung: 철학 용어에서 콘텐츠 용어로

유니버스: 스토리를 품은 시공간

스토리와 세계관의 전도 관계: 사건을 위한 시공간, 시공간에서 나는 사건

배경설정과 세계관: 종속된 그릇과 탄생의 기반

캐넌 Canon과 파논 Fanon

캠페인 세팅: TRPG가 먼저 정리한 개념

본말전도: 낭비와 사치와 불필요함이 필수인 작업

설정놀음 Conworlding과 세계화 World-building

CT화: 문화기술이 되어야 하는 이유


2편 핍진성, 허락의 메커니즘

관통 질문: 독자는 왜 허구의 세계를 믿어주는가.

그럴듯함: 사실성과 핍진성은 다르다

핍진성 verisimilitude의 철학

불신의 정지 suspension of disbelief

허락받은 세계관: 독자와 맺는 계약

다이브: 몰입의 구조

기계장치의 신 deus ex machina: 허락이 깨지는 순간

패러독스: 설정 충돌의 비용

일관된 법칙: 은연중에 체감되는 완성도

디테일의 원리: 상세 설정이 패러독스를 줄이는 이유

설정과 핍진성의 경계: 실무 작업은 어디까지인가


3편 왜 세계관인가

관통 질문: 세계관은 무엇을 벌어다 주는가.

OSMU: 원 소스 멀티 유즈

MUOS: 방향을 뒤집은 발상

트랜스미디어: 매체를 건너는 서사

IP 확장: 저작물에서 지식재산으로

투자유치: 세계관이 투자 요소가 되는 이유

파생버전의 발생: 스토리텔링의 다양함

파생버전의 관리: 갈라진 버전을 다루는 원칙

범용성: 세계관의 상품성

팬의 상상: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조건

산출물 우선주의: 전달 가능한 산출물이 최우선인 이유


4편 설계자라는 직업

관통 질문: 작가와 설계자는 무엇이 다른가.

작가, 기획자, 설계자의 차이

설계와 편집: 이야기는 쓰고 세계관은 설계한다

TRPG 마스터와 TRPG 세팅의 차이

자연발생적 세계관과 인위적 세계관

유니버스 디자이너: 직업으로 성립하는 조건

업무의 분리: 시나리오 기획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들

도입기의 의무감: 설정을 다 써야 할 것 같은 압박

상상력 불가침: 작가의 상상력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범용성과 참신함의 경계

실험적 협업: 게임 밖 창작자들과 일하는 법


세계관설계자 1편.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세계관은 콘텐츠 업계에서 가장 자주 쓰이면서 가장 다르게 이해되는 용어다. 누군가는 작품의 배경을, 누군가는 설정집을, 누군가는 IP 전체를 가리켜 세계관이라 부른다. 이 연재는 세계관을 만드는 일을 직업의 기술로 정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출발점은 하나의 질문이다: 세계관은 스토리와 무엇이 다른가. 1편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용어의 뿌리와 이웃 개념들을 확정한다. 여기서 확정된 단어들은 이후 열네 편에서 다시 설명하지 않고 그대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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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관의 정의: 가지 않은 길, 열지 않은 문

세계관은 가지 않은 길, 열지 않은 문에 대한 설명이다. 스토리가 비춰주지 않은 곳에 대한 자료이며, 멋진 스토리가 벌어지고 있는 바로 그곳에 대한 기록이다. 흥미롭게 본 영화나 드라마를 떠올리면 정의가 선명해진다. 주인공이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궁금할 수 있다. 엑스트라인 정비공의 삶이 궁금할 수 있고, 저 조직원들은 다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화면 구석의 풍경은 어떤 곳인지 더 보고 싶을 수 있다. 스토리는 이 질문들에 답하지 않는다. 답할 의무도 없다. 스토리의 임무는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관은 이 질문들에 답하는 자료의 총체다. 가지 않은 길은 주인공의 선택만이 아니다. 등장하지 않은 인물, 언급만 된 도시, 지나간 전쟁의 전말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질문이 향할 수 있는 모든 곳이 세계관의 잠재 범위다. 그래서 세계관은 화면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지만 세계관은 스토리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법칙과 환경을 담고 있다. 관객은 허무맹랑한 가상의 이야기에서도 일관된 법칙과 일치감을 은연중에 느낀다. 이 감각이 작품의 완성도를 올리고, 화면 밖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든다. 설계자에게 이 정의는 작업 범위의 선언이다: 설계자는 카메라가 가지 않는 곳을 만드는 사람이다. 무엇을 비출지는 작가가 정하지만, 비출 수 있는 곳을 마련하는 일은 다른 직무다. 이 연재 전체가 그 직무에 대한 이야기다.


2. Weltanschauung: 철학 용어에서 콘텐츠 용어로

카메라 밖을 가리키는 이 단어의 뿌리는 철학에 있다. 세계관은 독일어 Weltanschauung의 번역어다. Welt는 세계, Anschauung은 관점이다. 철학에서 세계관은 어떤 지식이나 관점을 가지고 세계를 근본적으로 인식하는 방식이나 틀을 뜻한다. 자연에 대한 원리와 함께 주제, 가치, 감정, 윤리까지 포함하는 큰 개념이다. 철학자 딜타이는 세계관을 자연주의, 자유의 관념론, 객관적 관념론의 세 유형으로 나누기도 했다. 콘텐츠 분야는 이 단어를 좁혀서 쓴다. 작품 속 세계에 한정하여, 이 세상은 어디서 왔으며 어떤 역사와 삶을 거쳐왔고 캐릭터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관점이 콘텐츠의 세계관이다. 마법이 있는 세계라면 그 세계는 어떻게 흘러왔고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사는가. 히어로가 있는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어떤 하루를 보내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의 체계가 곧 세계관이다. 철학의 세계관이 현실 세계를 향한 틀이라면, 콘텐츠의 세계관은 만들어진 세계를 향한 틀이다. 대상이 다를 뿐 구조는 닮았고, 그래서 번역어의 혼동이 계속된다. 두 용법의 간극을 알아두면 실무에서 소모적인 논쟁을 줄일 수 있다. 철학의 세계관을 기준으로 콘텐츠의 세계관을 비판하는 일도, 그 반대도 서로 다른 단어를 두고 다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연재에서 세계관은 콘텐츠의 용법을 따르며, 상세한 설정의 체계까지 포함하는 넓은 뜻으로 쓴다.


3. 유니버스: 스토리를 품은 시공간

콘텐츠의 세계관과 거의 같은 자리에서 쓰이는 말이 유니버스 universe다. 유니버스는 스토리를 품은 곳이다.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스타워즈 같은 대작들은 각자의 유니버스를 가진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유니버스는 대작의 전유물이 아니다. 어떤 이야기든 그 이야기가 벌어지는 시공간을 가지며, 그 시공간이 곧 그 작품의 유니버스다. 업계에서는 세계관, 유니버스, 세계, 월드 같은 말들이 뒤섞여 쓰인다. 영어권에서는 용도에 따라 worldview, campaign setting, universe, canon, fanon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worldview는 인식의 틀에, universe는 시공간 그 자체에 무게가 실린 말이다. 이 구분은 알아둘 가치가 있지만, 실무에서 매번 가려 쓰기는 어렵다. 나는 세계관과 유니버스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시공간으로서의 세계와 그 세계를 이해하는 관점은 실무에서 한 덩어리로 다뤄지기 때문이다. 세계를 만들면 관점이 생기고, 관점을 정리하면 세계가 구체화된다. 계약서와 기획서에서 어느 단어를 쓸지는 조직마다 다르지만, 한 문서 안에서는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안전하다. 단어가 오가는 문서일수록 정의 조항이 필요하다. 이 연재에서도 두 단어를 구분 없이 쓴다. 다만 뒤에 나올 캐넌과 파논은 유니버스와 지위가 다른 개념이므로 섞어 쓰지 않는다. 유니버스가 장소라면 캐넌은 그 장소에 대한 공인된 기록이다.


4. 스토리와 세계관의 전도 관계

유니버스와 스토리의 관계에는 방향이 있다. 보통의 스토리에서 시공간은 사건을 위해 존재한다. 결투 장면을 위해 부두가 등장하고, 이별 장면을 위해 공항이 등장한다. 사건이 주인이고 시공간이 종이다. 세계관은 거꾸로다. 세계관은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시공간에 대한 내용이다. 부두가 먼저 있고, 그 부두의 물류와 이권과 조직이 있고, 그래서 그곳에서 결투가 일어날 수 있다. 시공간이 주인이고 사건은 그 위에서 발생하는 결과다. 전도는 서술의 분량에서도 드러난다. 스토리는 부두를 한 문장으로 소비하지만, 세계관은 부두의 조수 시간표까지 적을 수 있다. 무엇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두 작업은 정반대로 답하고, 이 답이 문서의 목차까지 바꾼다. 이 주종의 역전이 두 작업의 방향을 가른다. 작가는 사건에 필요한 만큼만 배경을 소환한다. 필요 없는 배경은 쓰지 않는 것이 좋은 작법이다. 설계자는 반대로 사건이 아직 없는 시간과 장소까지 만든다. 지금 어떤 사건에도 쓰이지 않는 부두의 창고 목록이 설계자에게는 정당한 작업물이다. 같은 재료를 다뤄도 주종 관계가 다르면 다른 직무다. 이 방향의 차이를 모르면 두 직무는 서로를 오해한다. 작가의 눈에 설계자는 쓸데없는 것을 만드는 사람으로 보이고, 설계자의 눈에 작가는 세계를 소모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둘 다 틀렸다. 방향이 다른 것이지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다. 두 방향이 만나는 지점에서 작품이 나온다.


5. 배경설정과 세계관: 종속된 그릇과 탄생의 기반

방향의 차이는 배경설정과 세계관의 차이로 이어진다. 스토리 창작에서 배경설정은 이야기를 이루는 사건의 배경에 한정된다. 이야기에 종속되어, 이야기라는 무형의 것이 담기는 그릇의 역할을 한다. 그릇은 내용물에 맞춰 준비된다. 이야기가 끝나면 그릇의 역할도 끝난다. 세계관은 같은 재료로 만들어지지만 지위가 다르다. 세계관은 이야기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이야기 또는 새로운 시나리오가 탄생하는 기반이 된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도 세계관은 남아 다음 이야기를 받칠 수 있다. 그릇은 소모품이고 기반은 자산이라는 차이다. 회계에 견주면 배경설정은 비용으로 처리되고 세계관은 상각 되며 남는 자산이다. 투자와 관리의 기준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둘은 본디 같은 것이다. 어떤 작품의 배경설정을 모아 정리하고 확장하면 세계관이 되고, 세계관에서 한 이야기에 필요한 부분만 잘라내면 배경설정이 된다. 그래서 두 단어는 자주 혼용되고, 혼용 자체가 큰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지위를 혼동할 때 생긴다. 배경설정만 있는 작품에 세계관 확장을 요구하면 기반 없이 증축하는 일이 되고, 세계관이 있는 작품을 배경설정 수준으로 관리하면 기반을 방치하는 일이 된다. 지금 다루는 문서가 그릇인지 기반인지를 판별하는 것이 관리의 첫 단계다. 판별 기준은 간단하다: 이 문서로 다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가. 시작할 수 있다면 기반이고, 이 이야기의 이해에만 쓰인다면 그릇이다.

6. 캐넌 Canon과 파논 Fanon

기반이 되는 문서에는 공인이 필요하다. 캐넌canon은 공식으로 인정된 설정, 곧 세계의 정본이다. 원래 종교의 정경을 뜻하는 말이었고, 셜록 홈즈 팬들이 코난 도일이 직접 쓴 작품들을 캐넌이라 부르면서 콘텐츠 용어가 됐다. 파논fanon은 팬fan과 캐넌canon의 합성어로, 팬덤이 널리 합의한 비공식 설정을 뜻한다. 공식 문서 어디에도 없지만 팬들 사이에서는 사실처럼 통용되는 설정들이 파논이다. 둘의 관계에는 구조가 있다. 캐넌은 권리자의 배타적 결정권 위에 서고, 파논은 캐넌이 답하지 않은 공백에서 자란다. 캐넌이 촘촘할수록 파논의 자리는 줄고, 캐넌이 성길수록 파논은 풍성해진다. 다만 성긴 캐넌은 파논끼리의 충돌도 함께 키운다. 어느 파논이 맞는지 판정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판정 근거의 제공이 캐넌의 실질적인 기능이다. 파논이 공식 작품에 채택되어 캐넌으로 승격되는 일도 있고, 새 캐넌이 기존 파논을 부정해 팬덤과 충돌하는 일도 있다. 승격도 충돌도 세계가 살아 있다는 신호다. 죽은 세계에는 파논이 자라지 않는다. 설계자는 이 구조의 관리자다. 캐넌의 등재와 개정을 통제하는 동시에, 파논을 관찰해 세계에 대한 수요를 읽는다. 파논이 몰리는 자리는 팬들이 이야기를 원하는 자리다. 그래서 공백은 실패가 아니라 설계의 대상이다. 어디를 채우고 어디를 비워둘 것인가. 이 질문은 연재 후반의 방법론에서 다시 다룬다.


7. 캠페인 세팅: TRPG가 먼저 정리한 개념

캐넌을 문서 상품으로 먼저 완성한 분야가 있다. 테이블탑 롤플레잉 게임TRPG이다. TRPG는 진행자와 참가자들이 규칙과 주사위로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가는 놀이이며, 여러 회에 걸쳐 이어지는 플레이 묶음을 캠페인campaign이라 부른다. 캠페인 세팅campaign setting은 그 캠페인들이 벌어지는 세계의 자료집이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의 포가튼 렐름 같은 세팅집에는 지리, 국가, 종족, 신앙, 역사, 경제가 정리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문서가 특정 스토리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진행자가 어떤 모험을 굴려도 견디도록 만들어진, 스토리 없이 세계만 담은 상품이다. 그리고 이 상품은 수십 년째 시장에서 팔린다. 세계관 작업이 막연한 창작이 아니라 규격을 가진 산출물이 될 수 있다는 증거가 여기에 이미 있다. 세팅집에는 목차가 있고, 항목의 형식이 있고, 판본의 개정 이력이 있다. 누가 써도 참조할 수 있게 만들어진 문서 규격이다. 규격의 힘은 교체 가능성에 있다. 담당자가 바뀌어도 세계는 이어진다. 감으로 쥐고 있는 세계는 담당자와 함께 사라지고, 세팅집은 그 위험을 규격으로 막은 사례다. 이 연재가 지향하는 산출물의 원형도 캠페인 세팅에 가깝다. 다만 TRPG 밖의 매체들은 각자 다른 요구를 가지므로, 그 규격을 그대로 가져오는 대신 원리를 가져온다. 원리는 셋이다: 스토리로부터의 독립, 항목의 규격화, 개정 이력의 관리.


8. 본말전도: 낭비와 사치와 불필요함이 필수인 작업

세팅집의 두께가 말해주는 사실이 하나 있다. 세계관 작업은 본말이 뒤집힌 작업이라는 점이다. 이야기는 스스로를 뼈대와 목적으로 삼아 설정setting을 필요한 만큼, 과하지 않게 사용한다. 좋은 작가일수록 설정을 아껴 쓴다. 세계관은 반대로 아직 사용되지 않은 것들을 만든다. 목적이 불분명하고 범위도 명확하지 않은 채, 매우 폭넓은 분야를 디테일하게 다루게 된다. 이야기에서 한 줄 스쳐 지나가는 백동화 한 닢에, 그 가치와 제조와 유통에 대한 몇 배 분량의 디테일이 붙는다. 화폐를 파면 광산이 나오고, 광산을 파면 노동과 세금이 나온다. 한 개의 사물이 산업과 제도를 연쇄적으로 소환하는 것이고, 이 연쇄가 세계에 밀도를 만든다. 이 본말전도를 통해 세계관은 스스로 점차 구체화되고 범위를 넓혀간다. 여기서 판별 기준 하나가 나온다. 만일 필요한 만큼의 세계관만 정확하게 요구된다면, 그 일은 세계관 작업이 아니라 자료조사와 세팅 작업이다. 세계관은 낭비와 사치와 불필요함을 필수요소로 가진다. 지금 안 쓰는 창고 목록이 다음 작품의 무대가 되고, 버려질 뻔한 디테일이 팬덤의 놀이터가 된다. 낭비가 회수되는 시점은 예측할 수 없지만, 회수될 자리를 만들어둘 수는 있다. 그러므로 설계자는 낭비를 변명하지 않아야 한다. 대신 낭비를 관리해야 한다. 어디까지 낭비할지를 정하는 기술이 뒤에서 다룰 방법론의 핵심이다.


9. 설정놀음Conworlding과 세계화World-building

낭비를 관리하지 못한 작업에는 이미 이름이 붙어 있다. 설정놀음이다. 영어권에는 가상 세계를 구축하는 취미를 가리키는 콘월딩conworlding이라는 말이 있고, 같은 활동의 격식 있는 이름으로 월드빌딩world-building, 우리말로 세계화가 있다. 놀음이라는 접미어에는 자조와 폄하가 섞여 있다. 쓰이지 않을 설정을 끝없이 쌓는 일, 이야기 없이 지도와 연표만 자라는 일에 대한 경계다. 그 경계는 정당하다. 다만 이 단계는 부끄러운 일탈이 아니라 필연적인 과도기다. 게임 시나리오 기획자와 월드 크리에이터들이 늘 하던 일이 게임 바깥으로 확장되는 중이고, 확장기의 작업은 어디서나 놀음처럼 보인다. 새 직무는 언제나 기존 직무의 취미처럼 보이는 시기를 지난다. 게임 기획이 그랬고 UX 디자인이 그랬다. 명칭이 정리되지 않은 분야에는 직무 기술서도 없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어느 회사에서는 시나리오 기획자, 어느 회사에서는 세계관 담당자, 어느 팀에서는 그냥 설정 잘 아는 사람으로 불린다. 호칭이 다르면 업무 범위와 평가 기준도 제각각이 된다. 채용 공고를 쓸 수 없는 직무는 조직에 자리를 얻지 못하고, 자리가 없으면 후임도 없다. 그래서 용어의 위계를 세우는 일이 직업화의 첫 단추다. 놀음과 작업을 가르는 기준은 앞에서 이미 나왔다: 산출물이 다음 이야기의 기반이 되는가, 그리고 그 낭비가 관리되고 있는가.


10. CT화: 문화기술이 되어야 하는 이유

놀음이 직업이 되려면 기술이 되어야 한다. 문화기술Culture Technology은 콘텐츠 제작의 노하우를 재현 가능한 기술로 정리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리로 치면 손맛을 레시피로 옮기는 일이다. 개인의 감에 있던 것을 절차와 규격으로 옮겨, 다른 사람이 배우고 반복할 수 있게 만드는 작업이다. 세계관의 중요성은 이제 투자의 중요 요소가 될 만큼 커졌다. 그러나 중요하니까 많은 돈과 인력을 들여야 한다는 말로는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 중요하다는 주장과 일을 맡길 수 있다는 신뢰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신뢰는 산출물에서 나온다. 말로 설명되는 전문성은 검증할 수 없지만, 문서로 제출되는 전문성은 검증할 수 있다. 검증할 수 있어야 값을 매길 수 있다. 좋든 싫든 유니버스 디자이너의 역할을 맡게 됐다면, 지금은 전달 가능한 산출물의 형태를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전달 가능하다는 것은 받은 사람이 검색하고 인용하고 검수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산출물이 쌓여야 작업의 견적이 나오고, 견적이 나와야 직무가 정규화된다. 견적이 있어야 발주가 있고, 발주가 있어야 시장이 선다. 저작물IP을 다양한 콘텐츠로 확장하는 흐름 속에서 세계관 작업이라는 업무는 이미 생겨나고 있다. 그 업무를 지휘할 유니버스 디자이너가 전문직업으로 서려면, 세계관 작업의 특징들이 문화기술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앞서 해본 사람의 시행착오를 공유해 디딤돌을 놓는 것, 그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다.


세계관설계자 2편. 핍진성, 허락의 메커니즘

세계관이 스토리가 비추지 않는 곳까지 만드는 작업이라면, 곧바로 의문이 따라온다. 보이지도 않는 것을 왜 만드는가. 답은 독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승인 절차에 있다. 독자는 용과 마법과 초광속 우주선을 믿어준다. 아무렇게나 믿어주는 것은 아니다. 조건이 있고, 절차가 있고, 파기 사유가 있다. 2편의 관통 질문은 이것이다: 독자는 왜 허구의 세계를 믿어주는가. 이 승인의 구조를 알아야 세계관이 어디에 힘을 써야 하는지가 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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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럴듯함: 사실성과 핍진성은 다르다

승인의 첫 열쇠는 그럴듯함이다. 그럴듯함은 사실성과 다르다. 사실성은 현실과 일치하는 정도이고, 그럴듯함은 그 세계 안에서 말이 되는 정도다. 용은 사실적이지 않다. 그러나 용이 나오는 세계에서 용의 비늘이 창을 튕겨내는 것은 그럴듯하다. 반대로 현실에 있는 일도 그럴듯하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일어난 우연한 사건을 그대로 소설에 옮기면 독자는 작위적이라고 느낀다. 현실은 우연을 허락하지만 이야기는 우연을 잘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화 기반 작품이 오히려 각색을 거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실을 그럴듯함으로 번역하는 공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창작의 세계는 현실보다 엄격한 심사를 받는다. 현실은 존재 자체가 증명이지만, 허구는 매 순간 자신이 말이 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이 입증의 대상은 사실 여부가 아니라 내적인 정합성이다. 독자가 검사하는 것은 이 세계가 지구의 물리법칙을 따르는가가 아니라, 이 세계가 스스로 세운 법칙을 따르는가이다. 설계자의 일은 여기서 갈린다. 고증 담당자는 현실과의 일치를 관리하고, 설계자는 세계 내부의 일치를 관리한다. 두 일은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심사 기준이 다르다. 사극의 복식 고증과 가상 왕국의 복식 설정은 같은 기술을 쓰지만 다른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그럴듯함이라는 말은 일상어라서 기준으로 삼기에 무르다. 이 무른 감각에 학술적인 이름과 구조를 붙인 것이 다음 개념이다.


2. 핍진성verisimilitude의 철학

그럴듯함의 학명이 핍진성verisimilitude이다. 라틴어 베룸verum, 곧 진실과 시밀리스similis, 곧 닮음이 합쳐진 말로, 진실을 닮은 정도라는 뜻이다. 문예 이론에서 핍진성은 허구가 독자에게 참처럼 받아들여지는 성질을 가리킨다. 핵심은 참이 아니라 참처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개연성 있는 불가능이 개연성 없는 가능보다 낫다고 했다. 일어날 수 없지만 말이 되는 이야기가, 일어날 수 있지만 말이 안 되는 이야기보다 낫다는 뜻이다. 이 오래된 명제가 세계관 작업의 헌법이다. 핍진성은 두 층위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는 문화적 핍진성으로, 독자가 속한 현실의 상식과 어긋나지 않는 정도다. 다른 하나는 장르적 핍진성으로, 그 장르의 관습과 어긋나지 않는 정도다. 무협의 경공은 물리학과 어긋나지만 장르적 핍진성 안에 있다. 같은 경공이 현대 법정물에 나오면 두 층위 모두에서 기각된다. 어느 법정에서 심사받는지가 먼저 정해져야 하는 것이다. 독자는 두 층위를 오가며 심사하고, 장르에 익숙할수록 장르적 핍진성의 비중이 커진다. 상세한 설정이 핍진성을 올려준다는 명제도 여기서 근거를 얻는다. 설정은 세계가 스스로 세운 법칙의 목록이고, 목록이 촘촘할수록 참처럼 보일 재료가 많아진다. 다만 재료는 서로 어긋나지 않아야 재료다. 양이 정합성을 앞설 수는 없다. 핍진성은 이 연재 전체에서 품질의 척도로 계속 쓰인다.


3. 불신의 정지suspension of disbelief

핍진성이 세계 쪽의 성질이라면, 독자 쪽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행위가 일어난다. 시인 콜리지가 이름 붙인 불신의 정지suspension of disbelief다. 독자는 허구를 접할 때 이것은 가짜라는 판단을 자발적으로 멈춘다. 콜리지는 여기에 자발적willing이라는 수식을 붙였다. 속는 것이 아니라 속아주는 것이다. 마술 공연의 관객과 같다. 트릭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입장하고, 트릭이 보이지 않기를 함께 바란다. 이 구분이 중요하다. 속이는 일은 작가의 기술이지만, 속아주는 일은 독자의 협조다. 협조에는 대가가 요구된다. 독자는 불신을 멈추는 대신 그만한 재미와 정합성을 돌려받기를 기대한다. 기대가 배반되면 협조는 즉시 철회된다. 철회의 순간은 누구나 경험한 적이 있다. 몰입해서 보던 영화에서 갑자기 어색한 대사 하나에 극장 의자의 감촉이 돌아오는 순간이다. 불신의 정지는 스위치가 아니라 지속적인 유지 상태이며, 유지에는 계속 연료가 든다. 그 연료가 앞에서 말한 핍진성이다. 연료는 소모품이라서 초반의 승인이 끝까지 가지 않는다. 장마다 조금씩 다시 채워져야 한다. 세계관 문서의 그 많은 디테일은 결국 독자의 협조를 유지시키는 연료의 비축분이다. 설계자는 독자를 설득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협조할 준비가 된 독자가 협조를 거둘 이유를 없애는 사람이다. 방향이 수비에 가깝다는 점이 이 직무의 특징이다.


4. 허락받은 세계관: 독자와 맺는 계약

불신의 정지가 성립하는 순간, 독자와 작품 사이에는 계약이 맺어진다. 나는 이것을 허락이라고 부른다. 허락받은 세계관은 독자가 전제를 승인한 세계관이다. 계약의 조항은 대체로 이렇다: 전제는 얼마든지 커도 좋다, 대신 승인된 전제를 도중에 바꾸지 말라. 독자는 시작할 때 용이 있는 세계, 죽은 자가 돌아오는 세계, 시간이 되감기는 세계까지 통째로 승인해준다. 첫 승인의 관대함은 놀라울 정도다. 포스터와 장르 표기만 보고도 독자는 좀비의 존재나 마법의 실재 같은 거대한 전제를 미리 승인하고 들어온다. 그러나 같은 독자가 승인 이후의 작은 변경에는 가혹하다. 3화에서 은에 약하다던 괴물이 15화에서 은검을 맨손으로 잡으면 계약 위반이다. 전제의 크기는 문제가 아니고 전제의 변경이 문제다. 독자가 계약서에 서명한 항목은 세계의 크기가 아니라 세계의 항상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락은 시점의 문제이기도 하다. 세계의 규칙은 가능한 한 일찍 제시될수록 싸게 승인받는다. 늦게 나온 규칙은 아무리 정당해도 후출된 변명처럼 심사받는다. 후반에 꼭 필요한 규칙이라면 초반에 무해한 형태로 먼저 등장시키는 것이 계약을 지키는 기술이다. 설계자에게 이 계약은 두 가지 실무 지침이 된다. 첫째, 세계의 전제 목록을 작품 초반에 배치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둘째, 승인된 전제의 목록을 관리하여 어떤 창작자도 모르고 위반하지 않게 한다. 계약서의 관리자가 곧 설계자다.


5. 다이브: 몰입의 구조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 독자에게 일어나는 상태를 다이브라고 부르겠다. 다이브는 독자가 세계 바깥의 판단을 멈추고 세계 내부의 논리로 생각하기 시작한 상태다. 불신의 정지가 입장권이라면 다이브는 입장 후의 체류다. 다이브한 독자는 질문의 종류가 달라진다. 이 설정이 말이 되는가라고 묻는 대신, 그래서 주인공은 어떻게 빠져나가는가라고 묻는다. 심사관이 참가자로 바뀌는 것이다. 참가자는 세계의 규칙을 자기 추론의 도구로 쓴다. 규칙이 도구가 되는 순간부터 설정은 정보가 아니라 재미의 재료가 된다. 이 상태는 세계관 작업의 목표 지점이다. 체류의 깊이는 세계의 밀도에 비례한다. 걸어 들어갈 골목이 많고, 뒤에 사연이 있어 보이는 행인이 많고, 지도의 끝에 미답의 지명이 있을수록 독자는 더 오래 머문다. 앞에서 말한 낭비와 사치가 값을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쓰이지 않은 설정은 이야기에는 불필요했지만 체류에는 필요했던 것이다. 관광 도시와 같은 구조다. 들어가지 않을 골목이라도 존재해야 도시가 되고, 다 둘러보지 못할 크기여야 다시 찾게 된다. 다이브는 깨지기도 쉽다. 세계 바깥의 것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독자는 수면 위로 올라온다. 작가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릴 때, 현실의 논쟁이 세계를 뚫고 들어올 때, 그리고 세계가 자기 규칙을 어길 때다. 앞의 둘은 작가의 영역이지만 마지막은 설계자의 영역이다.


6.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 허락이 깨지는 순간

규칙 위반의 가장 오래된 사례에는 이미 이천 년 된 이름이 있다.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이다.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는 이야기가 꼬여 풀 수 없게 되면 기중기 장치로 신 역할의 배우를 무대에 내려보내 단번에 해결하게 했다. 세계 안의 인과로 풀리지 않은 문제를 세계 바깥의 권능으로 봉합한 것이다. 관객이 여기서 느끼는 감정은 배신감이다. 지금까지 따라온 세계의 규칙이 사실은 언제든 무시될 수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되기 때문이다. 한 번의 편리한 해결이 세계 전체의 신용을 무너뜨린다. 관객이 잃는 것은 결말이 아니라 지금까지 쌓은 추론의 가치다. 규칙이 무시되는 세계에서는 추리할 이유가 없고, 참가자였던 독자는 그 순간 관람객으로 강등된다. 현대의 기계장치의 신은 기중기를 타고 오지 않는다. 설명 없이 나타나는 새로운 능력,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결정적 아이템, 갑자기 마음을 바꾸는 악역으로 온다. 공통점은 하나다: 해결의 근거가 세계 안에 미리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설계자의 예방바카라은 근거의 선매설이다. 나중에 쓰일 해결바카라일수록 일찍, 눈에 띄지 않게, 다른 용도인 것처럼 세계에 심어둔다. 심어둔 것으로 해결하면 복선이 되고, 심지 않은 것으로 해결하면 기계장치의 신이 된다. 같은 결말이 세계관 관리에 따라 정반대의 평가를 받는다. 복선과 기계장치의 신은 결과물이 아니라 준비 이력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7. 패러독스: 설정 충돌의 비용

기계장치의 신이 단발의 위반이라면, 패러독스는 구조의 위반이다. 여기서 패러독스는 설정과 설정이 서로 충돌하여 양쪽 다 참일 수 없게 된 상태를 뜻한다. 2권에서 왕국의 인구가 십만인데 5권에서 수도 하나에 백만이 산다면 패러독스다. 순간이동이 가능한 세계에서 주인공이 마차로 한 달을 이동하면, 금지 사유가 제시되지 않는 한 패러독스다. 패러독스의 비용은 복리로 불어난다. 발견한 독자는 우선 그 장면을 의심하고, 다음에는 그 설정을 의심하고, 마침내 세계 전체를 의심한다. 한번 심사관으로 돌아간 독자는 이후의 모든 장면을 검사하며 읽는다. 다이브가 끝나는 것이다. 더 나쁜 것은 발견의 주체다. 패러독스는 대개 작가가 아니라 팬덤이 찾아낸다. 세계를 사랑해서 오래 들여다본 사람들이 가장 먼저 균열을 본다. 발견은 공유되고, 공유된 균열은 목록이 되어 세계를 따라다닌다. 신작이 나올 때마다 오래된 모순이 다시 소환된다. 세계에 대한 애정이 클수록 실망도 크고, 실망한 핵심 팬덤은 조용히 떠나지 않는다. 패러독스는 창작의 실패라기보다 관리의 실패다. 두 설정을 각각 만들 때는 둘 다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충돌은 두 설정이 대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다. 특히 제작진이 교체되는 시점, 매체를 옮기는 시점, 연재가 길어져 초기 설정이 잊히는 시점이 다발 구간이다. 대조를 시스템으로 만드는 방법은 방법론에서 다룬다.


8. 일관된 법칙: 은연중에 체감되는 완성도

패러독스의 반대편에 일관된 법칙이 있다. 일관성은 이상하게도 독자에게 잘 보이지 않는 미덕이다. 패러독스는 발견되는 순간 소란을 일으키지만, 일관성은 발견되지 않은 채 조용히 작동한다. 독자는 이 세계의 화폐 단위가 십 년째 안 바뀌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다만 이 작품은 어딘가 단단하다고 느낀다. 근거를 대라면 대지 못하지만 평점과 완주율에는 반영되는 감각이다. 완성도라는 막연한 인상의 실체 중 하나가 이 무의식적 체감이다. 일관성의 효과는 누적된다. 규칙이 지켜지는 것을 반복해서 겪은 독자는 세계에 대한 신용을 쌓고, 신용이 쌓이면 심사가 느슨해진다. 신용 높은 세계는 웬만한 무리수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로 통과된다. 신용 낮은 세계는 사소한 비약도 또 시작이라고 심사받는다. 같은 전개가 세계의 신용 등급에 따라 다른 판정을 받는 것이다. 장수 시리즈가 무리한 전개를 소화해내는 힘의 정체가 이 적립된 신용이다. 문제는 일관성의 비용 구조다. 일관성은 지킬 때는 티가 안 나고 어길 때만 티가 난다. 그래서 조직은 일관성 관리에 예산을 쓰는 일을 아까워한다. 설계자는 이 보이지 않는 자산의 회계 담당자다. 사고가 안 나는 것이 성과인 직무는 성과를 증명하기 어렵다. 보안과 안전 관리가 같은 처지다. 그 분야들이 점검 기록으로 성과를 증명하듯, 설계자도 대조와 검수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 그래서 더욱 기록이 필요하다.


9. 디테일의 원리: 상세 설정이 패러독스를 줄이는 이유

일관성을 지키는 실무 수단이 디테일이다. 언뜻 반대로 보인다. 설정이 많을수록 충돌할 설정도 많아지지 않는가. 그런데 실제로는 상세한 설정이 패러독스를 줄여준다. 원리는 결정의 시점에 있다. 설정이 없는 부분은 백지가 아니다. 창작이 진행되면 그 부분은 반드시 누군가에 의해, 마감에 쫓기며, 그 장면의 필요만 보고 즉석에서 결정된다. 즉석 결정은 전체와 대조되지 않은 결정이고, 대조되지 않은 결정이 패러독스의 산지다. 연재물의 모순 대부분이 초기 구상이 아니라 중반의 급한 결정에서 나오는 이유다. 미리 만들어둔 디테일은 이 즉석 결정을 대체한다. 왕국의 인구를 미리 정해두면 아무도 그때그때 편한 숫자를 지어내지 않는다. 디테일은 창작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무단 결정을 구속한다. 또 하나의 원리는 연쇄 검증이다. 인구를 정하려면 식량 생산량을 봐야 하고, 식량을 보려면 경작지와 기후를 봐야 한다. 디테일 하나를 확정하는 과정이 주변 설정들과의 대조를 강제하는 것이다. 상세화 자체가 검증 절차를 겸한다. 그래서 잘 만든 설정집은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검수가 끝났다는 증명서다. 물론 모든 곳을 상세화할 수는 없다. 즉석 결정이 일어날 확률이 높은 곳, 곧 이야기가 자주 지나갈 길목부터 깔아두는 것이 순서다. 주인공의 이동 경로, 반복 등장하는 조직, 자주 언급될 과거 사건이 대표적인 길목이다. 길목의 판별은 설계 요소를 다룰 때 이어서 말한다.


10. 설정과 핍진성의 경계: 실무 작업은 어디까지인가

디테일이 미덕이라면 어디까지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마지막에 남는다. 핍진성을 위한 실무 작업에는 경계가 필요하다. 기준은 독자의 검증 가능 지점이다. 독자가 작품을 통해 검증할 수 있거나 검증하고 싶어질 범위까지가 실무의 의무 구간이다. 화폐가 화면에 나오면 단위와 대략의 가치는 의무다. 그 화폐의 합금 비율은 의무가 아니다. 다만 위조 화폐가 플롯에 등장할 예정이라면 합금 비율은 그 순간 의무 구간으로 들어온다. 경계는 고정선이 아니라 이야기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선이다. 다만 앞에서 본 대로 세계관은 낭비를 필수요소로 가지므로, 의무 구간 바깥의 작업이 금지되는 것은 아니다. 금지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의무 구간이 비어 있는데 바깥을 파는 일이다. 독자가 물을 것에 답이 없으면서 아무도 안 물을 것에 답이 쌓이는 상태는 놀음이다. 다른 하나는 만든 것을 다 보여주려는 일이다. 설정의 존재와 설정의 노출은 별개다. 빙산은 잠긴 부분 때문에 떠 있지만, 잠긴 부분을 물 위로 끌어올리면 배를 막는 장애물이 된다. 문서에는 전부 있되 작품에는 필요한 만큼만 나온다. 노출되지 않은 부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작품의 예비 자원으로 남는다. 이 노출 통제의 권한은 작가에게 있고, 비축의 바카라임은 설계자에게 있다. 경계의 문제는 결국 분업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 분업의 전모가 다음 주제, 곧 세계관의 효용과 직업의 문제다.


세계관설계자 3편. 왜 세계관인가

핍진성이 세계관의 품질 기준이라면, 이제 남는 것은 값의 문제다. 낭비와 사치를 필수요소로 가진 작업에 조직이 왜 돈을 대는가. 세계관은 무엇을 벌어다 주는가. 3편은 이 질문에 산업의 언어로 답한다. 답의 뼈대는 확장이다: 하나의 세계가 여러 매체로, 여러 작품으로, 여러 사업으로 늘어나는 구조 속에서 세계관은 비용이 아니라 기반 설비가 된다. 그 구조를 이루는 개념들을 순서대로 확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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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OSMU: 원 소스 멀티 유즈

확장을 가리키는 가장 익숙한 말이 OSMU다.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 하나의 원천 콘텐츠를 여러 매체와 상품으로 활용하는 전략을 뜻하며, 한국 콘텐츠 산업이 특히 즐겨 써온 용어다. 성공한 웹툰이 드라마가 되고, 드라마가 게임이 되고, 캐릭터가 인형과 문구가 되는 경로가 전형이다. OSMU의 경제 논리는 명료하다. 검증된 원천은 실패 확률을 낮추고, 이미 형성된 팬은 초기 마케팅 비용을 대신한다. 새 매체로 옮길 때마다 제로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이점이다. 실패해도 원천의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험 분산의 효과도 있다. 한 번의 각색 실패가 원작의 팬덤까지 지우지는 못한다. 그런데 이 전략의 성패는 옮겨지는 것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줄거리만 옮기면 각색이고, 캐릭터만 옮기면 라이선스 상품이다. 매체가 바뀌어도 훼손되지 않고 옮겨지는 자산이 따로 있으니, 그것이 세계다. 줄거리는 매체의 문법에 따라 바뀔 수밖에 없지만, 그 사건들이 벌어지는 세계의 법칙과 지리와 역사는 공통 기반으로 남는다. OSMU가 반복될수록 원 소스의 실체는 특정 작품에서 그 작품의 세계관 쪽으로 이동한다. 활용이 거듭되면 원천의 정의가 바뀌는 것이다. 팬들이 어느 시점부터 작품명 대신 세계의 이름으로 프랜차이즈를 부르기 시작하는 현상이 그 신호다. 이 관찰을 뒤집으면 다음 개념이 나온다.


2. MUOS: 방향을 뒤집은 발상

OSMU를 뒤집은 것이 MUOS다. 멀티 유즈를 먼저 상정하고 원 소스를 설계한다는 발상이다. OSMU가 성공한 작품에서 출발해 사후적으로 확장하는 경로라면, MUOS는 확장 계획에서 출발해 원천을 역산하는 경로다. 처음부터 드라마, 게임, 공연, 상품으로 전개될 것을 전제하고, 그 모든 활용을 견딜 수 있는 원천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 물음의 답은 단일 작품일 수 없다. 완결된 작품은 이미 한 매체의 문법에 최적화되어 있어서, 다른 매체로 옮길 때마다 개조 비용이 든다. 모든 활용을 견디는 원천은 매체 이전의 것, 곧 세계관이다. MUOS 체제에서 세계관은 부속 문서가 아니라 첫 산출물이 된다. 작품들이 세계관에서 파생되는 순서다. 문서가 먼저 있고 콘텐츠가 그 문서를 참조하며 태어난다. 아이돌 그룹의 세계관 기획이 대표 사례다. 데뷔 전에 세계와 설정이 먼저 설계되고, 뮤직비디오와 앨범과 콘텐츠가 그 세계의 조각들로 발표된다. 원 소스에 해당하는 단일 작품은 어디에도 없는데 유니버스는 존재한다. 관객은 조각들을 통해서만 세계를 만나고, 세계의 전모는 문서 안에만 있다. 다만 MUOS는 위험도 반대로 안는다. OSMU는 검증 후 확장이라 안전하지만, MUOS는 검증 전 투자라서 세계관의 설계 품질이 사업 위험을 직접 결정한다. 설계가 직무가 되어야 하는 산업적 이유가 여기 있다.


3. 트랜스미디어: 매체를 건너는 서사

OSMU와 MUOS가 사업의 언어라면, 같은 현상을 서사의 언어로 부르는 이름이 트랜스미디어transmedia다. 미디어 학자 헨리 젠킨스가 정리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하나의 이야기 세계가 여러 매체에 나뉘어 전개되고, 각 매체가 저마다 고유한 기여를 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단순 이식과의 차이가 중요하다. 같은 줄거리를 매체만 바꿔 반복하면 어댑테이션, 곧 각색이다. 트랜스미디어는 영화가 본편을, 게임이 전사를, 웹툰이 조연의 뒷이야기를 맡는 식으로 매체마다 다른 조각을 배분한다. 관객은 조각들을 모아 자기 머릿속에서 전체 세계를 조립한다. 조립의 수고 자체가 참여의 재미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이 방식의 승부처다. 이 구조가 성립하려면 조각들이 맞물릴 공통의 판이 필요하다. 연표가 어긋나면 조립이 안 되고, 지명이 다르면 같은 세계라는 감각이 깨진다. 그 판이 세계관이고, 판의 정밀도가 곧 조립의 품질이다. 매체가 늘수록 참조 관계는 기하급수로 늘어나므로, 판의 관리 비용도 확장 규모에 비례해 커진다. 트랜스미디어에서 세계관 문서는 창작 참고자료를 넘어 매체 간 인터페이스 규격이 된다. 각 제작진은 서로의 작품을 다 볼 수 없어도 같은 문서를 참조함으로써 호환을 유지한다. 규격 문서 없이 진행된 트랜스미디어가 어떻게 어긋나는지는 이미 여러 프랜차이즈가 비싼 수업료로 증명했다.


4. IP 확장: 저작물에서 지식재산으로

매체를 건너다니는 이 자산을 산업은 IP라고 부른다. 지식재산intellectual property의 약자로, 법적으로는 저작권과 상표권 등 무형 자산에 대한 권리를 뜻하지만, 콘텐츠 업계의 관용어로는 확장 가능한 콘텐츠 자산 그 자체를 가리킨다. 작품과 IP는 지위가 다르다. 작품은 완결된 저작물이고, IP는 그 저작물에서 반복 활용 가능한 요소들의 묶음이다. 캐릭터, 세계, 명칭, 상징이 여기에 속한다. 어떤 작품이 IP가 되었다는 말은 작품의 소비가 끝난 뒤에도 수익을 낳는 자산이 추출되었다는 뜻이다. 이 추출물의 목록을 보면 세계관의 자리가 보인다. 캐릭터는 수명이 있다. 배우가 늙고, 성우가 바뀌고, 세대의 취향이 이동한다. 개별 스토리는 소비되면 끝난다. 가장 오래 남는 것은 그것들을 담고 있던 세계다. 세계는 새 캐릭터를 계속 배출할 수 있고, 새 이야기를 계속 수용할 수 있다. 장수 IP들의 공통점은 캐릭터의 힘으로 시작해 세계의 힘으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간판 캐릭터가 세대교체를 거치는 동안에도 무대가 유지되면 팬덤은 이어진다. IP 확장이라는 말의 실무적 번역은 그래서 세계관에 신규 진입로를 내는 일이 된다. 어디에 길을 낼 수 있는지 아는 사람, 곧 세계의 지도를 가진 사람이 확장의 주도권을 쥔다. 지도 없이 확장하는 조직은 매번 외부 창작자의 기억력에 의존하게 된다.


5. 투자유치: 세계관이 투자 요소가 되는 이유

지도를 가졌다는 사실은 투자 심사에서 힘을 발휘한다. 세계관의 중요성이 투자의 중요 요소가 될 만큼 커진 데에는 심사의 논리가 있다. 투자자가 콘텐츠에서 사는 것은 완성된 작품 하나가 아니라 미래 수익의 흐름이다. 작품 하나의 흥행은 예측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흥행했을 때 얼마나 확장될 수 있는가는 어느 정도 심사가 가능하다. 불확실한 단일 사건 대신 조건부의 구조를 심사하는 쪽이 금융의 문법에 맞기 때문이다. 그 심사의 증빙이 세계관 문서다. 연대기가 있고, 미등장 지역과 인물의 목록이 있고, 파생 작품의 진입로가 표시된 문서는 이 콘텐츠가 시리즈와 스핀오프와 이종 매체로 뻗을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실사 자료가 된다. 반대로 세계관 문서가 없는 프로젝트의 확장 계획은 구두 약속과 다를 바 없다. 계획서의 확장 로드맵 한 장과 그 로드맵을 받치는 설정 문서 뭉치는 심사에서 전혀 다른 무게를 갖는다. 여기서 문서의 형태가 다시 문제가 된다. 창작자의 머릿속에만 있는 세계, 채팅과 메모에 흩어진 설정은 실사를 통과하지 못한다. 심사자는 창작자의 열정이 아니라 조직의 자산을 심사하며, 자산은 문서로 존재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전달 가능한 산출물의 형태라는 요구가 여기서 돈의 문제로 돌아온다. 같은 세계라도 문서화 수준에 따라 담보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세계관 정리 작업은 그래서 창작 지원이면서 동시에 자산 실사 준비다.


6. 파생버전의 발생: 스토리텔링의 다양함

확장이 실행되면 필연적으로 생기는 현상이 있다. 파생버전이다. 파생버전은 같은 세계관에서 갈라져 나온 서로 다른 판본들을 뜻한다. 원작 웹툰의 세계와 드라마판의 세계는 같은 세계이면서 다르다. 발생 원인은 크게 셋이다. 첫째는 매체의 제약이다. 매체마다 스토리텔링의 문법이 달라서, 옮기는 순간 각색이 강제된다. 소설의 내면 독백은 영상에서 사건으로 바뀌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설정이 조정된다. 둘째는 제작 주체의 분리다. 다른 회사, 다른 감독, 다른 작가는 같은 문서를 받아도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해석의 차이는 통제할 수 있어도 제거할 수는 없다. 계약서와 감수로 줄일 수 있을 뿐이며, 완전한 통제를 시도하면 파트너를 잃는다. 각색자의 재량 범위를 미리 정해주는 쪽이 현실적이다. 셋째는 시간이다. 십 년 넘게 이어지는 세계는 시대의 감수성 변화에 맞춰 리부트되고, 리부트는 공인된 파생버전이다. 갱신 없이 버틴 세계는 낡은 감수성과 함께 침몰하므로, 리부트는 장수의 조건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 셋 모두 사고가 아니라 확장의 정상 비용이라는 점이다. 파생버전이 하나도 없는 세계는 확장이 없었던 세계다. 판본의 개수는 그 세계가 치른 확장의 횟수와 대체로 비례한다. 그러므로 목표는 파생의 방지가 아니라 파생의 관리다. 갈라짐을 전제하고 갈라지는 방식을 통제하는 쪽으로 문제를 옮겨야 한다. 그 통제의 원칙이 다음 주제다.


7. 파생버전의 관리: 갈라진 버전을 다루는 원칙

파생을 관리하는 첫 원칙은 정본의 지정이다. 정본은 버전 간 충돌이 났을 때 기준이 되는 공식 판본으로, 캐넌의 지위를 어느 버전이 갖는지 명시하는 일이다. 원작이 정본인 경우가 많지만 당연하지는 않다. 영상판이 정본의 지위를 넘겨받는 사례도 있고, 매체별로 별도 정본을 두는 다중 정본 체제도 있다. 어느 쪽이든 결정이 문서에 명시되어 있어야 하며, 결정되지 않은 정본은 분쟁이 났을 때 정치로 결정된다. 문서로 정하지 않은 것은 결국 목소리 큰 쪽이 정하게 된다는 뜻이다. 둘째 원칙은 차이의 기록이다. 버전 간의 다른 점을 숨기거나 방치하지 않고 대조표로 관리한다. 드라마판에서 변경된 설정의 목록이 있으면 다음 파생 작품이 어느 쪽을 따를지 선택할 수 있다. 목록이 없으면 세 번째 버전은 두 버전의 차이를 모른 채 제3의 변형을 만들고, 세계는 통제 없이 발산한다. 셋째 원칙은 격리의 공식화다. 정본과 양립할 수 없는 시도는 외전, 평행세계, 이프if 스토리 같은 공인된 격리 구역을 만들어 수용한다. 격리는 배제가 아니라 실험실의 제공이다. 본편의 신용을 지키면서 파격을 시험할 공간이 있는 세계가 오래 간다. 실험작의 성과가 검증되면 정본으로 승격하는 경로까지 마련해두면 격리 구역은 신설 부서의 역할을 겸한다. 세 원칙의 공통분모는 하나다: 갈라짐을 기록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


8. 범용성: 세계관의 상품성

관리되는 세계는 팔릴 수 있는 세계가 되고, 여기서 범용성이라는 성질이 문제가 된다. 범용성은 세계관이 특정 작품, 특정 매체, 특정 창작자에게 덜 묶여 있는 정도다. 범용성이 높을수록 세계는 더 많은 손에서 더 많은 작품을 낳을 수 있다. 캠페인 세팅이 범용성의 극단에 있다. 어떤 진행자가 와도 쓸 수 있도록 설계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명 세팅들은 원작자가 떠난 뒤에도 수십 년째 신작을 받아내고 있다. 반대 극단에는 한 작가의 문체와 분리 불가능하게 결합된 세계가 있다. 범용성을 올리는 요인은 구체적으로 짚을 수 있다. 특정 주인공에게 의존하지 않는 갈등 구조, 한 시대에 고정되지 않은 연대기의 여백, 장르 문법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기본 규칙이 그것이다. 거꾸로 범용성을 깎는 요인도 있다. 단 한 명의 캐릭터가 세계의 존재 이유인 구조, 특정 매체에서만 구현 가능한 핵심 설정, 창작자 개인의 사정과 얽힌 내부 사정 같은 것들이다. 주의할 점은 범용성이 무조건적인 미덕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것에 쓰일 수 있는 세계는 아무 특징이 없는 세계와 구별되지 않는다. 백지의 범용성은 세계의 범용성이 아니다. 세계는 고유한 법칙을 가진 채로 여러 손을 견뎌야 한다. 범용성은 상품성의 조건이지 매력의 조건이 아니며, 이 긴장은 직업을 다룰 때 다시 짚는다.


9. 팬의 상상: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조건

세계관의 효용 중 가장 값을 매기기 어려운 것이 팬의 상상이다. 잘 지어진 세계에서 관객은 보여준 이야기 바깥을 스스로 상상하기 시작한다. 조연의 과거를 추측하고, 등장하지 않은 지역을 그려보고, 만약을 이야기한다. 이 자발적 생산은 2차 창작으로, 팬 커뮤니티의 고증 놀이로, 파논으로 물질화된다. 산업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무급의 콘텐츠 생산이자 이탈 방지 장치다. 다음 공식 작품이 나올 때까지의 공백기를 팬덤이 스스로 만든 콘텐츠로 버티는 것이다. 팬의 상상이 발화하는 조건은 관찰 가능하다. 첫째, 공백이 보여야 한다. 언급은 되었지만 설명되지 않은 것이 상상의 착화점이다. 모든 것이 설명된 세계는 역설적으로 상상할 거리가 없다. 완결된 백과사전은 읽을 수는 있어도 놀 수는 없다. 둘째, 공백의 가장자리가 단단해야 한다. 주변 설정이 정합적이어야 그 공백에 대한 추론이 놀이가 된다. 규칙 없는 세계의 공백은 상상이 아니라 무관심을 낳는다. 추론이 성립하려면 단서가 있어야 하고, 단서는 정합적인 주변 설정에서만 나온다. 셋째, 상상이 존중된다는 신호가 필요하다. 파논을 짓밟는 공식 행보가 반복되면 팬덤은 상상을 멈춘다. 요컨대 팬의 상상은 방목이 아니라 조성의 결과다. 설명된 것과 비워진 것의 배치가 곧 그 조성 설계다. 이 배치는 캐넌과 파논의 관계 관리와 같은 문제의 다른 이름이다.


10. 산출물 우선주의: 전달 가능한 산출물이 최우선인 이유

효용의 목록을 관통하는 조건이 하나 있다. 투자 심사를 통과하는 것도, 파생버전을 관리하는 것도, 매체 간 호환을 지키는 것도 모두 문서를 전제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연재의 실무 제1원칙은 산출물 우선주의다. 세계관 작업의 모든 국면에서 전달 가능한 산출물의 형태를 최우선으로 삼는다는 원칙이다. 전달 가능하다는 조건은 세 가지로 풀 수 있다. 받은 사람이 원하는 항목을 찾을 수 있고, 찾은 내용을 출처와 함께 인용할 수 있고, 갱신된 부분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검색, 인용, 추적의 세 요건이다. 셋 중 하나라도 빠지면 문서는 있어도 산출물은 없는 상태가 된다. 찾을 수 없는 정보는 없는 정보이고, 출처 없는 정보는 믿을 수 없는 정보이며, 이력 없는 정보는 낡았는지 알 수 없는 정보다. 머릿속의 세계, 대화 속의 합의, 폴더에 흩어진 조각 문서는 셋 중 무엇도 충족하지 못한다. 이 원칙이 창작의 낭만과 부딪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는 반대다. 문서가 세계를 지키기 때문에 창작자가 마음 놓고 떠날 수 있고, 돌아올 수 있고, 교체될 수 있다. 산출물은 창작자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를 소모품이 되지 않게 한다. 사람이 기억의 인질로 잡혀 있는 조직에서는 휴가도 이직도 세계의 위기가 된다. 무엇이 그 산출물을 만들 수 있는 직무인가, 그 직무는 작가와 무엇이 다른가. 효용의 이야기는 이렇게 직업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세계관설계자 4편. 설계자라는 직업

산출물을 만들 직무의 이름이 필요하다. 세계관이 자산이라면 그 자산의 생산과 관리를 맡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의 일은 작가의 일과 겹치면서도 다르다. 4편의 관통 질문은 이것이다: 작가와 설계자는 무엇이 다른가. 경계를 긋는 이유는 서열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협업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다. 업무의 경계가 없는 곳에서는 바카라임의 경계도 없고, 바카라임이 없는 일은 직업이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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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 기획자, 설계자의 차이

세 직무는 산출물로 구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작가의 산출물은 작품이다. 시작과 끝이 있는 완결된 이야기, 독자가 직접 소비하는 최종재를 만든다. 기획자의 산출물은 제품의 요구사항이다. 무엇을 왜 만들어야 하는지, 누구에게 어떻게 팔 것인지를 정의한 문서를 만든다. 설계자의 산출물은 세계다. 정확히는 세계를 담은 참조 가능한 문서 체계로, 작가와 기획자가 소비하는 중간재를 만든다. 최종재와 중간재의 차이가 세 직무의 평가 기준을 가른다. 작품은 독자의 반응으로 평가받고, 기획은 제품의 성과로 평가받고, 세계관 문서는 그것을 참조한 창작들이 얼마나 어긋나지 않았는가로 평가받는다. 평가의 시차도 다르다. 작품은 공개 직후 심판받지만, 문서의 품질은 몇 번의 파생을 거친 뒤에야 드러난다. 고객도 다르다. 작가의 고객은 독자이고, 설계자의 고객은 일차적으로 동료 창작자들이다. 이 구분이 흐려지면 사고가 난다. 설계자가 독자를 직접 상대하려 하면 문서가 작품 흉내를 내며 서사를 품기 시작하고, 작가가 세계의 관리 바카라임까지 지면 창작이 행정에 짓눌린다. 어느 쪽이든 두 직무의 산출물이 함께 나빠진다. 한 사람이 여러 모자를 쓸 수는 있다. 다만 지금 어느 모자를 쓰고 있는지는 언제나 분명해야 한다. 겸직 자체가 아니라 겸직의 무자각이 사고의 원인이다. 작은 조직일수록 역할 전환의 선언을 습관으로 만들어두는 것이 낫다.


2. 설계와 편집: 이야기는 쓰고 세계관은 설계한다

동사의 차이도 직무를 가른다. 이야기는 쓴다고 말하고, 세계관은 설계한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쓴다는 동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선형의 생산을 가리킨다. 설계한다는 동사는 요소를 배치하고 관계를 조정하는 구조의 생산을 가리킨다. 세계관 작업의 실제 공정을 보면 설계라는 말로도 부족해서 편집이 절반이다. 기존 작품에서 설정을 발굴하고, 흩어진 조각을 대조하고, 충돌을 중재하고, 살릴 것과 버릴 것을 판정하고, 표기를 통일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시간보다 이미 있는 유를 정돈하는 시간이 길다. 특히 오래 연재된 작품의 세계를 물려받은 경우, 첫 일 년은 거의 편집만 하게 된다. 이 사실은 채용과 훈련의 기준을 바꾼다. 세계관 담당자에게 가장 필요한 재능이 기발한 상상력이라는 통념은 절반만 맞다. 상상력은 후보를 만들 뿐이고, 후보를 세계에 편입시키는 능력은 대조와 판정과 기록의 능력이다. 좋은 설계자의 자질 목록은 그래서 좋은 편집자의 자질 목록과 많이 겹친다: 남의 글을 정확히 읽는 독해력, 규칙을 일관되게 적용하는 집요함, 자기 취향을 세계의 기준 뒤에 두는 절제. 자기 세계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강한 사람일수록 남의 세계를 관리하는 이 자리에서 흔들리기 쉽다. 창작자의 화려함보다 사서의 꼼꼼함에 가까운 상이다. 채용 면접에서 물을 것도 세계를 지어보라가 아니라 이 두 설정의 충돌을 중재해보라 쪽이다. 이 상이 서 있어야 다음 비교가 정확해진다.


3. TRPG 마스터와 TRPG 세팅의 차이

설계자를 TRPG의 게임 마스터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은데, 절반은 오해다. 마스터는 플레이 현장의 실행자다. 참가자들의 돌발 행동에 실시간으로 응답하고, 규칙의 빈틈을 즉석에서 재정하고, 오늘 밤의 재미에 바카라임을 진다. 마스터의 재능은 순발력과 연기력과 진행력이다. 설계자의 자리는 마스터가 아니라 마스터의 바카라상 위에 놓인 세팅집 쪽이다. 캠페인 세팅을 만든 사람은 플레이 현장에 없다. 대신 어느 현장에서 어떤 마스터가 진행해도 무너지지 않을 세계를 문서로 미리 공급한다. 즉석 재정은 마스터의 몫이되, 재정의 근거가 될 자료를 채워두는 것이 세팅 제작자의 몫이다. 좋은 세팅은 마스터의 즉흥을 막지 않고 즉흥의 품질을 올린다. 이 구분은 실무에서 권한의 문제로 나타난다. 현장의 임기응변 권한과 세계의 개정 권한은 다른 권한이다. 마스터가 오늘 세션에서 내린 재정이 자동으로 세계의 법이 되지는 않듯, 작가가 한 작품에서 만든 즉흥 설정이 자동으로 캐넌이 되지는 않는다. 등재라는 관문을 거쳐야 한다. 관문은 현장의 창의를 걸러내는 검열이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대조를 거치게 하는 검수다. 거꾸로 설계자는 현장을 직접 지휘하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문서로 공급하고 관문을 지키는 것까지가 세팅 쪽의 일이다. 현장 개입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설계자는 결국 모든 프로젝트의 병목이 된다. 자신이 없어도 돌아가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이 직무의 역설적인 성공 조건이다.


4. 자연발생적 세계관과 인위적 세계관

세계관이 만들어지는 경로는 크게 둘이다. 자연발생적 세계관은 작품이 먼저 있고 세계가 나중에 정리된 경우다. 연재가 쌓이면서 설정이 축적되고, 어느 시점에 그 축적을 사후적으로 체계화한다. 오래된 만화 시리즈와 장수 프랜차이즈 대부분이 이 경로를 걸었다. 인위적 세계관은 세계가 먼저 설계되고 작품이 나중에 나오는 경우다. MUOS 체제의 기획들, 데뷔 전에 세계부터 짓는 아이돌 유니버스가 여기 속한다. 두 경로는 각자의 병을 가진다. 자연발생형의 병은 모순의 누적이다. 등재 관문 없이 수십 년 쌓인 설정에는 패러독스가 지층처럼 박혀 있어서, 정리 작업은 고고학과 외과수술을 겸하게 된다. 어느 지층까지 파고 어느 모순을 잘라낼지가 매번 판정의 대상이 된다. 인위형의 병은 검증의 부재다. 독자를 만나본 적 없는 설정들로 세계를 가득 채우면, 어떤 것이 재미로 작동하는지 모른 채 물량만 쌓인다. 서고는 가득한데 대출 기록이 없는 도서관과 같다. 처방은 서로의 장점을 빌리는 것이다. 자연발생형에는 지금부터라도 관문을 세우는 것이 처방이고, 인위형에는 작은 작품으로 빨리 시장의 검증을 받는 것이 처방이다. 설계자는 자기 세계가 어느 경로 위에 있는지부터 진단해야 한다. 경로가 다르면 첫 작업이 다르다. 자연발생형의 첫 작업은 감사와 목록화이고, 인위형의 첫 작업은 최소 검증 상품의 출시다. 진단 없이 방법론부터 적용하면 처방이 뒤바뀐다.


5. 유니버스 디자이너: 직업으로 성립하는 조건

이 일을 맡는 사람의 직함으로 나는 유니버스 디자이너라는 말을 쓴다. 직함은 지어 부르면 그만이지만, 직업은 조건을 갖춰야 성립한다. 조건은 셋으로 본다. 첫째는 반복되는 수요다. 한 회사에 한 번 있는 일은 프로젝트이고, 여러 조직에서 계속 생기는 일이라야 직업이다. IP 확장이 산업의 기본 전략이 된 지금 수요의 반복성은 확보되는 중이다. 세계관 담당이라는 채용 공고가 게임과 엔터테인먼트 양쪽에서 늘고 있는 것이 그 지표다. 둘째는 규격화된 산출물이다. 직업은 결과물의 형태로 자신을 증명한다. 건축가에게 도면이, 회계사에게 재무제표가 있듯이 유니버스 디자이너에게는 세계관 문서 체계가 있어야 한다. 산출물의 규격이 없으면 발주도 검수도 견적도 불가능하다. 규격 없는 직무의 보수는 협상이 아니라 호가로 정해지고, 호가 시장에서는 신뢰가 자라지 않는다. 셋째는 전수 가능성이다. 한 사람의 천재성에만 기대는 일은 직업이 아니라 재능이다. 방법이 정리되어 가르치고 배울 수 있어야 하며, 이것이 앞에서 말한 CT화다. 셋 중 지금 가장 부족한 것이 둘째와 셋째다. 수요는 생겼는데 규격과 교육이 따라가지 못해서, 현장은 매번 자격 미상의 사람을 뽑아 맨땅에서 굴리고 있다. 성공하면 개인의 재능으로, 실패하면 직무 무용론으로 결론 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 연재가 규격과 방법 쪽을 계속 파고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6. 업무의 분리: 시나리오 기획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들

직업의 탄생은 대개 기존 직무의 세포분열이다. 게임 업계에서 세계관 작업은 오랫동안 시나리오 기획의 부속 업무였다. 시나리오 기획자가 퀘스트 대사를 쓰다가 지역 설정도 쓰고, 아이템 설명을 쓰다가 연표도 정리했다. 세계 관리가 별도의 일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던 시기다. 프로젝트가 작을 때는 이 겸업이 효율적이다. 문제는 규모가 커질 때 생긴다. 라이브 서비스가 수년씩 이어지고, 신작이 전작의 세계를 이어받고, IP가 게임 밖으로 수출되기 시작하면, 세계의 관리는 한 작품의 시나리오 업무량을 넘어선다. 한 사람의 겸업이 감당하던 일이 여러 팀의 참조 수요를 받는 기반 업무로 변하는 것이다. 이때 떨어져 나오는 업무의 목록은 뚜렷하다: 작품 단위가 아니라 IP 단위의 설정 총괄, 신규 콘텐츠의 설정 감수, 파생 프로젝트와 외부 파트너에 대한 세계관 자료 공급, 설정 문서 체계의 구축과 개정 관리. 공통점은 전부 특정 작품의 마감과 무관하게 계속되는 일이라는 점이다. 마감이 있는 일과 마감이 없는 일을 한 사람에게 맡기면 마감 없는 일이 늘 뒤로 밀린다. 세계 관리가 만성적으로 방치되는 조직의 구조적 원인이 이것이다. 분리는 사치가 아니라 규모가 강제하는 수순이다. 회계가 총무에서, 데이터 분석이 마케팅에서 분화해 나온 것과 같은 경로다. 분리의 시점을 놓친 조직은 세계의 부채가 감당 불능으로 쌓인 뒤에야 전담자를 찾는다.


7. 도입기의 의무감: 설정을 다 써야 할 것 같은 압박

분리된 협업의 초기에는 특유의 부작용이 나타난다. 설정에 대한 의무감이다. 두꺼운 세계관 문서를 건네받은 작가는 이것을 다 반영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기 쉽다. 비싸게 만든 자료라는 것을 알기에, 안 쓰면 낭비 같고 못 쓰면 실력 부족 같다. 발주한 조직 쪽도 마찬가지여서, 만들어둔 설정이 작품에 안 나오면 투자가 회수되지 않았다고 느낀다. 양쪽의 의무감이 만나면 최악의 결과물이 나온다. 이야기가 멈추고 설정 소개가 시작되는 작품, 대사가 백과사전을 낭독하는 작품이다. 독자는 시험공부를 하러 온 것이 아니므로 떠난다. 설정 자랑이 재미를 이긴 작품의 말로는 장르를 불문하고 같다. 이 압박은 세계관 문서의 성격에 대한 오해에서 온다. 문서는 이행해야 할 계약서가 아니라 꺼내 쓰는 창고다. 창고의 가치는 소진율이 아니라 필요할 때 원하는 것이 있었는가로 측정된다. 재고 회전율로 창고를 평가하기 시작하면 현장은 필요 없는 물건부터 꺼내 쓰게 되고, 세계관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면 그것이 곧 설정 낭독이다. 백동화의 원리를 떠올리면 된다. 세계관은 애초에 낭비를 필수요소로 갖는 작업이었다. 만든 것의 대부분이 화면에 안 나오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정상 상태다. 이 정상 상태를 계약과 평가 기준에 명문화해두는 것이 도입기의 갈등을 줄이는 실무 요령이다. 활용률 대신 참조의 정확성을 지표로 삼으면 양쪽의 의무감이 함께 풀린다.


8. 상상력 불가침: 작가의 상상력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의무감의 문제를 원칙의 언어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세계관은 작가의 상상력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것을 상상력 불가침의 원칙이라 부르고, 설계 업무의 제1 제약으로 삼는다. 세계관의 존재 이유는 이야기의 탄생을 돕는 것이다. 그런데 규칙이 과밀하고 금지가 촘촘한 세계에서 작가는 쓸 수 있는 이야기부터 찾는 처지가 된다. 창작의 순서가 뒤집히는 것이다. 준수 비용이 창작 이득을 넘는 순간 작가는 세계를 우회하거나 떠나며, 참조되지 않는 세계관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세계의 권위는 강제에서 나오지 않고 유용함에서 나온다. 실무 지침은 명령문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좋은 세계관 문서는 하지 말라의 목록이 아니라 이렇게 되어 있다의 목록이다. 금지는 세계의 정합성이 실제로 무너지는 지점에만 최소한으로 건다. 나머지는 상태의 서술로 제공하여, 작가가 그 상태 위에서 무엇이든 지어볼 수 있게 한다. 이 도시는 밤에 통행이 금지된다는 서술은 금지처럼 보이지만, 작가에게는 통금을 어기는 이야기라는 새 소재를 주는 상태 서술이다. 감수 업무도 같은 원칙을 따른다. 감수자의 질문은 설정과 다르다가 아니라 이 변경을 등재할 것인가여야 한다. 전자는 검열의 언어이고 후자는 관리의 언어다. 작가의 일탈은 처벌 대상이 아니라 세계 갱신의 후보다. 불가침의 원칙은 결국 세계를 작가의 적이 아니라 도구로 유지하는 원칙이다.


9. 범용성과 참신함의 경계

불가침의 원칙을 지키다 보면 설계는 자연히 범용성 쪽으로 기운다. 여기서 앞에 미뤄둔 긴장이 돌아온다. 범용성은 상품성의 조건이지 매력의 조건이 아니라는 문제다. 어떤 작가가 와도 쓸 수 있는 세계를 만들다 보면, 장르 표준에 수렴한 무난한 세계가 되기 쉽다. 무난한 세계는 참조하기는 좋아도 사랑받기는 어렵다. 팬덤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그 세계만의 고유한 무엇이다. 표준에 충실한 세계는 대체 가능하고, 대체 가능한 것에는 애착이 붙지 않는다. 반대로 참신함만 좇으면 세계는 뾰족해지는 대신 다루기 어려워진다. 독창적 설정일수록 이해 비용이 높고, 이해 비용이 높은 세계는 소수의 창작자만 다룰 수 있어 범용성이 죽는다. 원작자 사후에 아무도 이어받지 못하는 세계들이 이 극단의 사례다. 설계는 이 두 값 사이의 최적점 찾기다. 실무의 요령은 층을 나누는 것이다. 세계의 기반층은 장르 문법에 가깝게 두어 진입 비용을 낮추고, 고유성은 소수의 핵심 설정에 집중시켜 식별력을 만든다. 전부 낯선 세계가 아니라 낯선 것이 정확히 배치된 세계가 목표다. 독자는 익숙한 문으로 들어와 낯선 방에서 사로잡힌다. 어느 설정을 고유성의 자리에 앉힐지가 설계자의 가장 창작적인 결정이며, 이 결정에는 정답표가 없다. 그래서 이 직무는 행정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관리의 규율과 창작의 감각이 한 직무 안에서 요구되는 것이 이 일의 난도이자 재미다.


10. 실험적 협업: 게임 밖 창작자들과 일하는 법

경계선의 마지막 문제는 조직 바깥에 있다. IP가 게임과 웹툰과 영상과 공연을 오가는 시대의 설계자는 자기 업계의 문법을 모르는 창작자들과 일하게 된다. 이 협업은 아직 표준이 없는 실험의 영역이다. 실패의 전형부터 보자. 두꺼운 설정집을 통째로 넘기고 알아서 참조하라는 방식은 거의 실패한다. 매체가 다르면 필요한 정보의 종류와 해상도가 다른데, 문서는 원 매체의 필요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받은 쪽은 필요한 것을 찾지 못하고, 준 쪽은 다 줬는데 왜 못 쓰냐고 답답해한다. 영상 팀에는 시각 자료와 인물 관계가, 공연 팀에는 상징과 정서의 축이, 게임 팀에는 규칙과 수치의 체계가 먼저 필요하다. 그래서 실험적 협업의 실무는 번역에 가깝다. 같은 세계를 상대 매체의 언어로 추려 다시 포장하는 매체별 브리핑 문서가 통째 전달보다 훨씬 잘 작동한다. 분량이 십분의 일로 줄어도 상대의 언어로 정리된 문서가 참조율은 몇 배로 높다. 또 하나의 요령은 질의 창구의 단일화다. 외부 창작자의 설정 질문이 여러 담당자에게 흩어지면 대답이 서로 어긋나 즉석에서 파생버전이 태어난다. 답변자마다 다른 기억으로 답하기 때문이다. 창구를 설계자로 모으고, 답변한 내용을 문서에 반영해 다음 질문자부터는 문서가 답하게 만든다. 협업의 횟수만큼 문서가 자라는 구조를 만들면, 실험은 반복될수록 표준에 가까워진다. 외부 협업의 질문 목록 자체가 문서의 부족분을 알려주는 무료 감사 보고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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